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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ah하네요.

[우쿱] 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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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꽃

다몬드 2016. 8. 20. 20:15

 

 

 

[지훈승철/우쿱] (우쿱전력)

 



 

 

 

부제 : 나를 당신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어요.

 

 

 

w. agapi

 

 






 

 

꽃이 있었다.

몇 장 되지 않는 붉은 잎들이 노란 술을 보호하듯 중심으로 동그랗게 말려있어, 쨍한 아침햇살처럼 빨간 꽃은 어긋나게 놓인 책들로 어수선한 책상 위 한가운데 어울리지 않게 놓여있었다. 이 책상이 내 책상이 맞는 거지? 순간 확신이 들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은 선선한 아침 교실, 왼쪽 창가 6번째 맨 끝에 책들로 견고한 벽을 만들어 쌓아 올리고 읽지도 않은 책이 주둥이를 활짝 벌린 채 정신 사납게 있는 건 제 책상이 맞는데. 그럼 이 세계에서 온 외계 물건이 길을 잃고 내 책상 위에 불시착 한 게 아닐까? 18년 인생 꽃 한 번 받아 볼 일 없었던 평범하고 심심한 인생에 꽃이라는 건 우연히 찍은 사진 속의 ufo 같은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지.

그래서 선뜻 그 꽃을 집어들 수 없었다. 잡다가 펑 폭발할까봐. 꽃폭탄 같은 거 들어본 적 없지만 그냥 좀 불안했다. 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의심은 가득했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가방을 풀지도 못하고 고민하다 대가 긴 꽃을 들었다. 기다란 꽃을 기울어 벌어진 꽃잎에 시선을 던졌다. 빨간 겉면과 달리 안은 까맣게 줄이 그어져 있다. 음흉한 색을 띠고 있어. 수상쩍어하며 코를 묻었다. 비릿한 물 냄새와 심심한 풀 향기가 났다. 장미꽃처럼 강렬한 꽃 향을 기대했어서 지훈은 조금 실망했다. 혹시 다른 건 없는지 책상을 뒤적거렸지만 공책으로 찢어 대충 휘갈긴 메모 한 장 나오지 않았다.

뭐야.

묘한 실망감에 지훈이 들고 있던 꽃을 옆 책상 짝꿍 자리 위로 던졌다. 무거운 머리부터 떨어진 꽃이 떨어진 충격에 놀라 잎 한 장을 뱉었다. 빨간 물감을 칠한 겉면과 검은 줄이 그어진 안면이 떼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책상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지훈은 가방을 벗어 책상 옆 고리에 걸고 의자에 앉아 낙하 직전에 꽃잎에 시선을 던졌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꽃을 선뜻 좋다고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자신의 진심이 거절당하고 버려져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꽃잎 한 장의 처연함이 제 양심을 찔렀다. 기분 탓인가 묘하게 생기도 없어 보이고.

또한 바보 같은 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냥 그대로 두면 꽃잎 끝이 말려 푸석해지고 색은 바라져 떨어진 낙엽처럼 부서져 죽을 것이다. 두꺼운 흙을 뚫고 여린 잎을 활짝 벌려 태양의 수호와 비의 애정 어린 손길로 건강히 자란 것이 다시 축축하고 어두운 흙으로 돌아가는 게 제 탓이라면.....

결국 지훈은 꽃을 들었다. 책상 옆 창문 난간에 올려둔 제 컵에 물도 채웠다. 꽃은 아무 죄가 없으니까. 얼마 후 창문 난간에는 물을 머금고 부서지는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빨간 튤립이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지훈은 또 꽃을 만났다. 아무 생각 없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다 보았다. 어지러이 더러운 책상 위, 정리 좀 하라며 담임한테 혼나는 지저분한 책상 위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꽃 한송이. 책상 위를 비추는 햇살과 7시를 향한 시계바늘. 책상 3걸음 전 멈춘 발걸음.

데자뷰를 겪는 것 같았다.

어제와 다름없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눈을 끔벅거렸다. 그렇게 하면 꿈에서 깨거나 꽃이 뿅 사라질 줄 알았는데 둘 다 일어나지 않았다. 지훈은 크게 들이마신 숨을 요란히 뱉었다. 그리고 꽃대의 끝을 집어 들었다. 붉은색이라 어제와 똑같은 튤립인 줄 알았는데 달랐다. 노랑먼지가 들러붙은 것 같은 술 위로 붉은 와인 같은 자주색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핀지 얼마 안 되었는지 옹기처럼 가운데로 몰린 꽃잎들이 뚫려 있는 하늘을 향해 수줍게 뒤로 고개를 들었다. 꽃잎에 코를 묻고 향을 맡아서야 그것이 동백꽃¹인지 알았다. 살아있는 풀냄새에 이마가 구겨졌다. 향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풀 비린내에는 약했다. 매일 맡아서 익숙해질 법도 했는데도 그랬다.

이번에도 없군.”

잔향이 남은 코를 훔치며 책상 위를 훑었다. 새끼손톱만큼 접은 종이 한 장 없는 책상은 하교 전 책상 그대로와 같아서 한숨이 나왔다. 무슨 의도로, 무슨 목적으로 이 꽃을 주는지 몰라서 받아줄 수가 없는데 버릴 수도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악취가 나는 쓰레기 더미에 죽으라고 던지기엔 지훈은 마음이 여렸다. 결국 그 꽃은 난간 위 컵에 자리 잡았다.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던 빨간 튤립이 반갑다며 또르르 굴러가 자주색 꽃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고 엎드린 지훈의 머리 위로 수다스러운 꽃들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지각을 했다. 잠귀가 어두운 편이 아니어서 한 번에 울리는 모닝콜로도 잘 일어났는데 오늘은 알람이 7번째 울릴 때 깼다. 그것도 시끄럽다고 손만 뻗어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어 말짱 꽝이었지만. 덕분에 푹~ 잔 지훈은 유난히 밝은 햇살에 기이한 느낌을 받고 핸드폰을 켰다. 숫자 3개가 화면 가운데 크게 9 15라고 찍혀있었다.

