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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ah하네요.

[우쿱] 하얀호랑이후니x검은곰처리 10편(18.5.20최종수정) 본문

트윗썰모음/읒랑곰철

[우쿱] 하얀호랑이후니x검은곰처리 10편(18.5.20최종수정)

다몬드 2018. 5. 20. 20:47

 

 

 

좋아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승철이는 요새 매우 피곤함. 계절이 고개를 넘느냐 힘들어서 피곤한가? 하면 일찍 꺼낸 전기장판에 몸 지져도 피곤이 가시지 않음. 이제는 야식만큼 익숙해진 야간근무라서 피곤한 이유가 되지 않는데 왜 피곤할까, 고민하지. 고민하지만 사실 알고 있음. 자신의 피로의 주원인을.

늦은 시간에 퇴근한 승철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따뜻한 온기와 인사에 몸을 부르르 떪. 나이가 들면서 추위에 약해져 따뜻하게 옷을 입었음에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집안온기를 이길 옷이 없더라. 드디어 집이다...! 라는 기쁨에 노곤한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실까지 걸어와 승철은 푸덕 소파에 다이빙하듯 엎드려 누웠음. 가격대비 최고인 소파에 한쪽 볼을 누른 채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있으니 천상낙원이 바로 이곳이구나.

왔어?

졸려. 승쳘의 큰 눈이 천천히 깜박임.

씻고자.

반쯤 자던 승철은 가만가만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눈을 끔벅거림. 끔벅거리다 공기를 흔드는 낮고 조용한 웃음소리에 퍼뜩 일어섬. 갑자기 일어난 승철때문에 어정쩡하게 공중에서 멈춘 손 뒤로 소파 한 쪽에 자리 잡은 지훈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승철을 내려 본다.

너 왜 안 자?

당황해서 튀어나온 말에 지훈은 고민도 없이 답했음.

형이 안 왔잖아. 같이 자려고 기다렸지. 그리고 아직 자기 일러.

뉴스하는 티비를 가리키며 내일부터 날씨 많이 추워진대 말함. 승철은 무심하게 티비로 향한 지훈의 옆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닫았다 겨우 그래... 라고 답함.

뭐가?

...그렇다고.

한참을 말없다 갑자기 그래 하는 승철이 이상한지 지훈의 한 쪽 눈썹이 뾰족 올라가고. 회사에 무슨 일 있었어? 물었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형 좀 씻을게.

....

도망가듯 안방으로 들어간 승철은 집요하게 달라붙는 지훈의 눈빛을 못 본 척 하며 문을 닫고 머리를 감싸 안으며 풀썩 주저앉음. 미쳤어. 미쳤어. 최승철 미쳤어. 방금 소파에서 일어난 대화를 되감기하며 내적비명을 지르고 마음을 빵빵 차고 난리부르스 추다 핫, 또 너무 여기서 시간 끌면 지훈이가 제 이상함을 눈치 챌까 잠옷과 갈아입을 속옷 챙기고 후다닥 욕실로 들어감.

욕실로 걸음 옮기면서 힐끔 지훈 쪽을 봤을 땐 지훈이는 소파에 앉아 티비에 정신 팔렸음. 다행이다. 안도감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짐. 긴장이 풀려 또 혼자 욕실 벽 차다 소리 없는 비명 지름. 진짜...싫다. 주저앉아 아픈 발을 감싸며 승철이 짜증냄. 내 집인데 회사만큼 불편해. 아니 회사보다 더 힘들어 짜증나. 이지훈. 진짜 미워. 나쁜 놈. 샤워기를 틀고 샴푸를 짜서 머리를 박박 감으면서 승철은 속으로만 짜증을 부림.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는 이유는 동거인 지훈이가 들을까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지훈이가 제 불만을 들을까 승철은 죄 없는 제 입술만 괴롭힘.

요새 승철은 지훈이때문에 많이 힘듦. 짜증나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슬프다가 얼굴이 빨개지기도 하지. 성격 다른 감정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어 나와서 승철의 마음을 들었다놨다하니 최승철의 심장은 몇 달 째 브레이크 없이 가속 중. 잠자다 밥 먹다 커피를 마시다 한 번씩 몸부림을 치며 잊으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 마음과 기억이다.

승철은 그 날, 결혼하겠다고 난리친 아들 수습하러 엄마가 올라와 안방에 자리 내어드리고 지훈과 작은 방에서 등을 마주하며 잠든 밤에 제 손으로 키운 지훈이가 좋아한다 고백할 때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음. 좋아한다는 말이 어떤 뜻이냐고 되묻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은 승철이었지. 그렇다고 유연하게 굴지 못했음. 너무 놀라서 어둠에 지훈의 눈 코 입 모든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지훈의 등 뒤로 어른한 달빛이 다 눈에 들어오는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지우개로 박박 지워서, 머리가 새하얘져서 승철은 지훈의 눈빛을 투명하게 받았지.

십년을 넘게 마주보던 내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낯설었어. 제 허리에 오던 애가 이젠 어깨를 넘어섰고 형아 하며 종알거리던 작은 입술이 수줍게 미소 지어. 혼자 다 할 줄 알면서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하는 어린 호랑이가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구나. 처음 본 것 같아. 아니 진짜 처음 봤지. 승철은 오늘 처음 지훈의 감정을 마주보았으니까.

그래서 승철은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함. 회사일이 안 힘들다고 느낄 만큼(뻥임) 집에 들어가 지훈과 마주하고 함께 사는 게 승철에게 스트레스로 더 다가옴.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침대에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할 때, 애청하는 드라마를 볼 때, 잠드는 순간과 일어난 순간. 그 모든 시간들에 있는 지훈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서 지쳐. 지훈은 아무렇지 않은데 승철만 혼자 예민하게. 왜냐면……

연애를 해

삼겹살을 뒤집으며 지수가 말함.

하면 알겠지

너는 알겠어?

젓가락 끝을 입술로 씹으며 승철이 지수를 쳐다봄. 지수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앞 접시에 미리 올린 깻잎 위로 옮기며 고개를 끄덕임.

몰라

모른다면서 고개는 왜 끄덕여-!

네가 바보라서

윤정하안!

고기 탄다. 얼른 먹어.

얘네들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해결 좀 해달라고 삼겹살 사주며 말했건만 엉뚱한 대답만 하는 지수와 놀리기만 하는 정한때문에 한숨만 더 늘었어.

여기 소주 한 병만요!

답답함에 소주 시켜서 원 샷.

지훈이 오늘 안 들어온다고 막 달리는 거야?

한 잔 비우고 두 잔 비우고 빠르게 소주병의 반을 비우는 승철에 정한이 말린다.

