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 ah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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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사랑을 잃고
*리퀘박스 신청하신 익명님의 리퀘를 받아 작성했습니다.
w. 안다미로
몸이 무겁다. 새끼 코끼리 2마리가 각각 왼쪽 오른쪽 어깨에 올라온 것처럼 땅으로 폭삭 꺼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다. 세상 중력을 혼자 다 받는 것 같다. 몸이 몸이 아니다. 승철은 따가운 태양을 온 몸으로 받으며 되는대로 앉았다. 근육을 팽팽하게 부풀린 긴장을 풀고 흐르는 액체처럼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죽은 시신도 이보단 생기 있겠지. 세상 저 너머를 보듯 또렷했던 동공은 자동차 매연처럼 뿌옇게 풀렸다. 승철은 제 앞에 빨간 버스를 감흥 없이 쳐다봤다. 이미 몇 대의 버스를 보낸 직후였다. 태양아래 빨갛게 익은 땀 냄새와 마른 흙냄새 가득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던 정류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버스를 타고 집을 가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기는 탁 트이기라도 했지. 다 자란 콩나물처럼 빽빽이 서서 가야하는 버스는 산소가 자리할 곳도 없었다. 사람들 열기에 델까 에어컨은 빵빵하게 돌아갔지만 바람은 전혀 닿질 않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반나절 실컷 뛰어다녔던 몸이 푹 쓰러질 것 같았다. 버스를 타기위해 사람들이 움직이다 승철의 발을 툭 찼다.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쥐어뜯겼던 근육들이 놀라 지르는 비명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두들겼다. 그런 승철을 이상하게 내려다보는 버스를 이번에도 미련 없이 떠나보냈다. 늘 사람이 많던 정문 정류장에 어느새 승철만 남았다. 홀로 두고 떠난 버스소리가 유난히 컸다.
다음 버스까지 기다리던 시간이 길어 그 자리에서 잠시 졸았던 승철이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뭉개진 시야 저쪽에 횡단보도에 선 버스가 걸린다. 의자에 앉아 뒤에 있는 창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버스를 자세히 보기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꽃에 물을 주는 것처럼 승철을 흠뻑 적셨던 석양이 어느새 세모가 되어 버스 밑을 비추고 있었다. 기사는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꼈다. 내부는 썰렁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빠진 탓에 자리가 널널했다. 으차. 아이고. 아이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몇 번 털고 뻣뻣한 허리를 통통 두들겼다. 뻐근해서 한 바퀴 크게 돈 목에선 뼈끼리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도 났다. 이제 안 해. 자기를 보고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다가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바지주머니에서 교통카드를 꺼내며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체육대회 참여하나 보다. 미필에 고작 24살인 대한남아는 벌써 늙은이가 됐다. 겉가죽은 세상 그 누구보다 튼튼했지만 시각적 속임수였다. 껍질 안은 엉망이었다. 앞문이 열리고 계단을 밟기 위해 올린 다리에서 끄응, 버스 기둥을 잡고 겨우 올라와 카드를 찍고 뒷자리로 걸으면서 끄응 앓는 소리가 연신 났다. 승철이 반도 가기 전에 버스가 덜커덩 움직여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몸이 흔들려 중심잡기가 어려웠다. 좌우로 흔들리는 버스손잡이를 강하게 잡았다. 무거운 몸을 손잡이는 입을 꽉 물며 버텼다. 세상에 마상에 너무 힘들어. 손잡이에 허벅지 맞고 겨우 의자에 앉은 승철은 정류장에서 앉아 쉬며 충전한 기력을 모두 소진했다. 집에 도착해선 어떻게 걸어가지 걱정이 들어 무거운 엉덩이를 밀어 창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기댔다. 흔들리는 버스에 머리가 콩콩 찧었지만 참았다. 괜히 버티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로 휘둘리는 것보다 낫다. 그나마 좋은 건 바람이 시원했다. 사람이 없어 막힘없이 버스 안을 순회하는 찬바람이 태양을 흡수한 승철의 몸을 식혔다. 건조한 에어컨이 눅눅한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체육대회 내내 저 끝에서 저 끝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몸이 이제야 휴식을 취했다.
