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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ah하네요.

[우쿱] 사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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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사막

다몬드 2017. 4. 15. 23:21

 

 

 

*꼬일때로 꼬인, 짝사랑, 우쿱으로, 하뜨님(@cabinet_23) 리퀘

*피스틸버스 세계관

 

 

 

 

 

[우쿱] 사막

 

 

 

 

w.안다미로

 

 

 

 

 

 

 

 

살면서 사막을 가본 적 없지만 메마른 모래냄새를 안다. 구름도 없는 새파란 하늘 태양이 붉게 타오를수록 바짝 타들어가는 모래알을 안다. 맨살을 파고드는 죽음의 땅에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모래가 사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있듯 지훈도 제 작은 심장에 갇혔기 때문에, 지훈은 사막을 알았다.

지훈아.’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 건조한 살이 부딪혀 긁어 거친 성대를 적시는 한 모금의 물처럼 승철은 지훈을 적셨다. 팔목을 타고 손가락을 깍지 끼어 혀를 내밀며 키스를 갈구한다. 사막에 죽은 사람들의 사망원인은 익사. 아이러니하게 물 한 모금 없는 마른 사막에서 물에 빠져 죽어, 지훈은 때때로 물에 잠겨 죽었다. 목이 말라서 갈망해 고개를 숙여 승철의 혀에 익숙하게 간절히 제 혀를 섞는다. 키스에 반응해 승철의 성대가 울렸다. 절로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으로 눌러 키스가 거칠어진다. 승철이 턱을 들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쫓아온다. 두 사람의 타액이 승철의 목 뒤로 지훈의 혀 뒤로 넘어갔다. 빠져죽을 것 같다. 귀 뒤에 보이지 않는 아가미로 쓸모없는 것들이 빠져나갔으면 좋겠어. 틀어 떨어진 입술을 뻐끔거리며 눈을 감는 승철을 보며 지훈은 상상을 했다. 아가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사막의 모래. 비틀려 날라 가는 죽은 풀떼기들. 뼈만 남은 동물의 시체를.

지훈아.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사막의 모래냄새가 다시 지훈을 감싼다.

 

새벽녘 푸른 공기에 얼핏 잠에서 깨는 게 싫다. 기상시간까지 2시간이 남았는데 미리 깬 것보다 깊이 잘 자다 갑자기 깨진 불쾌함보다 눈을 떴을 때 제 옆에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의 등을 먼저 봤기 때문에 싫다. 한번 잠들면 웬만해선 깨지 않는 편인데 왜 이 사람만 오면 자지 못할까. 짜증이 일어 얼굴을 구기면서도 화를 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 예를 들어 대학까지 같이 온 절친 순영이라면, 순영이가 아무 짓을 하지 않았고 제가 잠을 깬 이유가 순영과 아무 관련 없음에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트리며 순영을 발로 찼겠지만 사랑은 사람을 온순한 겁쟁이로 만들기 때문에, 지훈은 이불을 위로 당겨 승철의 드러난 어깨를 덮기만 했다.

지훈은 새벽공기에 푸르게 젖은 승철의 뒷머리를 눈으로 쓸었다. 밤 내내 지훈을 받아들이느냐 베개에 짓눌려 지들끼리 엉키고 엉망이었다. 얌전한 직모인 지훈에 비해 제멋대로 말리는 반곱슬인 승철은 섹스가 끝나면 뒷머리부터 정리했다. 온몸은 붉고 아래는 지훈과 본인의 체액으로 더러웠음에도 꼭 머리부터였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사이를 쓸어 옆으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정리된 머리칼을 보면 서로 탐했던 섹스는 꿈처럼 흐릿했다. 나만 아는 꿈처럼. 알몸으로 승철이 욕실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꿈은 더 꿈이 됐다. 그 날엔 악몽을 꿨다. 지훈이 제 손에 든 가위로 승철의 머리를 마구 자르는 꿈을. 속은 시원했고 손은 떨었다. 무서워서? 힘들어서? 슬퍼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위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면 꿈에서 깼다. 방금도, 악몽에 반쯤 잠겨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손은 여전히 떨었다. 그런 손을 뻗어 지훈은 승철의 뒷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제 손길에 깨지 않길 바란다. 이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 유일하게 승철이 지훈과 가까운 시간이었다. 몸을 섞은 뒤 열기가 채 가시기 전에 열에 아홉은 바로 나가는 사람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건 흔치 않았다. 새벽에 깨 제 옆에 옆으로 누워 자는 승철을 바라보는 지금이 제일 거리가 가까웠다. 왜일까?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외 사랑이라서. 이지훈이 최승철을 사랑해서 그렇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3년 째 외사랑 중이었다.