!”

지각이다!! 발끝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수마가 지훈의 발길질에 굴러 떨어진다. 순영이랑 원우랑 밤새 서든한다고 평소보다 늦게 잔 것이 이리 큰 결과가 될 줄 몰랐다. 화장실에 달려가 얼굴에 물만 묻혔다. 뻗은 머리카락은 신경 쓸 틈도 없다. 교복 와이셔츠를 입고 양말을 꿰어 신고 가방을 동시에 메며 지훈은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이지훈!! 이제 학교 가??

커다란 고무대야를 들고 가게를 정리하던 엄마가 달려 나가는 지훈의 등 뒤로 큰소리로 외쳤다. 너가 웬일이래. 기막혀 하는 엄마의 중얼거림을, 나가는 와중에도 식탁에 있던 빵 한 조각까지 야무지게 입에 달던 지훈이 손만 흔들며 아침인사를 했다.

 

학교에 도착할 땐 1교시가 반쯤 지나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미닫이문인 뒷문을 천천히 열었지만 조용한 수업분위기에 낡은 나무문이 신음을 토하며 열리는 소리는 모른 척 할래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쭈구리고 앉아 오리걸음으로 본인 자리로 걸어가던 지훈은 그대로 국어한테 귀가 잡혀 앞으로 끌려나왔다.

지각한 벌로 노래 한 곡 하자.

고약한 취향의 국어쌤이 시키는 노래를 5곡 메들리로 불리고(그는 작년 지훈이 장기자랑에 나간 이후로 그를 매우 아끼기 시작했다.)나서야 벗어난 지훈은 벌써 하루를 끝낸 직장인처럼 지쳐 자기자리에 널브러졌다. 같이 서든하고 자기보다 더 늦던 원우가 멀쩡히 옆에 앉아서 지훈을 비웃었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이 가수님. 아침부터 고음을 잘 뽑아내시네요.”

웃음이 묻은 놀림에 원우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이가수라 하지 말라고. 뼈밖에 없는 직각 어깨가 기울어지고 어윽, 죽는 소리를 뱉으며 고꾸라진다. 그걸 놓치지 않은 귀 좋은 국어가 이번엔 원우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보구나? 교탁에서 위험한 미소를 귀에 걸며 불렀다. 째려보는 원우에게 보조개가 푹 파인 살인미소를 날리며 지훈이 박수를 쳤다. 끔찍한 고음 불가로 원우가 아이들의 귀를 고문하는 동안 지훈은 책상 위와 난간 옆을 눈으로 살폈다. 혹시나 싶어 아래 서랍장도 뒤졌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없는 건가?

야유를 받으며 들어온 원우에게 꽃을 보지 않았냐 물었다. 원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보지 못했다 했다. 혹시나 싶어 1교시가 끝나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빼며 교실 바닥까지 훑었다.

다른 분단의 순영이 사탕 껍질을 벗기며 물었다.

뭐해?”

책상 밑에 작은 몸이 들어가 바닥을 짚는 형태가 궁금했다.

꽃 찾고 있어.”

원우가 대신 답했다. 아아, . 일주일 내내 오더니 오늘은 안 왔대? 그런가봐. 그런데 왠 사탕이냐? 아침에 등교하다 승철 선배님 만났어. 인사하니까 주던데? 나는 안줬는데. 선배님이 너보단 나를 좀 좋아하지. 실없는 대화를 순영과 원우가 주고받는 동안 지훈은 떨어진 꽃 잎 한 장 발견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찾았어? 아니. 고개를 젓고 앞머리를 손으로 휘저었다. 일방적으로 받던 꽃이 없다는 이유로 저를 심란하게 만드는 게 억울해서 지훈은 애써 창문 가에 꽃들을 무시했다.

 

 

어 꽃이다.”

아 뭐야. 꽃 왔잖아. 이지훈!! 네 꽃 왔다!!”

5교시 체육을 끝마치고 흘린 땀을 훔치며 돌아온 교실에 꽃 한송이가 놓여 있었다. 체육시간 내내 신나게 뛰어다니느냐 땀으로 흠뻑 젖은 순영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놓인 꽃을 들었다. 킁킁 향을 맡더니 좋다며 감탄했다.

이거 무슨 꽃이야?”

꽃 주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받은 꽃을 돌려 보며 답했다.

아네모네².”

검은 술들이 응집한 중심 주위로 꽃받침대부분만이 하얗고 그 외엔 온통 빨간 잎이 활짝 피어있었다. 대충 보아도 모든 이들이 입을 벌리며 아름답다 감탄할 모양새지만 잎 하나가 우그러지고 짓이겨져 온전치 못했다.

떨어뜨렸나 봐.”

아래로 늘어져 힘을 잃은 꽃잎에 원우가 안타까운지 조심히 손가락으로 꽃잎을 받쳤다. 늘 주던 꽃과 달리 뭉개진 모습에 지훈의 얼굴이 편치 않았다. 원우는 지훈에게 꽃을 받아 다른 꽃들이 놓인 컵 안으로 조심히 모셨다. 차갑게 생긴 모습과 달리 마음이 여린 원우는 꽃을 좋아했다. 시간만 되면 지훈의 집으로 놀러가 아주머니께 꽃꽂이를 배우기도 했다.

괜찮겠지? 아픈 꽃이 다른 꽃들에 감싸 위로를 받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꽃들의 부드러운 위로에 아네모네가 몸을 뉘운다.