지훈이한테 이른다?

그게 얄미워서 팩 정한이 째려봄.

왜 이지훈한테 일러. 성인이, 내가 술을 마시겠다는데 어디서 호랑이가 쓰읍- 나를 혼내!

매서운 승철의 눈빛에 하하하 쾌활하게 웃으며 정한은 고기한 점 집어 자기 입으로 쏙 넣었음. 맞은편에 지수가 그렇게 마시다 훅 간다며 승철을 말리고. 정한은 톡톡 테이블을 연주하듯 손가락을 두들김.

. 최승철. .

땅이 돌아가고 천장이 돌아가고. 세상은 요지경-볼을 톡톡 건드리는 무언가가 귀찮아 손으로 대충 털어 쫓아냈음. 소처럼 눈을 끔벅이다 졸려 한마디 뱉었고.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가벼운 바람에 눈을 감았음.

귀찮아 진짜.

나보다 귀찮으려고. 반박은 마음으로만. 그렇게 잠들었다.

최 대리 얼굴이 왜 이리 엉망이야? 잠 못 잤어?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 타서 마시던 승철은 제 얼굴을 보며 걱정의 빛을 띄우는 상사에 푸석푸석하고 건조한 얼굴을 쓸며 씁쓸하게 웃음.

요새 잠이 좀 안 오네요.

고민이 많으면 잠이 안 온다 하던데. 뭐 고민이 있나?

...그냥 좀.

어떤 얼굴이 뽕 나타났다 사라졌음. 얼버무리며 말을 맺지 않는 승철이 걱정됐는지 상사는 안 어울리게 인생조언을 몇 마디 해주고 힘내라며 승철의 어깨를 두들기곤 나갔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대. 낯선 모습에 승철은 픽 웃었고 곧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술은 아래로 추락했음.

이지훈...

겨우 잊은 지훈이가 떠오름.

술 먹은 다음날. 쓰린 속에 신음을 흘리며 깨어난 승철은 이불을 끌어내리며 바닥에 발 닿기도 전에 문 열고 들어온 지훈에 깜짝 놀랐음.

마셔

원우 네서 다 같이 모여 밤샘 놀다가 온다던 지훈이가 아침부터 집에 있어서 놀랐지. 왜 있냐고 물으려다 마시라며 건넨 그릇에 할 말을 잃었음. 달콤한 향과 코끝을 데우는 온도가 딱 봐도 꿀물임. 자주는 아니지만 회사 회식이나 친구들 만나 술 먹고 오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지훈이가 타준 꿀물 수도 늘었음. 처음에 올리고당을 꿀로 착각해서 승철에게 날카로운 숙취를 선물했던 놈이 이젠 딱 승철 입맛에 맞게 탈줄 앎. 꿀물을 받아들 때마다 어린이한테 꿀물 타게 하는 제 부족함과 미안함에 부끄러웠었는데. 오늘은 꿀물만 멀거니 바라보게 됨.

독 안탔어. 그러니 마셔

예전엔 탔나봐

조금?

보조개가 폭 패도록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귀여워 승철은 따라 배시시 웃었음. 마음이 풀어져 입 가까이 그릇을 대고 기울여 마셨지. 꿀물은 부드럽게 흘러 승철의 입술을 적시고 입안을 데웠음. 반 정도 마시고 잠시 입술을 떼며 숨을 고르다 지훈과 눈이 마주침. 개구지게 웃던 그 얼굴 그대로 내려 보는 눈동자가 구슬같이 반짝임.

애들하고 재밌게 놀았어?

완전히. 내가 애들 다 이김.

오올. 이지훈 짱인데

칭찬하니 콧대를 세우며 자랑하는 모양새가 그 나이 남자애야. 어떤 신상게임이 나왔고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컨트롤을 보이며 친구들을 이겼는지 허세와 과장 좀 보탠 자랑에 엄지 척 내밀었음. 역시 이지훈. 내 새끼가 짱이다.

지훈의 자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승철이 비운 그릇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고 비틀비틀 다시 침대에 누우며 이불을 끌어당기는 동안 침대 옆에 앉으며 떠듦. 승철은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였고. 대박. 감탄사도 뱉고. 반응을 보이다 그냥 지훈을 봤음. 통통한 볼살과 말간 얼굴이 신나서 곡선을 이루어 동글동글.

....

신나게 떠들다 승철이가 너무 조용해서 지훈이 입이 다물어짐. 좀 창피하다 생각하는지 귀가 빨개. 승철은 웃다가 입을 열었음.

지훈아. 너는 왜 우리 집에 친구들 안 불러?

한아. 지수야. 내 얘기 좀 들어봐. ? 내가 좀 많이 답답해서 그래. ? 대충 흘러듣지 말고. 야아 나 좀 봐봐. 나 좀. 내가 말이야. , 지훈이를 내가 키웠단 말이야. 군대 제대하고 일하다가 발견한 그 어린 고양이 새끼를 데리고 와서 똥치우고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서 키웠어. 열심히 키웠지. 좀 잘못 많이 했고 실수도 했지만 우리 지훈이 잘 키웠다고 나 자부해. 응 그렇지? 맞다 그래! 그치. 맞아. 그렇게 훌륭하게 키웠는데 어? 내가 진짜 젖만 안 먹였지 내가 다 키웠는데. ? ! 그런데 걔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내가, 내가 그걸 받아들이겠어? 우리 지훈이 결혼하면 부모 석에 앉아서 내가 잘 키웠다 흐뭇하게 웃을 미래를 그렸는데 신랑이 나라니. 나라니... 왜 나야...

그래. 승철은 지훈이를 키웠다. 알바 뛰던 공사장 모래판위에서 죽어가던 어린 고양이새끼를 거둬 키운 날부터 승철의 손을 타지 않은 적 없고 둘을 나누어 얘기할 수 없는 과거들이었어. 지훈이의 미래를 위한답시고 형네 부부한테 보냈다가 버리지 말라며 지훈을 울렸고 그래서 더욱 매일 매순간 지훈을 위해 살았지. 지훈이가 다였다고 말할 수 있어. 다라고 믿어 의심치도 않고. 지훈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있지만 아깝다. 후회하지 않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래서 승철은 서글프고 속상해. 가만히 쳐다보는 눈동자, 다정한 말투, 장난기 가득 웃음이 사실은 사랑이었더라고 말하는 지훈이가 제가 알던 지훈과 달라서. 밥 먹고 놀고 자고 이야기하고 싸우고. 그 모든 게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연인의 그 빛깔을 띠었다 생각하면 제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사실은 제가 제일 몰랐다는 진실에 입이 씁쓸해. 내가 본 너는 누굴까. 언제부터. 어째서. . 입안에서만 맴도는 단어를 뱉어볼까 하다가 삼켜버리는 나날에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가족이다. 승철과 지훈은 가족. 피가 섞이지 않아도 함께 이겨내며 지내온 시간들은 결코 가짜가 아니야. 제 품에 안겨 잠들던 작은 아이가 동생이 아들이 좋아한다고. 어린 아이였으면 나도 좋아해 라고 말할 수 있었겠지. 결혼하자고 새끼손가락 내밀면 걸어줄 수도 있어. 다 커서 그렇다면 늙은 애비 죽을 때까지 괴롭히냐며 엉덩이 때렸지.