헉.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대로 넘어갈까 급하게 몸에 힘을 준 승철이 갑자기 깬 정신에 머리를 흔들었다. 정류장을 지나칠 뻔 하다 급정거를 한 건지 정류장이 버스 뒤꽁무니에 있고 개미처럼 한사람씩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언제 사람이 찼다 빠진 건지. 앞쪽으로 사람이 몇 있었다. 그 짧은 새 졸았다고 몸이 뻣뻣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버스를 의미 없이 훑어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아.
그러다 턱 빠질 뻔했다. 놀라서 힘껏 벌어진 입사이로 에어컨 찬바람이 들어갔다. 폐에 바람이 들었다. 콜록콜록. 마른기침이 터졌다. 급하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어떡해. 콜록콜록. 끈적끈적한 침이 바람과 함께 손바닥을 때렸다. 승철 앞에 앉아있던 검은 모자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승철은 콩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삼키려 기침을 꾹 참는 몸이 볼썽사납게 떨었다. 그래도 얼굴이 보여지는 것 보단 나았다. 검은 모자. 맞다. 분명 맞다. 확실히 맞았다. 요란한 폐에 심장도 벌떡벌떡 뛴다. 제 바로 앞 2인 좌석 창가에 앉은 검은 모자는 분명 이지훈이었다. 일 년 전 헤어진 구애인, 이지훈. 2년이라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에 바닷가 모래알처럼 씻겨 내려갈 줄 알았던 이름이 잠잠한 수면위로 떠올랐다.
최승철은 후문에서 버스를 탄다. 이지훈은 정문에서 탄다. 걸어서 절대 못 다니는 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두 사람은 끝과 끝에서 버스를 탔다. 과 건물이 근처에 있었지만 사실 가까운 정류장은 따로 있었다. 후문 종착지보다 훨씬 가까워 과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 정류장을 썼다. 승철만 반대로 몸을 돌렸다. 약간 가파른 보도블록을 밟아 후문 정류장까지 올라갔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정문과 달리 후문은 나직하다. 활엽수 그림자를 따라 올라가면 출발을 기다리는 버스가 서 있어 널널한 자리 아무 곳에 원하는 대로 앉아 갈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붐빌 때가 있었지만 대부분 널널했다. 후문정류장과 학교 거리가 있었고 이상하게 인기가 없었다. 아담하니 좋은데 그랬다. 덕분에 승철만 좋았다. 의자에 앉아 갈 수 있다면 후문까지 걸어가는 거리는 별 거 아니었다. 운동하는 셈 치면 됐다.
버스에 올라타 버스기사분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애용하는 뒷자리에 앉았다. 어깨에 멘 가방을 다리 위로 올리고 가방 입을 열어 이어폰을 꺼낸다.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귀에 꽂아 플레이 리스트 중에 곡을 선택하면 정문에서 이지훈이 탔다. 아 그 땐 이 지훈인줄 몰랐으니 그 사람이라 하겠다. 매번 같은 시간대였다. 과가 다르고 학년도 달랐는데 집 가는 버스를 타는 시간은 늘 같았다. 승철이 후문에서 타면 그 사람은 정문에서 탔다. 승철이 타지 않으면... 그 사람이 탔는지 안탔는지 눈으로 보질 못해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사람은 늘 정문에서 승철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심한 얼굴로 버스를 탔다. 적당히 사람으로 찬 버스에 앉을 데는 없었다. 그 사람은 앞문에 멀지않게 위치해 손잡이를 잡으며 핸드폰을 내려 봤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매번 같은 시간대,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이라 얼굴만 익숙했다. 그런 사람이 몇 있다. 아는 사람이 타는 것 아닌데 버스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올라타면 무의식으로 보게 되는 거. 신학기 특유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옅어지는 때쯤 익숙한 얼굴들. 오늘도 타셨네, 그런 내적 친밀감 같은 거.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음악에 박자를 타며 반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는 그런 무의식 행동 속에서 그 사람은 가장 먼저 얼굴을 익힌 사람이었다. 강렬한 사람이었다. 박시한 상의로 코디한 패션이 마음에 들었던 것보다 깨끗하고 단단한 얼굴보다 온 머리를 도배한 머리색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벚꽃색. 꽃샘추위에 개나리도 겨우 버티는 이른 봄에 그 사람 머리에만 봄이 폈다. 배짱 있네. 보자마자 든 감상이었다. 수능과 학교 교칙에 억눌렸던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머리색을 화려하게 만드는 걸 알았고 승철도 금발로 염색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훈처럼 화려한 색은 처음 봤다. 단연 얼룩덜룩한 그 수많은 색 중에 눈에 띄었다. 웬만한 담력으론 도전 못할 색이었다. 그럼에도 잘 어울렸다. 깨끗한 피부와 둥근 이목구비에 벚꽃색 머리카락은 마치 벚꽃 같았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벚꽃이 너무 일찍 폈다 부끄러워 그 사람 머리카락에 숨은 것 같았다. 벚꽃요정. 조금 과장해서 붙인 별명은 금세 마음에 꽃을 피웠다.