그런데 언제 꽃이 있었지? 우리 문 잠그고 나가지 않았어?”

꽃에게 시선을 뺏기던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시간이 깐깐한 영어시간인데도 옷 갈아입을 생각 없는 순영이 원우에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물었다. 그러게.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던 원우가 답했다. 지훈도 그제서야 궁금함이 들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주번을 불렀다.

오늘 문 너가 잠궜지?”

.”

열쇠 계속 니가 갖고 있었어?”

. 교무실에서 열쇠 가져와서 체육 전에 잠그고 계속 내 주머니에 있었어. 끝나고 나서도 내가 먼저 와서 열었는데.”

순영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주번이 물었다. 지훈이 별 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지만 원우가 컵에 꽂힌 꽃 한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니까 저게 있었어.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란 주번이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다 갈아입은 체육복을 가방에 대충 쑤시던 지훈이 주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끼고 확신치 않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실 아까.. ..걔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걔 있잖아. 방송부 일학년 부석에서 부 맡은 토마스 닮은 애. 걔를 내가 본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1학년 5반 교실로 달려갔다. 한 층 아래 있는 교실에 금세 도착해서 지훈은 뒷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엇비슷하게 끝나 다른 일학년들이 낯선 이학년 지훈의 눈치를 보며 다 빠져나가는 동안 5반은 여전히 종례중이다. 작년에 지훈의 담임이었던 노총각 과학 선생은 자신의 외로움을 아이들을 통해 푸는지 종례가 학교에서 가장 길기로 유명했다. 원우는 학원을 가고 같이 범인을 잡아주겠다는 순영이 담임 얼굴을 보는 순간 먼저 가겠다며 지훈이 붙잡을 새 없이 도망갔을 정도였다. 덕분에 뻘쭘하게 일학년 복도에 서있던 지훈은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다.

10분 쯤 흘렀을까. 뒷문이 열리고 투덜대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담임과 마주치기 전에(그는 지훈을 무척 좋아했다.) 범인을 잡아야했기에 지훈은 급하게 눈을 돌리며 훤칠한 남자애와 나오는 승관의 뒷덜미를 얼른 움켜잡았다.

갑자기 목이 졸리는 압박에 비명도 못 지르고 끌려간 승관은 복도 맨 끝 계단위로 올라와서야 풀려나 겨우 숨을 쉬었다.

어떤 새끼가 무서운 줄 모르고 건드....

건드리면 좆 되는거야. 쉴 틈 없는 입놀림으로 개 성질을 부리려던 승관의 뾰족한 눈꼬리가 지훈을 보는 순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대신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푹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메던 가방이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숙인 승관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그래, 승관아. 쓸데없는 인사말 필요 없고 너 나한테 할말 없니?”

?

숙였던 허리에서 고개만 든 승관이 멍청히 물었다.

할 말이요?“

그래.“

없는데요.“

그래?“

지훈이 눈매가 가로로 가늘게 길어진다. 위험하다. 반년동안 접한 지훈 선배의 가장 위험한 3단계 웃으며 독설하기, 단계다. 승관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뭘 잘못했던가. 방송부 매일 청소하라는 거 토낀 거 들켰냐? 아니면 친구 아무도 방송부에 들이지 말라 했는데 한솔이 데리고 들어간 거 보셨나? 걔랑 조용히 있다 나갔는데. 아니면 지훈 선배 땅딸만하니 귀엽게 생겨서 겁나 무서운 선배라고 석민이랑 욕한 거 들으셨나? 수많은 죄들 중에 이거다 라고 오는 게 없다.

오늘 말이야.“

설마 그건 아니겠지. 오늘이라는 단어에 한 가지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설마아. 가능성을 부정하고 고개를 젓지만 저를 쳐다보는 지훈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난 말 못해- 지훈이 승관애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마른 팔인데도 납덩이를 두른 강철처럼 묵직하고 거대했다. 승관의 머릿속에 빨간 경고음이 더욱 시끄러워진다.

승관아.“

나지막한 지훈의 낮은 목소리에 척추에 소름이 돋았다. 죽을 거야. 승관의 목울대가 크게 울린다. 말하면 내가 민망해 죽고 안 말하면 지훈 선배 손에 죽겠지. 지옥문 입구처럼 서서히 열리는 지훈의 입에 승관의 눈이 서서히 감길 때 쯤.

승관아!!“

구세주가 나타났다. 승관과 지훈의 뒤에서 누군가 승관이 불렀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며 사형을 기다리던 승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선배님!!“

우사인 볼트처럼 지훈에게서 벗어나 다가오는 승철의 품에 뛰어 들어갔다. 온 몸으로 던져오는 승관에 어이쿠, 승철의 몸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안녕하세요, 승철 선배님.“

, 지훈아. 오랜만이야.“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지훈에게 손을 흔든다.

선배님 오늘따라 너무 반가워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제가 선배님을 엄청 사랑하잖아요.“

아침까지만 해도 지겹다고 다시 보지말자며 학을 뗐잖아, .“

제가 언제요.“

표정을 싹 지우며 새침을 떤다. 그러고는 사근사근 웃으며 승철의 팔에 매달려온다. 위로 누나만 있어 애교가 많은 편이라 매달려 애교를 떨어도 위화감이 없다. 특히나 승관은 친하고 좋아할수록 자주 애교를 부렸다. 처음 모르고 지훈에게도 부렸다 시베리아 공기처럼 차가운 반응을 마주치고 끊었지만 승철에게는 곧장 했다. 승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승관의 머리를 헝크렸다. 귀엽다고 했지. 남동생 같다고. 예전에 승철이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났다.