하지만 승철은 둘 다 못했음. 할 수가 없었음. 지훈은 어리지도 어른도 아닌 아이였으니까. 18. 정의 내릴 수 없는 격동의 청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평소처럼 굴어서 더 위화감이 와. 승철은 지훈의 고백이후로 엉망진창인데 지훈은 그전처럼 똑같이 승철을 대함. 장난치고 말 안 듣고 다정하고 착하게. 그게 사랑이라 생각하면 서글프고 속상하고 묘하고. 힘껏 노력하고 있다 생각하면 머리가 아픔. 무엇이든 사랑을 대입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이라서. 밤중에 꿈이었다, 농담이었다, 넘길 수 있지 않아서 승철은 담고, 담고 또 담았음. 물이 넘쳐 바닥을 흠뻑 적실 때까지 가득.

. 존나 추워.

가을의 아침은 많이 추움. 잠옷대용으로 입는 얇은 긴팔티셔츠와 바람막이 한 장 슬리퍼차림에는 더더욱 춥지. 오들오들 떨며 핸드폰을 노려보다 포기했음. 잠시 몸 맡길 친구가 이리 없다니. 정한과 지수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겨울준비를 하느냐 바쁘고 무엇보다 지훈이 아는 사람이라 안 됨. 지훈이 피하려고 꿀물만 채운 빈속으로 이 추위를 뚫고 있는데 거기가면 다 도루묵이지. 그런데 그 둘 빼곤 갈 데가 없음. 회사 사람들은 집 찾아갈 만큼 친하지 않고 학교 동창생들은 나이 먹으며 대부분 연락 끊겼고. 엄마랑 형네는 멀음. 무작정 나오느냐 돈이라곤 바람막이 왼쪽주머니에서 나온 2000원이 다야. 빵이나 삼각 김밥 사먹을 액수지만 승철은 해장국이 먹고 싶음. 얼큰하고 따뜻한 해장국. 하지만 2000원 갖곤 어림도 없네. 한숨을 푹 쉬고 터덜터덜 주머니에 손 꽂으며 걷지.

왜 친구들 우리 집에 안 불러?

의도는 없었음. 순수한 궁금증.

여긴 우리 집이잖아. 안 돼. 아무도 못 들어와.

너무나 무거운 대답에 집을 뛰쳐나왔다. 무서워서. 도망쳤다.

그렇게 힘껏 도망쳐놓고 한 시간도 못 채워서 집으로 들어온 승철은 옅은 땀이 새어나올 정도의 집안 온기에 몸이 풀려 흐물흐물 녹았음. 그래도 아닌 척 꽁꽁 언 발에 힘주어 거실로 갔음. 네모 반듯 접은 담요가 소파 위에 있었음. 지훈이는 화장실을 간 건지. 닫힌 화장실문을 힐끔 보고 소파위로 엎어졌음. 역시 집이 최고구나. 빈속과 얇은 옷차림에 맨발은 한겨울의 시린 바람을 견디기에 여려서 하루도 안 지난 가출이유를 지워먹고 발밑에 걸린 담요를 끌어올려 꼬물꼬물 덮었음. 섬유유연제 잔뜩 뿌려 햇빛에 말린 좋은 냄새가 마음을 녹이고 심장을 녹이고. 현관문이 열리고 닫혀 조용한 발소리가 제 앞에 올 때까지 눈만 끔벅거림.

밥 먹어.

옆으로 누운 시야에 커다란 검은 봉지가 걸림. 흔들어 보이면 둥근 그릇에 담겨졌음. 지훈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에 승철은 코를 훔침. , 이거.

순댓국 맞으니까 손 닦고 와.

부엌으로 가는 뒷모습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술 먹고 다음날이면 꼭 찾는 십분 거리에 있는 콩나물순댓국을 사러 간 지훈에게 미안해서인지, 내가 가출했는데 집 비워놓고 어디로 갔냐며 속으로 짜증 부렸던 제가 한심스러워선지. 마음은 복잡하고 몸은 춥고. 눈물이 몽글몽글 솟아서 테이블 위 티슈를 뽑아 콧물 푸는 척 눈물도 닦음.

조용히 흘러간 주말. 맛있게 순댓국을 비우고 낮잠을 실컷 자고 저녁에 비실비실 일어나 지훈과 장을 봤음. 어렸을 때부터 대단했던 지훈의 식성은 덩치가 커지면서 몇 배로 늘어나 결제금액은 5인 가족 뺨침. 대리 달면서 월급이 늘고 소비도 늘어 저축금액은 그대로. 지훈이 용돈벌이라며 의뢰를 받지 않으면 승철이 노후는 둘 째 치고 지훈이 독립하고 장가 못 가겠지. 얇은 카드가 꽂힌 얇은 지갑을 잠바 주머니에 넣으며 승철은 집으로 돌아가는 밤거리를 서글프게 흘려보냈음.

생각이 많은 머리로 일을 하니 멀쩡할 수 있을까. 오랜 회사생활로 척척 해내지만 한숨 한 번 쉬는 시간이 생기면 창밖을 보게 됨. 가을오후는 왜 이리 선명할까. 푸른 여름과 하얀 겨울보다 마른 가을의 해가 더 시리고 아프다.

쟤 왜 저래?

뒷문을 열고 들어온 순영이 지훈 앞에서 책 읽는 원우 책상에 엉덩이를 비비며 물음.

차였대.

대답은 지훈이 옆에서 젤리 먹는 준휘가. 순영이가 들어와도 교실 창 밖에만 시선을 고정하던 지훈이가 팩 준휘를 째려봄.

축하한다.

순영이 성의 없이 박수를 침. 지훈은 준휘가 깐 젤리봉지를 집어 순영에게 던졌음. 그러나 힘없는 포장지는 근처도 못가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 순영이 비웃었다.

궁상떨지 말고 가서 밥 먹자. 오늘 제육볶음이래.