벚꽃요정은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선을 앗아갔으면서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분홍머리, ○○버스를 타는, 두 가지 단어만 뱉어도 아아 하며 아는 눈치들은 많았는데 이름을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렇게 눈에 띄는데 모를 수 있어? 아는 사람 인맥을 통해 알려고 노력해도 다들 잘 몰랐다. 아싸 중에 아싸던가 말이 안 되지만 기억이 흐릿한 그 반에 그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찾다 찾다 실패한 승철은 결국 그리 결론을 내렸다. 도저히 닿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버스에서 그 사람에게 직접 물을 용기는 없었다. 버스 안엔 귀와 눈이 너무 많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승철은 조심 또 조심하다 결국 포기했다. 여기까지가 인가봐. 그 사람 이름을 안 건 그리고 몇 주 뒤였다.
봄에 치르는 대학 체육대회 때 교수님과 후배들의 손에 떠밀려 과대표로 장애물 달리기를 하던 승철은 쪽지에 적힌 상대의 손을 잡고 뛰었다. 제법 색이 빠진 분홍머리에 동글이 안경을 쓰던 벚꽃요정이 해맑게 웃는 승철을 놀란 눈으로 올려봤다. 잠시 화장실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잡혀서 골인지점에 선 게 이해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낯선 사람이라 그랬다. 처음 보는 얼굴이 왜 나를??? 눈치가 빠른 승철이 오른손에 쥔 쪽지를 벚꽃요정에게 펼쳐 보여줬다.
[이씨 성을 가진 시디과 한명하고 같이 골인지점까지 달리기]
“나 아세요?”
놀란 얼굴로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묻는다. 승철은 환한 얼굴로 맞았다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운동장 저쪽도 난리 났다. 지훈은 저쪽과 승철을 번갈아봤다.
“찍었어요!”
잡고 달리느냐 아직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좋아한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발자국 뒤로 가는 게 납득 못한 모양이었다. 승철은 입을 꾹 물었다 뗐다.
“머리가 분홍색이라서 찍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머리색과 이 씨라는 성과 시디과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데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정답이었다. 벚꽃요정은 이 씨였고 시디과였다. 다가온 사회자가 이지훈, ○○학번 시디과라는 걸 비교확인한 뒤 승철의 다른 손을 잡고 일 등이라 외쳤다. 다른 과와 일, 이등을 다투던 승철 과가 단숨에 일등이 됐다. 승철은 환호하는 저쪽무리에게 손을 크게 흔들고 지훈을 안아 방방 뛰었다. 아니, 저, 잠깐, 갑자기 안겨 얼떨결에 제자리서 뛰는 지훈의 당황한 목소리는 승철의 품에 흩어졌다.
버스가 정차한다. 지훈이 버스를 타고 올라오고 자연히 승철 옆에 앉는다. 굳이 그렇게 앉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승철이 너무 반갑다는 얼굴로 지훈을 부르니까, 일부러 옆에 쌓은 큰 가방을 치우고 옆자리를 팡팡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부르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집 가는 거야?”
앉자마자 물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과 모임 있다며?”
“어떻게 알아요?”
“너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있을까?”
허세와 오글거림이 섞인 말을 상큼하게 뱉는다. 지훈은 으윽, 오글거린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신입생이 어떻게 과모임에 빠지셨나?”