이제는 아예 몸을 베베 꼬는 승관이를 보다 지훈은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더 붙잡고 캐물을 의욕이 사라졌다. 조금만 더 겁을 주면 나불나불 쉽게 입을 열겠지만 승철 선배가 나타나면서 도루묵이 되었다. 그냥 혼자 알아봐야지, .

지훈아.“

조용히 사라지려던 지훈의 발을 승철이 잡았다. 눈을 깜박거리고 몸을 돌렸다.

,“

승관을 한쪽 옆구리에 꿰고 어느새 가까이 온 승철이 지훈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무언가 싶어 의아해하는 지훈의 손을 잡아 펼치게 했다. 그 위로 무게가 있는 것이 몇 개 떨어졌다. 복숭아맛 사탕이었다.

”...“

내가 이거 많이 있어서 그래. 맛있으니까 집 가면서 먹어.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그럼 잘 가.“

빠르게 말을 마치고 승철이 승관을 꿰고 반대복도로 걸어간다. 어흐흥, 선배. 야 너 아무말 하지마!! 점이 되어 사라지는 둘에서 시선을 떼고 사탕을 들었다. 흰색 배경에 복숭아 그림이 그려져 있는 평범한 포장지였다. 가로로 뜯어 사탕을 입에 담았다. 흰색의 동그란 사탕에서 물끈 복숭아 맛이 퍼졌다. 혀에 퍼지는 단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사탕을 굴렸다. 이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승관을 찾아간 이후로도 지훈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일부러 일찍 등교해 오는 수고도 해봤지만 언제 왔다갔는지 꽃은 늘 그 자리 그곳에 놓여있었다. 지훈 옆 창문 난간에는 꽃병이 생겼다. 컵으로는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꽃이 늘은데다 물을 마실 수가 없어 가게에서 하나 공수해온 것이다. 꽃집을 운영하는 플로리스트 엄마를 뒀지만 꽃에 큰 관심이 없던 지훈이 처음으로 제 주위에 꽃이 있는 걸 허락한 것이다. 거기다 가지를 다듬고 잎을 정리하고 대를 일정하게 자르는 수고까지 했다. 엄마 옆에서 강제로 보고 듣고 배운 게 빛을 발했다. 덕분에 이 주가 다 되도록 꽃들은 시든 것 없이 건강하게 살아있었다. 제일 처음 받은 꽃잎 끝이 조금 바래있었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원우는 이제 그 마음을 받아주기로 한 거냐 했고 순영은 그래도 누군지 모르는데 계속 꽃을 모으냐 뭐라 했지만 지훈은 꽃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딱 잘라 말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고백한 것도 아니고 꽃만 주는데 싫다고 버리면 꽃은 무슨 잘못이니. 그럼 고백하면 받을 거야? 순영이 질문의 지훈의 눈동자가 옆으로 비켜간다.

? 받을 거야? 순영이 고개를 들이밀고 묻는다. 지훈은 질색하며 순영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안 받아. 왜 안 받아? 이렇게 지극정성이면 받아줄만 하잖아? 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너 설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에이. 그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원우와 순영이 깔깔 웃었다. 지훈은 시끄럽다며 두 사람을 구박했다. 하얀 안개꽃³들이 바람에 날려 손을 흔들다 붉은 지훈의 귀를 톡 건드리고는 꽃들 사이로 숨어든다.

 

 

 

엄마!“

주말이 돌아오고 늦은 점심까지 자고 일어난 지훈은 엄마의 부재에 가게로 내려왔다. 2층 집에까지 퍼지는 뜨끈한 물비린내와 풀냄새가 양념처럼 곳곳에 산포된 꽃 향과 섞여 독특한 향을 발하고 있었다. 머리에 기역니은이 들어갈 때부터 함께한 꽃냄새는 시간이 오랫동안 흘려도 익숙치않았다. 오히려 갖고 있는 후각까지 앗아가 냄새에 둔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긴 했지만 글쎄. 그렇다고 고마운 마음이 드냐 하면...

엄마!“

지훈이야?“

깜짝아. 마지막으로 꽃꽂이를 하는 방문을 열던 지훈이 몸을 움찔 떨었다. 낮은 듯 높은 목소리가 누군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려오기 전에 세수할걸. 18살 사춘기를 겪고 있는 지훈은 투덜거리며 부지런히 눈곱을 떼고 입가를 닦았다. 혹시나 싶어 입 냄새도 좀 맡고 아무렇게나 뻗은 머리를 후드모자로 가리며 몸을 돌렸다.

선생님 주문한 꽃 착오가 생겨서 도매시장 가셨어. 무슨 일인데? 급한 거 있으면 도와줄까?‘

아니요. 안 계셔서 찾은 거예요.”

그렇구나.”

승철이 웃었다. 허벅지가 뚫린 검은 청바지와 영어로 프린티 된 검은 박시티를 입은 수수한 옷차림새는 늘 여기서 수업을 들을 때마다 승철이 입는 옷이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패션이기도 했다. 승철이 양손에 잎이 말린 흰 꽃과 노란 꽃을 한손에 가득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문가에 기대어 섰다.

오늘도 들어요?”

? . 이거 듣다보면 머리가 평안해진달까, 차분해져서 좋아.”

.”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꽃을 만지는 부지런한 손길 외엔 조용한 분위기가 뻘쭘해 지훈의 입이 바싹 마른다. 1년 선배고 동아리내에선 잘 지냈었는데 요즘 들어 인사하기도 어렵다. 싸운 것도 아니고 누구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저 때문이긴 한데..

지훈아.”

? , !”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있던 지훈이 승철의 부름에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가져온 꽃을 테이블 위로 활짝 펴고 본인 자리에 앉은 승철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지훈을 보고 있었다.

나 좀 도와줄래?”

어떤 거요?”