 

지훈이 승철을 처음 본 건 기숙사였다. 정확하게는 신입생으로 들어와 다른 과인 형과 21실로 쓴 학교 기숙사에서 주말동안 집에 갔다 돌아와 문을 열다 형과 몸을 섞던 승철을 처음 봤다.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림에 문을 다 열지 못하고 들어가려고 한발자국 떼 앞으로 몸을 기울였던 지훈은 당혹감에 얼었다. 왼쪽 형 침대에 형의 벗은 두 다리가 뻗어있었고 형 위에 앉아 둥글게 엉덩이를 놀리던 등에 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 미안..”

묻지 않아도 뻔한 상황에 지훈은 크게 당황하며 눈을 내렸다. 아직까지 잡고 있는 손잡이를 당겨 닫으려다 발이 걸렸다. 문에 눌린 발이 너무 아팠다. 그것보다 저를 보는 4개의 눈동자가 더 아팠다.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한 지훈과 달리 차분했다. 문 안 잠갔어? 잠글 새가 있었나.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 죄송합니다. 그 사이 바닥에 붙은 발을 채찍질해 겨우 떼어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았다. 잠겼다는 도어락 소리에 주저앉다 문 너머로 들리는 작은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 복도를 달렸다. 귀가 홧홧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거운 가방이 등 뒤에서 쿵쿵 등을 때렸다. 양심에 손을 얹고 야동을 본 적 있고 친구들이 자랑하며 떠드는 섹스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지만 두 눈으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이 큰 교복에 파묻혔던 지훈의 어깨를 감싸 쥐며 처음 야동을 보여줬을 때처럼 심장이 뜨겁고 어지러워 속이 울렁거렸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학교 운동장까지 달리면서 눈과 코와 귀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맡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몇 바퀴를 뛰어 폐가 터질 것처럼 아파서 주저앉을 때까지 형 위에 앉던 사람의 꽃이 피었던 너른 등만이 콩깍지처럼 눈에 들러붙었다.

한 시간을 운동장을 의미 없이 돌다 이때쯤하고 돌아간 기숙사에서 그 사람이 반겼다. 머리는 젖고 얼굴은 뽀송해 눈에 익은 와이셔츠를 입던 참이었다. 방 너머 들리는 샤워소리와 그 사람 등에 핀 어지러운 꽃들에 눈을 돌려 나가려는 사이 대충 단추를 꿰맨 남자가 지훈을 불렀다.

듣던 대로 귀엽구나, .”

불려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현관에 서서 긴장했던 지훈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등을 보이며 옷을 입던 남자는 지훈의 얼굴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많이 놀랐지?”

소매 단추를 잠그며 다가와 묻는다. 턱이 있는데다 형광등을 뒤로한 남자의 몸이 거대했다. 얇은 셔츠로 불투명하게 보이는 꽃들이 어깨 아래까지 살짝 걸쳐있어 지훈은 남자의 발을 내려다봤다.

아니요.”

양말을 신지 않는 맨발이 생각보다 작았다. 그 중에 짧게 자른 발톱이 눈에 띄었다.

괜찮아요.”

살짝 드러난 복숭아뼈가 하얬다.

정말?”

되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역광에 어두운 얼굴이 묘했다. 머리가 젖어서일까 대답과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

?”

죄 지은 게 아니니까요.”

 

그 이후로 볼일 없다고 생각한 남자, 승철을 자주 봤다. 기숙사에서, 강의실에서, 식당에서. 형하고 같이 있을 때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과 있거나 드물게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전처럼 섹스중인 승철을 만나지 않았지만 지훈은 승철이 손을 들어 인사하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질린 거지 뭐.”

지훈에게 감자탕을 얻어먹으며 승철은 섹스파트너의 이별을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 솔로야.”