나 안 먹어.

안 먹으면 뭐 형이 너 봐준대?

,

안 먹고 굶으면 형이 네 걱정하고 참~ 좋겠다. 그걸 원하는 거지?

아닌데 완전 아니는 아니어서 지훈이 입안 볼 살만 씹음. 준휘는 남은 젤리를 입에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순영은 준휘 어깨로 불편한 팔짱을 낌. 너 그만 커라. 젤리 사주면 고려해볼게. 장난치는 순영과 준휘 뒤로 가자 원우가 말했고 지훈은 내키지 않다는 듯 느릿느릿하게 세 명의 뒤를 따라감.

진짜 입맛 없다고.

심장이 있는 가슴이 잔뜩 벌어지고 헤져서 온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나는 지금 숟가락 들 기운조차 없어 라고 말했지만 지훈의 되도 않는 변명은 식판 한 판 깨끗이 다 비우고 한 번 더 밥 받으러 갔기 때문에 거짓말이 됨.

그리고 그건 길거리를 걷는 승철도 마찬가지여라, 최 대리. 상사의 부름에 점심 먹고 얹었는지 답답해 가슴을 치던 승철은 회사 밖을 나섬. 갔다 와. 이런저런 오더를 내리는 상사는 승철이가 대리라는 직함을 받은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잊었는지 평사원 중에 말단이 할 일을 던져줌. 평소라면 승철은 상사를 껌처럼 잘근잘근 씹으며 눈치를 보다가 다른 사원과 나가 이리저리 잘 해결했을 텐데 지금의 승철은 찬바람의 소화제라도 필요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양 뺨과 귀가 빨갛게 얼도록 길거리를 돌아다녔음.

이리저리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내 허리는 회사 허리다생각하며 몇 번이고 숙이고 나니 푸른 저녁임. 별 아닌 일에 승철을 부린 게 미안했던지 그대로 퇴근해도 된다는 상사의 연락을 받고 부지런히 놀리던 발걸음을 느릿느릿 움직여 뭉쳤다 퍼지는 하얀 안개를 올려다봄. 차가운 공기에 멀리 퍼지는 입김에 내 고민도 모두 날라 갔으면 좋겠어.

그러다 고민의 정체를 마주친다. 등 뒤에 큰 표범이 새겨진 통통한 패딩을 입은 무리가 추운 저녁 길을 거침없이 걷네. 못 본 척 지나갈까 손 흔들어 인사할까. 애매한 거리에 고민한 사이 저기서 눈 좋은 준휘가 승철을 알아봄.

안녕하세요!

예의 씩씩한 인사에 나머지 세 호랑이가 준휘의 시선 끝 승철을 알아봤고 승철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대신 다른 말을 함.

저녁먹자. 형이 쏠게.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의 배고픈 청소년들은 네!! 힘차게 대답을 외침. 소식하는 원우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니 이대로 괜찮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면 되는데 지훈의 표정이 탐탁치 않음.

너네 그냥 가라.

내쫓기까지 해. 하지만 음식에 특히 누가 사주는 공짜! 음식에 마다할 호랑이들인가. 싫어. 새침하게 한마디하고 으르렁대며 안가냐는 지훈의 눈초리를 못 본 척. 승철은 어쩐지 마음이 삐뚤어짐.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주는데 왜 네가 막아. 그래서 원우와 순영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앞장 섬.

삼겹살 콜?

!!

저 뒤에서 아씨, 불평하는 지훈 따위 버리고 세 호랑이 데리고 당당히 고기 집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고기 집에서 승철은 좀 후회하겠지. 얘들 위장을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어. 빠르게 비워지는 음식과 쌓이는 그릇에 한 점이라도 더 집어먹겠다는 전투력 보이는 애들이 육식계임을 왜 잊었을까. 조금 먹는 원우도 큰 쌈을 싸고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배부르네. 얹힌 점심에 삼겹살 기름 냄새가 좋게 느껴지지 않아 젓가락을 내리고 집게 들어서 고기만 열심히 구워줌.

안 드세요?

각각 개인 앞에 놓인 양념채를 세 번째 리필한 순영이 양념에 절여 흐물흐물한 승철의 양념채 앞 그릇을 보곤 묻지. 승철은 웃으며 먹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순영의 앞으로 잘 익은 고기 올려줌. 순영은 지글지글 익은 고기에 정신 팔려서 상추를 왼손에 들고 고기 세 점 올린다. 그런 순영에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짐.

먹어.

눈앞에 작은 쌈이 나타남. 놀란 눈으로 손을 따라가니 지훈이 무뚝뚝한 얼굴로 쌈을 흔들며 먹으라고 재촉함. 머뭇거리다 입을 벌려 받아먹음. 기계처럼 치아가 움직이고 상추가 짓이겨지며 초록 맛이 나네. 승철의 움직이는 턱에 지훈이 눈길을 치운다.

이거 백 프로 저녁도 체했다. 민망해. 쪽팔려. 이상해. 혹시나 애들이 봤을까 눈치를 봤음. 봤는지 못 봤는지 아무 반응이 없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승철이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 되지. 불편하고. 묘하고.

형 목이 막혀서 그러는데 콜라 사주시면 안돼요?

콜라만?

작작 먹어라.

(무시)환타도요.

띵동. 벨을 누르고 종업원에게 콜라와 환타를 주문함.

감사합니다!

차가운 병을 받고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준휘가 지훈의 잔에 콜라를 또르르 따라줌.

맛있게 먹어 지훈아.

작작 먹으라는 제 말을 무시한 세 친구들을 으득으득 노려보며 지훈은 콜라를 원 샷. 빈 잔에 준휘가 또 콜라를 채워주고 두 번 만에 빈 병에 시무룩하더니 콜라 또 시켜도 돼요? 물음. 병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묻는 모습이 귀여워 웃으며 고개를 끄덕임. 맑아지는 세 얼굴과 험악해지는 한 얼굴이 이상하게 귀여워서 푸스스 웃음이 자꾸 나.

어깨를 잘게 떨며 웃는 승철 때문인지 어느 정도 배를 채워서인지 아니면 탄산을 섭취한 탓인지 분위기가 유해져 쇳소리와 씹는 소리, 고기 익는 소리만 들리던 테이블에 이런저런 대화와 웃음소리가 섞임. 승철을 잊고 투닥투닥대며 떠드는 네 명이 딱 승철의 고딩 때를 떠오르게 하네. 날뛰는 망아지였던 승철과 옆에서 부추기면서 필요할 땐 고삐를 쥐며 막던 정한과 하하 웃는 얼굴로 돌직구를 던지며 가슴 서늘하게 만든 지수, 이 세 사람의 열여덟 열아홉 때 모습이 겹쳐. 푸릇하고 눈부시다.