“자취방에 물 샌다고 거짓말하고 나왔어요.”
“과 대가 알면 가만 안 둘 텐데.”
“형만 입 다물면 돼요.”
“공짜로?”
강한 힘으로 입안에 뭔가 밀려들어온다. 이 사이로 강제로 밀고 들어온 이물질에 고개가 뒤로 밀린 승철은 막대기를 잡고 내용물을 뺐다.
“오렌지네. 나 이거 좋아해!”
상큼 달콤한 막대사탕이었다. 다시 입에 담아 쪽쪽 빨았다. 배고픈 시간이었는데 허기가 조금 가셨다. 가짜 속임수였지만 집 가서 밥 먹을 때까지 배를 속이기엔 딱 좋았다. 사탕을 입안에 굴리며 승철이 지훈 쪽으로 몸을 기울었다.
“들을래요?”
벗긴 사탕 껍질을 동그랗게 말아 가방에 버린 지훈이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승철이 냉큼 꼈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들어왔다.
“너 이거 맨날 듣는 그 곡이지.”
지훈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제목이 뭐야. 지훈이 뭐라 말했다. 영어는 천천히 말해줄래? 내 귀가 놀란단 말이야. 투덜거리며 지훈 팔에 팔짱을 낀 승철이 지훈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영화 ost에요.”
승철이 볼 수 있도록 폰을 켜 화면에 띄운 플레이 리스트 제목을 따라 읽은 승철이 어, 이거 알아 화면을 살짝 두들겼다.
“이거 영화 그거 맞지? LA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
“봤어요? 이거 진짜 재밌지 않아요? 나 너무 좋아서 디비디까지 구매했어요.”
지훈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승철이 고개를 저었다.
“난 못 봤어. 되게 보고 싶었는데 그 때 알바 하느냐고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거든. 이거 재밌지? 후기 좋아서 알아. 진짜 보고 싶었는데, 이거.”
알바 끝나기 전날 영화관에서 내려온 탓에 결국 보지 못해 시무룩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아쉬운 목소리로 보고 싶다 그랬다. 지훈이 말이 없었다. 승철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훈이 키가 저보다 낮아 어깨에 기댄 자세가 불편했다. 지훈의 턱과 어깨에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이어폰 낀 귀에는 ost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어깨에 눌려 뭉개진 쪽엔 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집에서 영화 볼래요?”
양쪽 귀 정신없는 와중에 지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 디비디 있으니까... 플레이도 있고... 원하면 볼 수 있어요.”
지훈이 본인 두 손을 손 씻듯 연신 쓸며 정신없이 굴었다. 승철이 손을 뻗어 지훈의 한쪽 손을 잡았다. 정신없던 손이 뚝, 멈췄다.
“좋아.”
하필 왼손이었다. 왼손으로 왼손을 잡았다. 이렇게 깍지 끼고 싶었는데. 아쉬운 대로 손등을 덮고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승철보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로 통통한 손가락이 꼼지락댔다.
“손 잡아줘.”
손가락 뻗으며 얼른~ 흔들었다. 지훈이 오른손으로 제 왼손을 깍지 낀 승철의 왼손을 덮었다.
“영화만 볼 거야.”
“...네.”
대답이 한 박자 느렸다. 승철은 모른 척 제 오른손을 들어 지훈의 오른손을 덮었다. 잡은 손들이 불편했다. 지훈이 손을 흔들어 풀다가 짝을 맞춰 제대로 잡아주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제대로 닿았다. 승철이 작게 흥얼거렸다.
“부모님은 계셔?”
대답은 없었다.
참 귀여웠지.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말랑한 얼굴로 영화 집중 못하게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어느새 눈을 감으며 키스를 하던 얼굴이 선했다. 사랑스러운 아이라 아무말 없이 저를 보며 웃어도 심장이 꽉 눌렸었다. 가만히 입을 맞추면 발아래가 푹 꺼져 아찔했다. 점멸하는 시야에 땀을 흘리는 얼굴에 저를 열렬히 갈망하고 있어 승철은 지훈을 몇 번이고 불렀다. 정신없었다. 정신 차릴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정신없이 연애했었다.