승철은, 최승철은, 문예창작과 △△학번 선배는 양념을 입 끝에 묻히며 감자를 뜯었다. 지훈은 입맛이 뚝 떨어져 승철 앞에 반찬을 모두 밀었다.

안 먹어?”

입맛이 없어서요.”

네 배는 아니라는데?”

사람들로 시끄러운 식당에 작게 울린 제 배 고동소리는 어떻게 들은 건지. 지훈은 혀를 살짝 내밀며 부정했다.

안 먹고 싶어요.”

배는 고픈데 먹기 싫었다. 지훈이 대학근처에서 잘 먹는 음식이 이 집 감자탕이었음에도 먹고 싶단 생각이 안 들었다. 뼈를 잡던 손가락을 쪽 빨던 승철이 입을 열었다.

나랑 먹기 싫어? 더러워서?”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요.”

그럼 왜 안 먹어.”

생각이 없어요.”

나랑 밥 먹을 생각?”

.”

아니면 나랑 섹스할 생각?”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국물과 건더기를 밥그릇에 옮겨 담았다. 뜨거운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확 열 받았다.

고기도 먹어.”

두 개의 긴 젓가락이 뼈에 붙은 고기를 뜯는다. 지훈은 고기를 수저에 담아 먹었다. 질겼다. 오래 끓여 퍽퍽한 살코기가 이에 뭉개지지 않고 입안을 맴돌았다.

잘래?”

겨우 넘긴 고기가 명치에 걸렸다. 남들보다 더 내려간 눈꼬리가 속눈썹에 사라졌다. 긴 속눈썹에 눈동자를 가리고 입은 옹기처럼 오므라졌다. 밥을 씹어 넘기는 승철을 보며 지훈은 제 가방에서 소화제 한 알을 꺼냈다. 상비한 소화제는 이미 반 이상이 비었다. 물과 함께 삼켜 명치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지훈이 승철을 불렀다.

형 자취방으로 가요.”

기숙사엔 룸메 형이 있으니까.

 

얼추 정리된 머리카락이 아쉬워 손을 떼지 못했다. 키가 작아 나란히 서면 맞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지훈은 승철의 곱슬머리를 쓸거나 만진 적이 없었다. 승철이 안된다고 거부한 적 없지만 그랬다. 선뜻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다듬지 못해 덥수룩한 일반 머리였음에도 마음이 애달팠다.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승철이 허락하면 주저하겠지. 아니 일단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 지훈은 승철의 뒷머리를 따라 내려오며 목덜미에 수놓은 동백꽃을 더듬었다. 단아한 자태에 붉은 꽃이 독처럼 지훈을 마비시켰다.

 

꽃들 사이에서 승철과 키스를 했다. 대학 근처에 새로 연 식물원 안쪽 깊숙한 작은 화원에서 젖은 꽃냄새를 맡으며 입을 맞췄다. 숨이 막혔다. 첫 키스였다. 화원은 더웠다. 바깥보다 더운 화원에서 물에 젖어 진한 꽃냄새가 숨을 막았다. 어깨와 뒷머리를 더듬으며 감싸는 손가락이 넝쿨처럼 몸을 꽁꽁 감쌌다.

.”

입술을 떼고 눈이 풀린 지훈을 내려 보며 승철이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형이 다 해줄게.”

높았던 시선이 낮아진다. 쌍까풀 진 눈이 곡선처럼 휘어져 거기에 정신 팔린 사이 승철은 지훈의 바지버클을 풀었다. 말릴 수 없었다. 손을 채 뻗기 전에 지훈의 성기를 두 손으로 잡아 입에 담은 얼굴에 주먹을 쥐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승철에게서 풋풋한 냄새가 났다. 성기를 문 얼굴이 꽃처럼 붉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승철의 어깨를 잡았다. 손에 구겨진 셔츠 사이로 노랗고 빨간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

풀냄새가 진해진다. 구석진 화원에 물을 머금은 꽃들은 불청객들에게 침묵으로 시위한다. 수천 개의 눈동자를 빛내며 은밀한 행위자들을 주시한다. 손톱을 세웠다. 승철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지훈은 승철의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부딪혔다. 제 냄새로 진한 입안은 서로의 타액으로 옅어졌다. 승철이 지훈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지훈은 승철의 어깨를 긁었다. 손톱에 찢겨진 꽃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지훈의 손안에 짓뭉개졌다.