밤거리 얼어붙은 보도를 밟는 네 개의 발걸음. 시끌시끌했던 고기 집과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입을 열 수 없게 만든다. 반발자국 앞에 서서 걷는 지훈의 뒤통수와 옆얼굴이 가로등에 알록달록해. 체한 가슴이 울렁인다. 올라오는 토기에 멈췄다. 두발자국 나가던 지훈이가 휑한 뒤쪽에 의아해하며 돌아봄. 따라오던 승철이 저쪽에 서 있음. ? 묻는 지훈에 승철은 고개를 푹 숙이며 속을 다스리려 애쓰지.

어디 아파?

다가오는 그림자에 고기 집에 밴 기름 냄새가 따라온다. 속이 메스껍다.

어디가 아픈데?

자연스레 손을 뻗어 이마에 댄다. 따뜻한 온기에 목을 움츠려 피해. 지훈의 얼굴이 잠깐 굳고 그걸 마주친 승철의 위장은 꽝꽝 얼었어. 어린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승철의 속을 명절날 막힌 고속도로처럼 꽉꽉 막히게 만든다.

...빨리, 집 가자.

목 메여 갈라진 목소리. 배 아파. 토하고 싶어. 다 쏟아내도 싶어. 몸 돌리는 지훈의 팔을 잡아 당겼음. 고개를 숙였고. 숨이 지훈의 인중에 닿아. 감지 못하고 커다랗게 떠진 지훈의 눈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랑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요즘 아무 일 없고?

어느 때처럼 걸린 전화에 엄마는 그리 묻지. 지훈이가 속 썩여 한숨까지 쉬며 말했는데 엄마는 코웃음을 침.

네가 지훈이 속 썩이는 거겠지.

아 엄마!

지훈이가 무엇 때문에 네 속을 썩이냐. 널 세상 제일 좋아하는 지훈이가 왜.

사춘기야 걔. 막 반항도 하고 말 안 들어.

네가 잘못했으니 그런 거겠지.

아니야. 내가 요새 얼마나 착실하고 진지하게 사는데!

얼마 전에 지수랑 결혼한답시고 속 뒤집은 거 기억 안 나냐?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리고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지훈이 때문에? 야 아들아. 지나가는 개가 비웃는다. 지훈이가 아니라 너 때문이지.

할 말이 없었음. 결혼소동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승철이가 이길 게 없음. 다 승철이 잘못이 맞아서. 맞는데 억울해. 이번엔 진짜 내 잘못이 없는데. 다 이지훈 때문인데.

엄마 누구 편이야?

우리 지훈이 편.

아들 편을 안 들어주는 나쁜 엄마. 삐져서 끊어요! 불퉁한 말에 전화기 너머 엄마가 까르르 웃음.

귀여운 우리아들.

왜요.

뭔지 모르겠지만 지훈이한테 사과하고,

나 아무 잘못 안했다니까!

그래그래. 그래도 지훈이 괴롭히지 마라.

안 괴롭혀. 걔가 날 괴롭힌다구!

오랜 세월 아들로 동생으로 돌보던 지훈이가 형이자 부모인 나를 좋아한대. 그 말은 못하고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지. 그런 승철을 모르고 엄마는 계속 말을 잇는다.

지훈이 세상엔 너밖에 없잖니.

닿기 직전에 멈춘 얼굴. 서로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이마를 콩 부딪쳤다.

안 아프니까 걱정 마.

입술 꼬리를 올려 씩 웃고 얼떨떨해 하는 지훈의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음. 춥다 빨리 가자. 어깨를 움츠리며 걸으면 얼마 안 있어 발걸음이 따라옴. 그림자가 승철의 옆으로 늘어져 보이지 않은 지훈의 표정이 다 보여서 뱉지 못하는 진심을 속으로 뱉는다.

난 네가 미워 이지훈.

밤중에 지훈이 잠에서 깨어남. 한 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자는 편이라 갑자기 잠에서 깬 게 이상하지. 눈을 비비고 자리를 고쳐 누우며 다시 자려 눈을 감는데 이상해. 이상한 소리가 들려. 뭐지? 잠에 덜 깨서 소리를 좇아 눈을 돌리니 저 쪽이 꿀렁꿀렁 움직임. 형 부르며 침대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벌떡 몸을 일으켜 꿀렁대는 쪽, 승철의 침대 쪽으로 갔다. 형형 부르며 다가가니 잔뜩 괴로운 얼굴로 배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고 있어. 놀라 어깨를 잡아 흔들고 얼굴을 만지는데 땀이 흥건해. 아파... 앓는 소리 사이로 아프다는 소리에 핸드폰을 들어 119를 눌렀다.

새벽 345. 피곤에 젖은 눈에 새하얀 조명이 가감 없이 마구 찌름. 하아. 한숨을 뱉고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깜박임. 형광등 아래 똑똑 떨어지는 수액이 보이고 떨어지는 수액이 긴 줄을 타고 흘러 흰 살갗 속으로 숨는다. 테이핑을 한 손바닥이 추울까 이불속에 넣어줬음. 진통제 맞고 잠든 승철의 평안한 얼굴이 소란하고 놀랐던 아까의 일이 꿈이라고 얘기해. 얼굴을 쓸었다. 화면이 씻겨 내려간다.

지훈은 승철을 돌봤음.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잘 덮은 하늘색 병원담요위로 손을 올려 토닥토닥. 안 미안할거야. 미안하니까 안 미안할거야.

...훈아.

깜박하고 잠이 들었어. 가벼운 흔들림에 눈을 끔벅이다 벌떡 고개를 들지. 어느새 깨어난 승철이 미안한 얼굴로 괜찮냐며 지훈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림.

형은 이제 괜찮아?

. 괜찮아. 미안해 걱정시켜서.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하얘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입술을 깨물어.

진짜 괜찮대도.

부려 발랄하게 표정 지으며 웃는다.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왜 미련 맞게 참았어. 미안함에 뾰족하게 물었음. 승철은 눈꼬리를 더욱 내리며 말함.

괜찮아서, 괜찮은 줄 알아서 그랬어. 형이 좀 둔하잖아.

울컥. 그 말에 왜 화가 나는지.

참지 마. 참지 말고 다 얘기해. 아프다, 죽을 것 같다, 살려 달라 다 말하라고.

응 알았어. 앞으로 그럴게. 조심할게.

지훈의 팔을 잡아 흔든다. 입술까지 아래로 축 처져서 눈치를 본다. 잘 참던 지훈도 결국 톡 쏟아냈다.