앞을 바라보는 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승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을 홀랑 잡아먹는 복학생 중에 하나가 본인이었다. 실제론 복학생이 신입생에게 잡혀먹었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을 낚아챈 건 맞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체육대회를 핑계로 번호를 교환하고 인사하고 연락하고 아는 체 했다. 누가 먼저 도장 찍었을까, 좀 무리하게 들이댄 면도 있었다. 신입생은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라 연애에 실패했거나 매력 없는 복학생들은 봄이 지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을 낚으려고 열심히 구덩이를 팠다. 판 보람 없게 요즘 애들은 머리가 좋아 쉽게 걸리진 않았지만 복학생의 끈기는 질겨서 대부분 얼마 못 버티고 넘어갔다. 지훈도 그랬다. 승철이 소매를 걷고 도끼를 들어 연신 밑을 찍으니 그 굳건한 지훈 나무도 결국 쓰러지더라.
“선배가 뭐가 아쉬워서 날 쫓아다녀요?”
형이 아직 선배였을 때 지훈이 그랬다. 몹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복학생이었지만 잘생기고 다정한 승철이 인기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실제로 신입생들에게 고백 받는 특이한 케이스의 복학생이 승철이었다. 소문에 어두운 지훈이 승철의 인기를 알음알음 아는 정도인데 왜 지극히 평범한 저를 쫓아다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잘생겨서 그러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하려면 꺼지라 그랬더니
“귀엽기도 하고.”
뒷말을 붙인다.
“첫눈에 반했어. 그거면 된 거 아니야?”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싱긋 웃는다. 그런 얼굴로 그러면 반칙이다. 복학생이라면서 왜 이렇게 귀여운 척 굴어. 지훈은 아무 말도 못했다. 첫눈에 반한 게 대단한 이유가 되지 않지만 틀린 이유는 아니다. 첫눈에 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마치 운명처럼 콕하고 박힌 건데 지훈이 제가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넘어갔다. 너무너무 좋다는데 어떡해. 승철은 지훈이 불쌍했다. 어리숙한 아이. 좋아한다는 사람 다 받아줄 필요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지훈인 어렸다. 승철이 온 몸으로 좋다고 외쳐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마음이 여렸다. 감정을 거절하는 걸 어려워했다. 싫은 건 싫다고 확실히 말하는 단호한 놈이 왜 중요한데선 물렁해? 사귀고 나서 생각보다 쉽게 본인을 받아들였던 지훈이 불안했던 승철은 금세 지훈에게 한 마디 했다. 싫으면 싫다고 해. 말 안 들으면 꺼지라고 하고. 그거 거절 못해서 받아주면 너 큰일 나. 나름 몇 년 빨리 어른 된 사람으로서 충고였다.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귄 거면 좋은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맞아서 불안했다. 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거절 못하고 받아줄 거잖아. 속마음은 세상구경 못하고 지하로 떨어졌다. 네, 제 말에 수긍하는 지훈을 볼 자신이 없었다. 좋아해. 물음표는 온점이 됐다. 원래 가장 많이 좋아하는 삶이 지는 거랬어. 처음부터 뜨거웠던 건 나니까 승철은 두 사람 사이에서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틀렸던 것 같다. 정답은 모르지만 느낌이 그랬다. 짧고 뻣뻣한 모자 아래 숨겨지지 않은 지훈의 짧은 머리카락이 따가웠다. 지금 일병? 상병? 군대를 가고 일 년이 얼추 지났으니 일말상초쯤 됐을 거다. 눈을 낮췄다. 계속 볼 자신이 없었다. 꼭 지훈만 보지 않고 아무데나 시선을 돌려도 시야에 지훈이 찼다. 짧은 머리카락이 콕콕 찔렀다. 큰 눈을 목구멍을 심장을 찔렀다. 지훈은 노래를 들으며 앞만 보고 있는데 꼭 승철을 보며 따지는 것 같았다.