 

지훈은 승철과 잘 때마다 후회를 했다. 아니 자기 전부터 후회를 했으니 승철을 만난 날부터 후회를 쉰 적이 없었다. 왜 당신이었을까.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도는 생각의 처음과 끝은 결국 똑같았다. 왜 최승철일까.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수천가지 될 수 있는데 왜 최승철이라 물으면 벙어리처럼 입 벙긋 못했다. 순영은 때때로 웃으며 놀렸고 가끔은 불쌍하다는 듯 등을 두들겼다. 삼년의 외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아, 더욱이 상대가 최승철이라 안타깝다는 듯 동정했다. 누가봐도 최승철은 사랑하고 안 어울렸으니까.

넓은 등을 타고 어깨를 넘어 옆구리와 가슴까지 꽃으로 도배된 음란한 피스틸. 3년 전이 그랬고 지금은 더했다. 그저께, 아니 더 전에 잠자리에서 엎드려 높이 들던 엉덩이 사이로 안개꽃이 자잘하게 핀 것을 봤다. 지훈은 그것을 모두 손톱으로 뜯었다. 피가 비췄고 승철은 몸부림을 쳤다. 자신보다 큰 몸을 위에서 짓누르며 지훈은 모든 꽃을 꺾었다. 쓴 피 냄새가 코를 찌르고 이불은 붉게 물들었다. 깨끗했던 이불이 구겨지고 더러워지면 패배감에 울었다. 서로의 냄새가 베인 이불에 얼굴을 묻고 온기가 빠진 형이 누웠던 자리를 끌어안았다. 형이 없다. 여기에 최승철이 없다. 섹스가 끝나고 울린 전화에 인사도 없이 나가 연락도 없다. 본래 그런 사람인 걸 알면서 상처받는다. 자기 좋을 때만 나타나 흔들어놓고 거들떠도 보지 않는 매정한 사람을 왜 사랑했을까. 학기 초창기 O.T. 때 한 선배가 꽃을 주의하라 한 것을 콧방귀를 끼며 무시했던 죄 값일까. 그러기엔 너무 무겁다. 지훈은 울고 또 울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온몸의 수분을 다 토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하면 저 멀리 사막을 횡단했다. 늙은 낙타를 타고 매서운 태양에 천천히 말라갔다. 건조해 갈라진 입술이 본능처럼 물을 찾지만 이미 몸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낙타는 미동 없는 지훈이 죽었다 생각했는지 등을 털어 떨어뜨리곤 제 갈 길을 갔다. 모래가 지훈을 받는다. 오십 도가 넘는 모래에 가죽뿐인 마른 살갗이 까맣게 탄다. 고개냄새가 난다. 냄새를 맡은 독수리가 탁한 눈동자 위를 날아다닌다. 익사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막답게 죽을 수 있으니.

 

형은 왜...”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꽃들이 핀 등을 내려 보며 지훈은 말을 삼킨다. 물어서 무엇을 상처받으려고. 너덜해진 채 본래 모습을 잃은 심장은 이제 작은 상처에도 터져 피를 흘렸다. 처음엔 나름 행복했던 것 같은데. 승철이 환한 얼굴로 인사하거나 후배 중에 지훈만 특별하게 아끼거나 생각나서 왔다며 치킨 상자를 흔들었을 땐 별 거 없는 손짓과 말투와 행동에 밤을 꼴딱 새며 달콤함에 절였었다. 풋사랑에 헛된 동경을 품었던 어렸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승철은 지독해서 다 보여줄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다 다른 사람에 붙어 애정을 속삭였다. 모르는 사람처럼 연락도 없다 몇날 며칠을 헤어진 연인이 재회하듯 온 몸으로 반겼다. 지훈이 군대 갈 땐 코빼기도 안 비추다가 첫 휴가 때 지훈을 찾아와 두 사람은 휴가 내내 모텔에서 살았다. 부모와 친구들의 연락에 폰은 쉴 새 없이 울었지만 지훈은 배터리를 분리했다. 지훈의 등을 건드리는 승철의 발에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시야에 걸리는 복숭아뼈가 탐스러워 그대로 깨물었다. 단내가 났다. 행복했다. 그래서 그 몸을 질리도록 안았다.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다음 휴가 때까지 승철에게서 연락 하나 없었다. 초조함에 공중전화기만 붙들며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음 휴가를 맞이해 찾아갔을 땐 늙어빠진 노인과 호텔을 들어가더라. 그랬다. 최승철은 이지훈에게 그랬다. 지독하게 굴었다. 매번 기대하게 만들고 상처를 선물로 줬다. 그리고 그 상처를 기대로 더 벌렸다. 그런 그를 사랑한다는 건 손톱사이에 박힌 가시처럼 날카로워 사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겁쟁이로 키웠다.