제발 날 혼자 두지 마.

정신없는 와중에 지훈이가 지갑을 챙겨 무사히 병원수납을 하고 신발은 못 챙겨서 업어주겠다는 지훈의 등을 밀어 슬리퍼 사오라며 보냈음. 택시타고 가자는 얘길 배고프다고 콩나물국 먹자며 잡아끌어 병원근처 식당에 자리함. 불편한 침묵사이 수저를 내어주는 지훈을 승철이는 물끄러미 쳐다봄. 엉망인 머리와 피곤에 젖은 얼굴, 대충 걸친 패딩 안은 잠옷용으로 입는 얇은 티만 있어, 안 추워? 물으니 괜찮아 대답함.

콩나물국 맑게 2개를 주문하고 먼저 나온 밑반찬을 끄적거리면서 승철은 아까 병실에 앉아있던 지훈을 떠올림. 억울한, 괘씸한, 화난, 우울한, 자책하는.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표정을 어디서 보았던가. 형 부부에게 지훈을 보내고 승철을 찾아온 날에. 귀와 꼬리를 일부러 드러내었던 이유를 밝히던 날에. 지수랑 결혼한다고 난리쳐서 엄마 올라온 날에. 지훈을 위한답시고 잘못했던 날에 보았네.

눈물이 날 뻔 했어. 진통제 맞고 잔잔해진 몸에 파동이 일어나 승철을 자꾸 울렸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생각하면 국을 뜨는 지훈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뾰족하고 못난 먼지뭉치가 콕콕 찌르고 때리고 세모나게 굴어. 국을 뜨고 밥을 씹고 반찬을 집어먹으며 꿀꺽 삼키려 노력해도 안 돼. 혀 돌기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서 살아남겠다고 엉금엉금 올라온다. 안 돼, 안 돼 하다 숟가락을 내렸지.

못 먹겠어?

지훈아.

.

나는 서운하다.

뭐가.

전부 다.

전부 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 물으면 진짜 전부 다. 어떻게 서운하냐하면 먹이고 재우고 입히며 키운 아들이 스무 살 되자마자 독립해서 도움 필요 없다며 뿌리치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운함. 그게 뭐야 하겠지. 그런데 진짜 딱 그런 감정이었음. 퇴근길에 마주친 호랑이 네 명에게 삼겹살 쐈던 어젯밤에 친구라서 거리낌 없이 떠들고 웃고 하는 지훈이가 왜 이리 낯선지. 시시콜콜 얘기하는 편은 아니어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는 지훈이었기에 대충 어떻겠구나 알았음에도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천치차이더라. 그걸 보고 깨달았다. 승철은 부러우면서 속상했다.

나한테 왜 네 옛날 얘기 안 해줘.

안다. 알고 있다. 그것도 자알. 친구한테 할 수 있는 얘기와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다르다고. 승철도 엄마한테 평생 말 못하고 정한과 지수만 아는 속사정이 있음. 그게 엄마를 못 믿어서가 아니고 걱정할까봐, 사랑하는 마음에 입을 다물었어.

그래서 알아. 알면서도 미워. 우리가 그냥 가족인가?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더 끈끈하고 서로를 생각하고 믿고 사랑하는 가족이잖아. 못 볼 거 안 볼 거 다 보고 특별한 일 없다면 죽을 때까지 함께할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몇 달 전의 지훈은 여태껏 승철이 알고 있던 지훈이 아니었지.

언제부터, , ? 도돌이표처럼 묻고, 묻고 또 묻고 스스로 자문해도 승철이 알고 있는 지훈은 답이 없음. 내가 아는 지훈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설거지를 하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잠자는 어린 얼굴의 지훈이가 낯설고 두렵기 시작함. 지훈이가 무섭다는 게 아니고 승철이가 잘 알고 있다 믿었던 지훈이가 사실은 승철이 그린 허상이 아닐까 하는 그런 두려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같은 집에서 같은 방에 따로 잠들고 있는 저 인물이 낯설고, 같이 밥을 먹고 주말을 보내면서 말을 걸고 웃는 얼굴이 생소하고, 한 번씩 어깨나 팔뚝에 손이 닿을 때면 자꾸 상념에 빠지게 됨. 나는 가족이라 믿고 대했던 행동들을 너는 다른 감정으로 나를 대했다면, 그랬다면 나한텐 다 말해도 괜찮았잖아. 전부 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했더라면 너를 외롭게 두지 않았잖아.

너 진짜 미워.

승철은 지훈이를 구성했고 만들었던 환경, 인연 등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 부분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음. 의심할 일도 없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믿었으니까. 그런데 지훈이 어른의 얼굴을 하고 제 마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에 금이 갔음. ? 했던 미묘한 틈이 제대로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함. 언젠가부터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아진 지훈에게 옛날처럼 형아 하며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귀여움이 사라졌다고 투덜거렸던 작은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 완전히 금이 가서 승철에게 가감 없이 민낯을 보였음.

보이니까 봤고 보니까 이만큼이나 많이 속상했음. 이제 너에게 형은 필요 없는 존재구나 하는 외로움. 지훈을 위해 살았다고 자부해도 될 만큼 연애도 결혼도 내 삶도 다 포기하고 견디어 버티며 벌어먹던 제 고생이 무엇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늙어 지훈에게 신세지며 살고 싶지 않으려고 쪼개어 노후자금까지 준비했는데 그 모든 고생이 팽 내쳐진 늙은 부모의 마음 말이야. 그게 내 마음이었어. 여태껏 나는 무얼 위해 살았던 걸까. 마음에 싹을 트고 자라난 거지. 그리고 그 싹은 무럭무럭 자라 이것도 서운하고 저건 밉고 그건 속상한 열매를 맺었다.

어디가.

식당에서 나와 두발자국 앞서 걷던 지훈이가 집 가는 길이 아닌 딴 길로 몸을 튼다. 그 뒤로 고개를 숙이며 느릿느릿 걷던 승철이 낯선 주변에 둘러보다 앞 선 지훈이를 부름.

어디 가냐고.

저기.

패딩주머니에 꽂던 손 하나를 들어 멀리 가리킴. 손가락 끝엔 높은 건물이 하나 서 있어. 곧 건물을 알아보고 승철은 놀람.

야 저긴,

지훈이를 처음 만나 주웠던 장소. 승철이가 제대하고 알바 뛰던 공사장이었음. 그만두고 3개월 뒤에 완공됐고 홀로 칙칙하게 회색빛을 내뿜으며 존재하고 있었지. 승철은 알 수 없는 마음에 무표정한 지훈을 바라봄.