‘왜 그랬어요?’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했어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답이 제 안에 없었다. 그래서 눈을 내리감았다. 보지 않으면 괜찮겠지. 그런데 지훈이 냄새가 났다. 지훈이 숨소리가 들렸다. 승철의 온 몸이 예민하게 지훈에게 반응했다. 도착지는 멀었다. 버스는 빙글빙글 꼼꼼히 온 마을을 배회하기 때문에 아직 제 집 정류장도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 승철보다 더 가야하는 지훈이 내릴 이유도 없었다. 자리를 옮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괜히 움직였다가 기척에 지훈이 고개를 돌린다면...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승철은 버스에 더 이상 있을 자신이 없다. 바로 창문을 열고 달리는 버스에서 뛰쳐 내려버릴지도 몰라. 차에 치여 죽어도 지훈과 마주보는 것보단 낫지. 그래서 승철은 고개를 돌렸다. 지훈이 걸리지 않는 창문 쪽으로. 노을이 지고 푸르게 젖어가는 하늘을 보며 할말없는 죄인은 기울어진 태양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헤어진 이유는 승철만 안다. 헤어진 전날까지 지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승철과 같이 있었다. 이불 위를 뒹굴 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키스를 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기말이 코앞인데도 여유작작했다. 연애에 정신 팔려서 그랬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지만 뜻대로 안 됐다. 공부한다고 떨어졌더니 보고 싶었다. 보고 싶으니까 옆에 두고 옆에 두니까 닿고 싶고 닿으니까 가만있을 수 없었다. 침대에 붙어서 어차피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 맨 몸으로 서로 엉키며 장난을 쳤다. 가슴을 핥다 간지럼 태우는 지훈에게 복수한다고 지훈의 옆구리와 엉덩이를 깨물었다. 그러다 그대로 몸이 위로 올라가 영상으로만 보던 체위를 했다. 미친 거야. 제 성기를 놀리는 지훈의 혀 테크닉에 지기 싫어 열심히 혀를 놀려도 가장 먼저 함락되어 무너지는 건 승철이었다. 엉덩이 사이를 갈라 안을 헤집는 지훈의 뜨거운 기둥에 몇 번이고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항복이라 외친 것도 승철이었다.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둘은 뒤엉켰다. 속궁합이 최고였다. 취미도 취향도 비슷했다. 연애는 이상무. 어느 것도 문제가 없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사랑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헤어졌을까.
몇 번이고 울린 전화가 끊길 때까지 숨죽이며 끊기길 기다렸던 승철은 지훈에게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이유를 말한 적 없었다. 숨다가 방학하자마자 본가로 도망간 바람에 지훈이 승철을 만날 수 없었고 거는 전화 문자 모두 무시하니 연락이 닿을 방법도 없었다. 그 와중에 학교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얼마 안 되어 지훈이 입대했단 소식이 들렸다.
“다행이야.”
걱정되어 전화한 친구에게 뱉은 첫마디는 그랬다. 정말 다행이야. 떨리는 음성으로 몇 번이고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지훈과 승철의 관계를 아는 친구의 진심어린 걱정에 승철은 입가를 털며 웃었다.
“안 괜찮으면 안 돼.”
그래야 지훈에게 덜 미안해져.
창문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지금이 해가 지는 저녁이라는 걸 몰랐을 땐 최고의 파라다이스였던 곳이 지금엔 아름다운 감옥이 됐다. 밤의 커튼이 내린 창문에 지훈의 옆얼굴이 비췄다. 일 년 전 그 얼굴 그대로 여전히 반듯하고 잘생겼다. 군대 가서 고생하지 않을까 로션 귀찮아서 안 바르는 놈인데 관리 안해서 매끈한 피부 거칠어졌으면 어떡해, 혼자 품던 걱정이 비춘 얼굴에 와르르 무너졌다. 눈물이 쏟아진다. 큰 줄기를 타다 여러 갈래로 갈라져 소리 없이 추락한다. 체육대회에 맞춰 입은 통 큰 체육바지가 차마 무거운 눈물을 안지 못하고 모두 흘려버린다. 스스로조차 거부한 눈물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손으로 훔쳐 닦고 입술을 세게 물어도 멈추지 않는다. 일 년동안 잘 참았던, 하늘까지 닿았던 높은 댐이 창가에 비춘 얼굴에 무너져 막을 수 없었다.