이게 사실 지난번 강의 때 했던 건데 내가 너무 못해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거든.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잘 안 되서 말이야. 너가 좀 도와줬으면 해.”

..”

세수안한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지훈은 승철의 옆에 자리 잡았다. 12명이 빙 둘러 앉을 수 있는 기다랗고 널찍한 테이블에 승철이 가져온 꽃들이 길바닥에 파는 나물처럼 한데 모여 있었다.

그런데 저 이런 거 잘 못해요, 선배.”

나보단 잘하잖아. 그러니 좀 도와줘 지훈아.”

승철 선배는 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너무 길어서 본인이 쪽가위로 자를 정도인데 가끔 부탁을 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오면 눈꼬리를 아래로 축 내리고 속눈썹을 흔들며 올려다본다. 산책가자며 목끈을 입에 문 큰 강아지가 주인을 올려다보는 것 같달까. 그러니까 반칙이다.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면 아무리 얼음장 같은 차가운 마음을 가진 냉혈한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얼굴을 돌렸다.

주제, 큼 주제가 뭐예요?”

목이 잠겨 잠시 침을 삼켰다. 겨우 문장이 되어 뱉자 승철이 가위로 꽃을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행운, 건강.”

늘 어려운 주제네요.”

다른 꽃꽂이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엄마가 하는 강의는 어딘가 좀 독특했다. 기본을 빠르게 가르치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도록 매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제들이 하나같이 사랑과 관련되어 있었고 주제도 함축적인 것들로 많이 썼었다. 행운, 건강 같은 난해한 것들은 대부분 꽃말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꽃꽂이를 할 때에 색의 조화와 꽃의 크기, 모양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꽃으로 전달되는 의미 같은 거라고, 매일엄마는 지훈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지훈은 꽃말에 대해 능통했지만 쓸 데는 없었다.

이거 여기다가요.”

아아, 오케이.”

꽃이 조금씩 완성된다. 플로리스트 강의동안에는 자유롭게 가게 안에 있는 꽃을 쓸 수 있어 지훈은 몇 개의 꽃을 더 가져와 도와주었다. 승철은 열심이었다. 엄마의 강의는 미리 예약을 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더러 몇몇은 지훈에게 간식을 사 먹이거나 용돈을 줄 정도였다.(물론 효과는 없다.) 그 정도로 인기가 많고 들어오기 힘든 걸 고3 수능으로 바쁜 선배는 3개월 째 꾸준히 듣고 있다.

어때?”

지훈의 도움으로 차곡차곡 모여 완성된 작품을 두고 승철이 자신 없는 얼굴로 지훈을 마주봤다. 지훈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분명 자신도 도와준 것 같은데 색이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지훈이 말을 못하자 승철의 눈코입이 아래로 축 처진다.

선배는 음, 자신의 세계가 강하네요.”

자신만의 방법으로 돌려 말했는데 승철이 픽 웃으며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며 웃었다.

선생님이 늘 나는 꽃꽂이를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미래에 더 좋을 거라 했어.”

엄마는 표현의 방법에 있어 직설적인 편이다. 지훈은 그 피를 진하게 받았다. 만약 원우나 순영이었다면 때려 치라고 말했겠지만 상대는 승철선배다. 지훈은 말 대신 승철의 등을 쓸었다. 셔츠에 닿은 단단한 등 근육이 움찔 떨었다.

왜 계속 하는 거예요?”

비아냥 같지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물었다. 시비조처럼 들리지 않지? 순영은 가끔 너는 뭔가 사람 오해하게 만든다며 조심하라 했다. 눈치를 봤다. 승철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지훈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하려고.”

?”

숙여 아래로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귀 끝이 빨갛다. 지훈이 들리지 않아 승철 가까이로 머리를 숙였다. 승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 주면서 고백하려 그러는 거지!”

 

-

 

요란한 소리가 한차례 휩쓸고 동시에 묵직한 것이 뿜어졌다. 테이블과 저 멀리 창문까지, 눈꽃처럼 하늘하늘 날며 가라앉은 것은 어린이 손바닥을 가리는 작은 꽃들. 몇 없는 꽃잎을 활짝 피며 아담한 제 사랑을 드러내는 꽃이다.

하하하하. 승철이 사랑에 빠졌구나.”

으윽,안돼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을 삼킨 승철이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가게에서 입는 앞치마 그대로인 엄마가 호탕하게 웃는다. 언제 들어 온거야? 방금. 승철의 가슴에서 터져 쏟아진 꽃송이를 집어 들며 말한다.

베고니아네. 지훈이 너 이게 꽃말이 뭔지 알지?”

“......당신을 짝사랑합니다.”

정답! 역시 어렸을 때부터 끼고 가르친 보람이 있어!”

경쾌한 목소리에 승철의 심장이 쿨럭쿨럭 토한다. 하얗고 붉은 꽃이 허벅지에 안착하다 무거워지면 바닥으로 우스스 떨어졌다.

그래서 누구야? 승철아?”

하지 마요, 선생님.”

엄마가 승철의 맞은편으로 가 책상에 몸을 기대고 은근히 물어온다. 승철이 손가락 사이로 힐끔 쏟아진 꽃잎들과 음흉하게 웃는 여자의 미소를 보곤 다시 얼굴을 묻었다.

매일 새벽마다 사갔던 꽃을 선물한 누구.., 승철아? 도망가니?!! 수업은??!! 짝사랑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철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일어난 반동에 의자가 바닥을 구르고 꽃잎들이 짓이겨 새콤달콤한 향이 풍겨졌다. 처음으로 풀냄새 외에 맡아본 꽃 향이었다.

꽃...... 매일 사갔어요?”