얘기 듣고 싶다며.

아니야 괜찮아. 얘기 안 해줘도 돼. 그냥 가자.

서운하다며. 얘기 안 해줘서 밉다며.

맞는데 이렇게 듣고 싶단 얘기가 아니야. 말하기 싫은데 억지로 너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아니야. 말하고 싶으니까 가는 거야.

승철의 얼굴이 울상이 됨.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조심히 묻고 대답하는, 꼭 그게 아니어도 언젠가 꼭 말해달란 얘기였음. 지금 바로 말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무표정한 얼굴로 바람을 등지며 승철을 바라보는 지훈이 확고해서 돌멩이 굴러다니는 위장처럼 마음이 불편함. 가자하고 이끄는 지훈의 팔을 잡아 막고 가지말자 잡았음. 찬바람에 언 승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보고 날리는 지훈의 앞머리 사이에 보이는 가느다란 눈을 내려보고. 시선이 부딪혀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다 놀라 움츠러들며 피하고. 슬리퍼 신은 승철의 맨발은 하얗게 질려가 차가운 피가 온 몸을 돌아서 훌쩍 코를 마셨음. 한참을 말없이 마주보다 지훈이 천천히 입을 염.

일부러는 ...아니었어. 진짜 별 게 아니니까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부모...라고 불릴 수 있을지 의문인 어른과 지훈과 비슷하게 작고 야위었던 어린 무리들이 있었다고 흐리게 기억함. 확실하지 않아. 정말 희미해서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르니까. 다만 어떤 이유엔지 지훈은 살았고 살다가 승철을 만났음.

같이 살고 지지고 볶으면서 그 때의 나는 많이 배고팠다고 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예상했고 작은 덩치로 몇 그릇이나 비우는 지훈에 놀라며 어찌 그리 많이 먹냐 묻던 애들에게 어렸을 때 못 먹어서 그랬다고 그냥 짧게 말했었음. 똑똑하고 착한 친구들이라 지훈의 사정을 잘 아니 바로 알아듣고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았던 걸, 승철은 어찌 알고 속상했었고. 아마 친구들이 말했다고 짐작함. 일부러는 아니고 어찌저찌 얘기하다 흘리듯 말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승철이 놓치지 않고 기억하면서 마음 고생했겠지.

지난 번 형의 엄마가 방문해 둘만 잤던 날 왜 나한텐 얘기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답할걸. 그러면 지금까지 오해 없이 잘 지냈을 텐데 싶지만 그 때의 지훈도 썩 괜찮은 상태는 아니라서. 형이 결혼하겠다고 난리치던 땐데 뭐가 들리고 보이고 그랬나. 그래서 지훈은 오늘 서운하고 밉다는 승철에 말해주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처음 만났던 건물로 가려했고. 집에서 얘기할 수 있는데 왜 건물까지 가서 얘기하냐면 나에게 형 말고 중요하지 않아서. 과거, 현재 미래, 내가 살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다 불필요해. 속이지 않았고, 거짓말하지 않았고, 진심이지 않은 적이 없는. 승철에게 주워지고 같이 살게 된 순간부터 지훈의 삶은 시작되었고 그 때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 희미한 기억의 과거보다 승철과 함께하는 현재가 지훈을 만들었고 완성시켰음. 승철이 없으면 지금의 지훈은 없었고 승철이 떠나면 지훈은 죽을 거야.

계속, 계속 좋아했어. 형이니까. 계속 좋아하고 좋아해.

갑자기 싹 틔운 애심이 아니다. 처음부터 쭉. 지훈은 승철을 좋아했다. 지훈의 팔을 잡던 승철의 손이 힘없이 스르르 떨어짐. 떨어진 손을 따라 내려 보다 꽁꽁 언 승철의 맨 발이 보여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음.

일단 집에 가자.

손을 잡고 걸어왔던 길을 돌아감. 터덜터덜. 힘없는 발소리가 따라오고 승철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없이 따라감. 차마 돌아볼 용기는 없어 묵묵히 제 앞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 찬바람이 불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승철이가 걱정되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패딩을 벗어 승철을 입힘.

괜찮아...

거절하는 작은 소리를 흘려듣고 패딩모자까지 씌워주어 손잡아 걸어감. 승철은 얇은 티의 지훈에 입술을 꾹 다뭄. 힘주어 닫지 않으면 울음이 새어나갈 거야, 마른 등을 바라보다 바닥으로 시선을 떨굼.

너 추워

형이 추운 것보다 나아.

지훈아.

그냥 입어.

이지훈.

.

좋아해.

우뚝. 지훈이 멈춤. 반발자국 뒤에 있던 승철도 서서 바닥을 응시함. 무슨 생각으로 뱉었지. 글쎄. 본인이 말하고 본인도 잘 모르는 한마디. 지훈과 같은 색인지 다른 색인지도 모르고 일단 던졌네.

추워.

말없는 지훈이가 민망해서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빨리 가자함.

발 잘릴 것 같고 냉동 인간될 것 같아. 얼른 가자.

힘으로 잡아끌어 한두 걸음 딸려온 지훈이가 승철을 부름.

.

.

키스해도 돼?

...안 돼.

세상 제일 싫은 침묵이 흘렀다. 물어본 지훈과 답한 승철 모두 당황해서 어버버 거리다 하, 지훈이 한숨을 토하듯 웃었음.

, , 그게 말이야.

놀라서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댔음. 지훈이 됐다며 다시 길을 걸음. 승철은 막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쪽팔리지. 아씨, 왜 갑자기 키스얘기를 해!

승철은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지훈의 얼굴, 표정, 목소리에 정신이 팔렸었음. 이런 마음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날것의 감정에 온몸에 털이 쭈뼛했지. 낯설다 생각했던 지금의 지훈이가 승철이가 알고 있던 그 지훈이가 맞다고 온 몸으로 말하며 감히 측정할 수 없는 마음을 고백하는데 그걸 듣는 나는 감당을 못하겠더라. 갑자기 어떤 계기로 불순한 감정이 섞인 게 아니라 그냥 형이니까 좋아한다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전해야 할 말은 했고 승철은 거기에 무척 흔들림.

사실 아직도 혼란스럽지만 잘 모르겠지만. 네가 내가 아는 이지훈이 맞다면 같이 살고 앞으로도 함께할 지훈이니까 나는 계속 너를 좋아해. 그 긴 말 중에 좋아해만 툭 튀어나와서 당황한 와중에 키스라니. 키스라니!