사실은........
범람하는 감정 속에 소리가 새어나올까 이를 악물었다. 턱이 뻐근하다. 주먹까지 쥐었다.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사실 들키기보다 진심을 토할까 그게 무서웠다. 나만 아는 내 마음은 나만 알면 됐다. 속에서 곪아 썩고 냄새가 나도 나만 참으면 아무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어쩌다 너를 만나도 알 수 없게 빗장을 치고 가면을 두르던 마음을 잊지 말자. 승철은 주먹 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훈이 귀에 꽂힌 이어폰의 기능이 좋길 바란다. 버스가 도로 우물에 걸려 덜컹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길. 지훈이 끝까지 저를 몰랐으면 한다. 매일 같이하던 하굣길에 더 이상 나와의 기억이 쌓이질 않기를.
신입생의 연애는 짧다. 옆에서 하는 도둑질에, 부추기는 충동질에 해버리니까 얼마 못가 이 짓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값어치 없는지 알고 흥미를 잃오 다들 잠시 헤맨 길을 찾아 똑바로 걷는다. 헐값에 불리던 몸을 단정히 해 제 값을 붙이고 제대로 된 연애를 본격적으로 한다. 승철은 지훈에게 자신이 그런 연애이길 바랬다. 신입생의 바보 같은 연애. 죄 많은 복학생에게 꼬임당해 농락당하다 버려진 연애가 딱 승철이 원하는 스토리였다. 그래야 다신 그런 연애 안하니까. 괜찮은 네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일이 하나도 없으면 좋겠어. 그저 좋아했을 뿐인데 그 감정하나가 지훈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승철은 지훈이 없는 학교에서 먼저 배웠다. 그 옛날 영화 트루먼쇼처럼 모든 이들의 눈이 자신을 관찰하고 지켜봤다. 승철은 호흡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 온몸으로 배웠다. 자의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호흡은, 시간에 맡겨야했다. 승철은 그걸 인지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버린 시간을 집착했다. 미련했다. 집착보단 미련이었다. 승철은 호흡을, 지훈을 놓지 못했다. 연애하던 기간은 지극히 짧았지만 그것이 마음과 비례하진 않아서 승철은 이불속에 숨어 일부라도 보일까 꼼꼼히 잠군 상자를 다시 확인하듯 제 심장을 헤집었다. 구석구석 잘 숨긴 함이 어쩌다 일부 넘친 눈물에 젖으면 눈물은 짜서 부식되기 쉬워 얼른 마른걸레로 깨끗이 닦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열려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온 몸이 축축하다. 승철은 몇 번이고 얼굴을 쓸었다. 지훈이 얼굴너머 익숙한 거리가 보였다. 곧 승철이 하차해야했다. 승철은 허벅지에 팔을 올리고 옆으로 고개를 묻었다. 여기서 세 정거장 뒤가 지훈이 내릴 곳이었다. 그 때까지만.
흙냄새가 난다. 체육대회라고 신나게 뛰어다닌 탓에 마른 모래냄새와 햇빛에 마른 소금냄새가 에어컨 바람에 땅으로 꺼진다. 지훈이 내리고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자. 반대편으로 옮겨 돌아오는 버스를 타야겠지만 괜찮아. 하루 종일 혹사당했고 울어 기력이 빠진 몸은 익숙한 거리에 쉬자며 아우성을 친다. 승철은 눈을 끔벅였다. 흐르는 눈물이 거리를 지웠다. 마지막이다. 정말로. 지훈이 제대하고 복학하면 승철은 졸업해 학교에 없다. 복학생 이지훈은 얼마나 근사할까.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오늘 비록 창문이지만 지훈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봤으니 승철은 만족한다. 이정도면 됐어. 제 불쌍한 사랑을 끝낸 보상으로 이정도면 과분할 지경이다.
승철은 지훈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몇 번이고 닦으며 눈동자에, 신경에, 뇌에, 심장에 지훈을 박는다. 버스가 부드럽게 출발한다. 타이어가 훑고 간 도로에 흘러 떠내려간 눈물이 또르르 굴러간다. 그리고 톡. 도로 옆 하수구에 빠진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빈 정거장만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