? 승철이? , 한참 사갔지. 2주 전부터인가 빨간 튤립이 있냐 묻길래 수업에 쓸 소량만 있다 했더니 한 송이만 팔아 달라 했었어. 그 땐 뭐 급한 일에 쓰나보다 했는데 그 때부터 매일 사가더라고.”

때떄로 우리 꽃집에 없는 걸 찾기도 해서 고터에 있는 생화 가게를 추천해 준적도 있었는걸. 지훈은 허리를 숙여 꽃잎 한 장을 집었다. 반쪽이 신발에 밟혀 자국이 생긴 망가진 꽃잎에서 한가득 향이 흘러들어왔다. 지훈아. 엄마 잠깐 2층 좀 갔다 올테니까 여기 청소 좀 해. 승철이 만약 오면 이 꽃꽂이 다시 하라 하고. 꽃잎에 코를 박고 움직이지 않는 지훈의 등을 두들기며 방을 나간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석에서 쓰레받기를 꺼내 꽃을 쓸었다. 쓰레받기에 들어가는 꽃잎이 바다에 물결처럼 파도칠 때마다 꽃 향이 지훈의 심장을 두들겼다.

처음 꽃이 튤립이었어. 빨간 튤립.”

제일 처음에 받은 빨간 꽃.

꽃 선물에 시작이었던.

그 꽃은....

꽃말은...

 

I love you.

 

지훈의 심장이 요동친다. 빗자루를 쥐던 손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른다.

여기서 터지지마. 봄이 아닌데 아카시아 꽃이 터지면 눈치 빠른 엄마에게 들키고 말거야!!

 

 

 

 

◀◀◀

지훈의 심장이 아프다. 이제 이력이 날 정도로 많이 터졌는데도 아직도 토할 것이 많은지 쉴 새도 없이 심장은 제 살을 찌른다.

이 이상 옷을 버리기 싫어 아침 일찍 선도부가 서기 전에 등교한다. 옷차림은 남색 교복바지와 흰색 티셔츠. 가슴이 뻥 뚫리면 그대로 버려도 되는 싸구려 1900원짜리다. 처음에 모르고 교복 와이셔츠를 입다 한쪽 가슴이 까맣게 그을려진 이후로 입지 않았다. 괜히 들키면 아이들에게 놀릴 거리가 될 테니까. 특히 순영이나 원우나. 일학년 승관이나 석민이. 지훈은 요동치는 왼쪽 가슴을 차분해지라며 두들기고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신발을 갈아 신고 주변을 둘러본 뒤 계단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오지 않은 빈 학교는 새벽녘처럼 차분하다. 2층 한 가운데가 지훈의 반이지만 지훈은 한 계단 더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3학년 교실 문을 열었다.

선선한 공기가 저를 반기고 익숙한 교실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이 위치한 책상사이를 지나 창문가 끝에 섰다. 자신과 똑같은 자리. 다를 바 없이 너저분한 책상과 창문 난간에는 커다란 통에 복숭아 맛 사탕이 가득 들어있다. 잘 먹고 있네. 친한 사람에게도 나눠주기 때문에 사탕은 훅훅 나간다. 때때로 선생님들이 하나씩 까먹기도 할 정도다.

다행이야. 열이 오르는 것 같아 헛기침을 했다. 심장이 아까보다 요동쳐서 자칫하다간 또 터질 것 같다. 지훈은 얼른 양쪽 바지 주머니에서 복숭아 맛 사탕을 꺼냈다. 오는 길에 계속 잡느냐 뜨끈하게 열이 오른 사탕 여러 개가 책상 위를 구른다. 오늘도 파이팅해요. 짧은 문장 하나라도 적을까 하다 몸을 돌리고 나왔다. 개발세발인 제 글씨를 보면 승철이 사탕을 주는 이가 지훈이인줄 한 번에 알 것 같아 겁이 난다.

좋아한지는 이제 5개월. 아직 보여주지도 못한 마음은 쌓이고 쌓여 펑 터지며 탈출을 감행하지만 사라지진 않는다. 짝사랑이 이루어져야만 사라지는 마법 같은 병. 병이 낫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마음을 고백하기는 두렵다.

똑같은 마음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고백하고 나서 완전히 남이 될까 봐. 유일하게 닿은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어 지훈은 오늘도 사탕으로 제 마음을 대신 고백한다. 없느니 못한 고백이지만 이 고백이 당신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오늘도 진심을 담는다.

 

 

 

 

◀◀

학교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아 넉넉하게 등교할 수 있는데도 남들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한 승관은 방금 재미난 걸 봤다. 학생들 등교 시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아침방송을 하라는 교장의 지시 이후 아침방송은 제일 만만한 일학년이 담당하기로 했다. 3개월 지났으면 다 알지, 그치? 무서운 지훈 선배의 명령 아닌(맞는) 지시에 일학년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원은 나포함 5. 일주일에 한 명씩 번갈아가며 하는 방송을 시작된 지 2달이 지났지만 할 때마다 졸리고 귀찮은 작업이다. 전날 도와주는 이학년의 도움으로 아직까지 큰 방송 사고는 없었지만 방송부 부장인 지훈 선배가 완벽주의자다 보니 실수할까 겁나 매일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작한다.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그럼에도 득이 많은 곳이다. 좋은 선배, 좋은 친구들, 재밌는 곳. 그래서 오늘도 승관은 졸림이 묻은 눈을 비비며 방송부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장비를 켜고 전날 선곡한 음악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아침을 보냈다.

한 번 간단하게 리허설을 마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물통을 들고 나올 때,

봤다.

도둑처럼 뒷꿈치를 들고 수상한 걸음으로 이학년 한 교실에 들어가는 위위선배 승철을.

승관은 직감했다.

저건 빅뉴스야.