지훈때문에 오래 짝이 없던 승철에게 키스라는 단어는 너무 노골적임. 두 개의 몸이 맞닿고 혀가 섞이고 허리, , 얼굴 등등 그 어딘가에 있을 손을 생각하면 얼굴에 확 열이 올라. 혈기왕성하던 학생 시절에 욕정을 참을 수 없을 때면 지훈이 잠든 틈을 타 혼자 풀었던 승철에게 키스가 주는 충격은 마른하늘에 번개만큼 쎄. 그래서 거절했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왼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지훈에 눈치를 봄. 키스를 거절당하면 아프지. 처음으로(처음이 맞나? 갑자기 의심이 퐁 솟네)거절당했는데 상처받지 않았을까 눈치를 보니 지훈이 픽 입술을 삐뚜름하게 그리며 말함.

나랑 그렇게 키스하기가 싫은가봐. 지난번에 죽어도 너랑 키스는 안한다고 노래 부르고.

...? 내가 언제?

정한이형이랑 지수형이랑 술 먹고 나 부른 날.

승철의 얼굴이 파래진다. 싹둑 잘렸다고 믿었던 그 날의 기억이 힘찬 날갯짓을 하며 솟아오름. 지훈의 고백으로 마음 고생하다 친구들한테 조언을 얻겠답시고 불러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이야기 끝에 그런 얘기가 나왔음.

간단한 방법이 있어.

고추를 집어 고추장에 푹 찍으며 정한이 말했음.

키스를 하면 돼.

, ?

어이없는 소리에 당황해서 그게 뭐냐고 타박했음. 하지만 정한은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며 말했지. 고추를 아삭아삭 씹으며 머리만 남은 고추로 승철에게 삿대질을 함.

키스를 못할 상대면 연애도 불가능할걸? 좋아하면 만지고 싶을 텐데 만지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키스를 못한다하면.

맞는 말이네.

지수가 동의함. 승철도 이해를 했음. 했지만 그래도 너무... 짐승 같잖아. 승철의 반응이 귀여워 정한과 지수는 킬킬 웃는다. 그건 아니야 하면서도 술잔을 기울며 누군지 잘 알 상대와 키스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얼굴에 막 놀려주고 싶어 입술이 간질간질해.

무슨 상상하냐? 혹시 너네 집 호랑이랑 키스하는 상상? 치아 앞까지 올라온 말들을 입술로 꾹 겨우 막아섰음. 무슨 말이냐며 방방 날뛰며 기겁할 승철을 보는 재미는 잃겠지만 연애 고민은 본인이 스스로 답을 찾는 게 맞으니까. 술에 취해 흐물흐물 녹는 승철의 폰에서 우리 지훈이라 저장된 번호를 눌러주며 자기 할일을 다한 두 친구들이었음.

그리고 승철은 인상 팍 쓴 지훈의 등에 기대듯 업혀서 걸어가면서 지훈이랑 키스라니. 죽어버릴 거야. 키스라니. 으악. 싫어 따윌 소리 뱉어 지훈의 마음에 삼천 원을 적립시킴. 지훈이가 입맛 없다 그러고 밥 안 먹겠다고 한 이유가 다 저 때문이었음. 어린 아이에게 너무 치명타네.

그런 기억을 까맣게 잊은 승철은 키스하기 싫다는 술주정뱅이에게 꿀물도 타주고 평소처럼 대해줬던 지훈이가 좀 짠하고 미안하고 그럼.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에게 키스 거절은 좀 크게 올 텐데. 그런데 그렇다고 키스를 하자니 좀...꼼지락꼼지락. 지훈과 맞잡은 손이 가만있질 못하고 승철은 미안해하고. 지훈은 힐끔 바라 보다 픽 웃고 만다. 계속 미안해해라. 신경 쓰고 어쩔 줄 몰라라. 피해 다녀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나를 마주했으면 좋겠어. 늦어도 오케이. 어차피 승철과 지훈 둘에게 서로가 없는 인생 따윈 없으니. 언젠가 답을 마주하겠지. 그 때 키스도, 연애도, 사랑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우린 사랑할거야.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밤새 돌아간 보일러에 후끈한 열기가 두 사람을 반겼음.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부르르 떨며 스르르 침대로 쓰러지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으며 찬기를 빼려 으슬으슬 떠는 몸을 꼭 끌어안다가 침대에서 내려옴. 코까지 이불을 덮고 눈을 감던 지훈은 웬 그림자에 눈 떴고 침대 한쪽이 주저앉더니 덩치가 지훈을 덮침.

윽 무거워. 뭐야. . !

춥단 말이야. 잠깐만 끌어안자. 몸 녹으면 갈게.

밀어대도 강한 힘으로 더 끌어안아. 이 형이 진짜.

키스한다?

후다닥 몸이 밀려 바닥으로 쿵 떨어짐. 아야야 앓는 소리에 픽 웃으며 벽 쪽으로 몸을 돌림.

잘 자.

새벽 내 못 잔 잠이 확 덮쳐오고. 지훈은 크게 하품을 하며 이불을 고쳐 덮었음. 그리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듦.

해가 쨍 올랐다 내려가고 푸르스름한 저녁이 되자 잠에서 깬 지훈이. 완전히 쫓지 못한 잠에 눈을 끔벅거리고 배가 좀 고프네,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돌리다 아. 승철이다. 베개 밑에 두 손을 넣고 지훈 쪽으로 누워 잠든 채로 지훈 옆에 누웠음.

진짜. 사람 곤란하게 이러지. 발가벗은 기분으로 고백했는데도 어린애처럼 대하는 승철에 분명히 경고를 줬다. 다가오면 키스할거야. 직진하겠다, 심술 섞인 협박에 엉덩방아 찧으며 도망가 놓고 지금 옆에서 자는 건 무슨 심리인지. 설마 하며 인정하기 싫은 기대가 몽실몽실 떠오른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아닐 거야 아니겠지 부정해도 지훈은 마음을 담아 승철의 입술에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제야의 종소리를 티비로 들으며 두 사람 키스하겠지. 야식으로 시킨 치킨을 펼쳐놓고 다 뜯어먹은 뼈다귀가 테이블 위에 휑하니 굴려 다녀서 치킨 먹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승철이 울상 됐지만 먼저 입술부터 찍은 사람은 캔 따서 목축이던 지훈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 들이댄 승철이었다.

, , , , 일 하는 소리에 난장판 같던 마음에도 새 바람이 불어서 못 참고 저질렀고. 맞닿은 입술에 캔 놓칠 뻔한 지훈이 꾹 잡으며 떨어지려는 승철의 뒷머리 눌러 고개를 틀어 입을 벌리며 혀를 섞었다. 그렇게 그 둘의 연애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