세상에 관심 많고 재밌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남고딩 승관에게 승철의 수상한 뒤태, 도둑걸음, 이학년 교실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고백이겠지? 저렇게 조용히 들어간다는 건? 그런데 우리 남고잖아? 설마 도둑질은 아닐 거야? 흥분과 의문으로 동공이 커지고 콧김도 세져서 승관은 그대로 발자국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2학년 문을 활짝 열었다.

누구야!!”

!!!!!!”

마침 지훈의 책상 위에 꽃을 올리려던 승철이 놀라 의자와 함께 넘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선배 취향이 독특, 아니, 특이, 아니 좀 놀랍네요.”

승철이 나눠준 복숭아 사탕을 입에 굴리며 승관이 말했다. 의자에 함께 쓰러진 승철이 있던 책상으로 다가가 책 위에 이지훈 이라는 이름이 적힌 걸 본 순간 뭐?!!! 이지훈?!!학교가 떠나가라 외치던 승관의 입을 막던 승철은 여기서 떠들면 죽을 줄 알아. 살벌한 승철의 눈길에 고개를 끄덕이고 스스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쓰러진 의자를 일으키고 가져온 꽃을 뒷주머니에 꽂은 채 승관을 데리고 나온 승철은 방송부에 승관을 밀어 넣고 입을 다물라며 사탕을 직접 까 입에 넣어주었다.

왜 사탕 이예요? 그것도 복숭아? 선배 사탕 안 좋아하잖아요.”

선물 받았어.”

그럼 선배가 드셔야죠.”

아니 나는...”

싫은 눈치로 피하는 승철을 승관이 은근한 얼굴로 쳐다봤다.

아 지훈 선배님이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거군요? 선물로 받은 사탕이라도?”

너 어떻게 하면 다물래?”

승철의 얼굴이 울상이다. 아까 가져온 꽃잎 한 장이 우그러진 걸 알았을 때랑 똑같은 얼굴이다. 그냥 떼서 줘요, 뭔 걱정이예요. 제 말에 승철은 네가 꽃에 대해 뭘 알아? 하며 한 대 맞았다. 승철은 힘이 세다. 그래서 승관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입이 근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좋아한 거예요?”

승철이 벌떡 일어섰다. 위협적인 커다란 몸에 승관이 움찔 뒤로 빠르게 도망갔다. 몸과 달리 얼굴은 울상이고 목까지 빨개서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승관이는 다시 승철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눌러 앉혔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안 물어볼게요. 대신 왜 꽃이예요?

첫눈에 반하고 혼란, 부정, 기대, 실망의 단계를 거치다 최근에 안정기를 찾았다고 한다. 꽃이 터진지는 오래지만 시도 때도 없이 터지지는 않고 그냥 너무 설렐 때 한 번씩 터졌다고. 하루는 지훈의 (주관적인 승철의 입장에서)상큼한 미소에 도망친 쓰레기장에서 터진 꽃잎을 보다 꽃으로 내 마음을 전해야 겠구나 결심을 하게 됐다 한다. 사실 이건 비밀이지만 지훈 아주머니가 하시는 꽃꽂이 반 든 것도 그냥 지훈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든 거였는데 지훈을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어서 적성에 안 맞지만 아직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어쨌든 자신은 꽃꽂이반으로 꽃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다 지훈은 꽃에 대해 잘 아니까-특히 꽃말- 내 마음을 꽃으로 전달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 한다.

비밀이야.”

일단 생각해볼게요.”

!”

남의 수줍은 마음을 알게 됐다는 기쁨에 소파에서 일어난 승관의 발이 가볍다. 예전에 배운 발레 스텝을 밟으며 당했어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쥔 승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옆 여고에서 잘생겼다고 인기 많고 이 학교에서도 서글서글하고 재밌다고 남학생들에게도 인기 많은 승철이가 사랑에 빠져 힘을 못 쓰는 게 귀엽다. 튼실한 몸으로 건장한 고딩 놈들 다 몸으로 이기면서 자신보다 작은 지훈에겐 한없이 약하다.

귀여워. 그냥 좀 놀려주고 말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갖고 놀리는 것도 재미없고. 자신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중이니까. 조용히 응원해줄게요.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줄게요. 다만 사랑상담은 안 해줘요 그건 지겨워. 그러니까 선배님,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날 아침에 못 전해준 꽃을, 방송부에 가야만 했던 승관이 승철이 대신 방송부에 가는 척 이학년 오반 교실에 꽃을 전달해준 건 비밀.

그걸 주번이 본 것 안 비밀.

 

 

 

 

 

 

또또 보너스.

 

◀◀◀◀

안녕하십니까!”

새로 들어온 일학년들의 우렁찬 인사에 승철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선배들이 승철에게 부장자리를 넘기고 처음으로 받는 신입생이었다. 1학년답게 풋풋한 얼굴에 괜히 웃음이 났다.

잘 뽑았네.”

부부장 정한이 만족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누가 뽑았는데. 지수의 콧대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우뚝 솟는다. 면접은 자기에게 맡기라며 호언장담했던 지수의 면접후기가 살벌했다는 걸 아는 두 사람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거기 끝에 안경 쓴 애부터 간단하게 자기소개 할까? 이제 같이 활동할건데 이름정도는 알아야지.”

정한이 왼쪽 끝 아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긴장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힘차다. 조금 삐끗했지만 잘했다며 박수 받았다. 떨리던 입술에 조금 미소가 생겼다. 그 뒤로 공기가 조금 유연해진다. 훈훈한 분위기속에서 마지막순서가 왔다.

, 쟨 너무 약해 보이는데.”

유달리 키가 작고 얼굴이 뽀얗다. 햇빛을 본 적 없는 피부같다. 거친 남학생들이 많은 남고에서 홀로 튀는 네잎클로버 같은 아이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

정한의 귓속말에 지수가 손가락을 좌우로 저었다. 생각보다 쟤 쎄. 그래?

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돌리는데 남자애랑 눈이 마주쳤다. 작게 말한다고 말했는데 들렸는지 얼굴표정이 안 좋다. 승철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일학년 5반 십-팔번 이지훈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야구 포수와 밴드 피아노 담당했습니다. 체력이랑 음악이나 기계엔 자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날카롭게 들리는 높은 목소리에 1차 깜짝. 씩씩하고 어딘가 시니컬한 말투에 2차 깜짝. 기죽지 않는 태도-십팔번에서 3차 깜짝. 지수는 잘했다며 박수를 쳤다. 정한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잘 부탁해.... 요로 붙였다. 세상에 자기 말고 다 만만한 정한이가 요를 붙였다.

승철이 키득키득 웃으며 정한의 머리를 쓸었다. , 하지 마. 민망한지 앙칼지게 손을 내친다. 승철이 알았어~ 웃으며 엉덩이를 두들겼다. 정한이 몸을 피하며 일어나 일학년들과 손을 잡고 인사한다. 난 여기 부부장이고... 지수가 그 뒤를 따르고 승철도 일어나 한 명씩 손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뽀얗고 작은 이지훈 일학년 앞에 설 때에 올려다본 시선에 승철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잘 부탁해요.”

동그란 젖살이 붙은 지훈의 볼에 보조개가 푹 패이며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한다.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맑은, 아까 인사하던 때와 다른 싱그러움에 승철의 시간이

째깍,

멈췄다.

 

 

 

 

 

 

◀◀◀

어서오..”

어 지훈이구나.”

비가 주적주적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결혼기념으로 당일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부모님 때문에 밤늦게 가게를 지킨 지훈은 우산을 접고 들어오는 승철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예요, 선배님.”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며 묻자 승철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오늘 엄마 생일인데 깜짝 잊어버렸지 뭐야. 하하하. 모른 척 가기엔 양심이 찔리고 꽃이라도 사가야 할 것 같아서 왔어.”

지훈이 아... 말을 아꼈다. 그래서 좋은 거 없을까? 아주머니는? 여행가셨어요. 그래?

승철의 얼굴에 낭패가 서려있다. 이 동네에 이 시간까지 문 여는 데는 여기밖에 없는데다 꽃에 대해 무지한 승철이 자기와 비슷하게 모를 지훈에게 꽃을 사가기엔 무리 같았다. 어쩌지, 곤란해 하는 차에 지훈이 말했다.

엄마한테 듣고 배운 게 있어서 저도 대충 알고 포장도 해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좋은 걸로 고르세요.”

그래? 어두워졌다가 확 밝아지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지훈은 허리를 숙이며 꽃을 둘러보는 승철의 뒤로 몰래 웃었다. 귀여워. 그러다 자기 생각에 놀라 헛기침을 했다.

이거 어때?”

나쁘지 않아요.”

그럼 이걸로 하고.. 하나 더 하고 싶은데..”

그럼 이거 하세요. 이게 꽃이 작아서 큰 저 꽃이랑 하면 풍성하고 예뻐요.”

그래? 그럼 그걸로 해줘.”

“-----원이요.”

“.........디씨 안될까?”

.

선배니까 특별히 ---원 깎아드릴게요.”

고마워! 그래도, 돈을 깎았지만 포장은 신경 써서 해줘야 한다?”

.”

방송부에서 인사하고 자신의 사수가 되면서 둘이 붙어 있는 시간이 좀 생겼지만 학교 안과 밖의 최승철은 다르다. 학교 안에서는 선배로서 무섭고 위엄 있는 편인데 밖에선 덩치가 큰 강아지처럼 애교가 많고 밝다. 긴 눈썹으로 처진 눈동자가 어두워 무섭게 보일 법한데 웃고 떠들 때마다 활처럼 휘어지며 예쁜 눈웃음을 짓는다. 지훈이 빠른 손길로 포장하는 동안 순수하게 놀라며 어떻게 하냐 놀라는 승철의 입술이 반짝반짝 빛난다. 립밤을 발랐나.

여기요.”

고마워!”

리본까지 매고 건넨 꽃다발에 본인이 꽃다발 주인공처럼 즐거워한다. 엄마는 저렇게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얼굴이 좋아 이일을 생업으로 삼았다했다. 꽃을 주었을 때 볼 수 있는 그 행복한 얼굴. 그건 어느 누구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매일 말하던 엄마의 말씀이 이해가 안 갔는데 오늘 처음으로 지훈은 그 느낌이 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갈게. 내일 보자!”

핸드폰을 들어 꽃 사진을 찍다가 시간을 보고 나갈 준비를 한다. 뒷정리를 대충 하며 문 앞까지 배웅했다. 승철은 고맙다며 지훈의 머리카락을 큰 손바닥으로 흐트려 놓고 비사이로 사라졌다. 말릴 새도 없이 엉망이 된 머리카락에 두 손을 들어 닿았던 부분에 손을 올렸다.

선배가 만진 곳.

 

-

 

 

축축한 비 냄새를 한 번에 잠재우는, 코를 톡 쏘는 달콤한 꿀 향기와 함께 하얗게 젖어가는 꽃잎들. 봄꽃의 여왕, 아카시아.

그것은 지훈의 가슴에서 처음으로 꽃이 터지는 날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가슴 앓이해야 했던 사랑의 시작이었다.

 

 

 

 

 

 

 

 

 

 

 

 

 

 

 

 

 

 

 

 

 

 

 

 

꽃말의 의미 

¹(빨강)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²(빨강)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³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

비밀스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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