묻고 싶은 게 많다. 알고 싶은 건 그보다 더 많다. 보상심리다. 승철을 떠나보내고 나에게 주는 위로 선물처럼 받는 상처의 대가. 그러면 이 지독한 외 사랑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제 앞에 선 승철을 마주보면 지훈은 실패한다. 숱한 실패만 겪은 외사랑에 몇 백 번째인지 모를 실패딱지를 얹고 안겨오는 승철을 밀어내지 못한다, 않는다, 사랑한다. 피지 않는 내 꽃을 상상하며 남의 꽃을 꺾어 하얀 몸에 제 자취를 남긴다. 경고처럼 혹은 표식처럼. 지훈이 없는 승철의 세상에 나는 살아있다고 그렇게 아우성을 치면서.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피해 엉금엉금 기어간다. 신기루처럼 희마하게 보이는 오아시스를 찾아 허리통에 매단 물통을 들어 마시며 사막에서 익사라는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해도 좋으니 형 곁에만 있게 해 달라 승철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울며 빌었다.

 

 

점심이 끝나가는 시간에 동아리를 찾은 지훈은 둥글게 모여 떠드는 무리를 봤다. 두꺼운 책을 각자 들며 무어라 말하는 사람들 사이로 순영이 소파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와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벗어 반대편 의자에 앉은 지훈은 제 옆에 쌓인 책에 시선을 던졌다.

그거 우리 나온 책이야.”

지훈 앞에 서 있던 지현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맨 위 책을 한 권 집었다. [빵을 찢어먹었습니다]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이게 뭐야. 책이 곧 나올 거라는 걸 알았지만 제목은 알지 못했던 지훈이 풋 비웃었다.

동아리 회장이 빵 찢어먹다 쓴 거래. 누가 알면 굉장히 심오한 뜻이 있는 줄 알겠어. 별 거 아닌데.”

그러게. 동의했다. 도서관에 이 책이 꽂히고 이 책에 제목을 본 사람들은 심오한 뜻이 담긴 문학인 줄 알고 집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제목은 생각 없이 쓴 것이어라. 문창과에 걸맞은 창작동아리에 들어와서 역대 동아리 선배들이 지은 책을 보면 대부분 그랬다. 연인과 기념일을 암호처럼 지은 건 로맨틱하기라도 하지. [바퀴벌레를 때려죽일 때 쓰는 책]은 실제로 책 앞 뒤 표지에 바퀴벌레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괴팍한 동아리라고 했던가. 귀신이 출몰하는 음침한 동아리라고 떠들었던가. 수상한 소문과 괴짜 같은 사람들이 모여 시끄러운 동아리는, 맛있는 빵이 그려진 책을 올해도 냈다. 10명의 동아리 사람들이 창작한 작품을 모아 짠 단편집답지 않게 내용들은 우수했다.

제법 두께가 나가는 책을 펼쳤다. 책을 펴내며와 목차를 지나 일학년들의 패기가 담긴 단편을 빠르게 넘겼다. 넘기다 중간쯤 본 제 글엔 한 번에 몇 십장을 집어 넘겼다. 모두가 그렇듯 마감 날이 다가와서야 겨우 끝낸 글은 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순영을 포함해 선배들 모두 글이 예쁘다는 칭찬을 했지만 지훈은 창피함에 몸을 베베 꼬았다. 그 정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겸손하게 군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참을 수 없어 그냥 자기 글을 책에서 빼달라는 소리를 했지만 택도 없었다. 약간 너 죽고 나 죽자는 물귀신처럼 모두가 내빼려는 서로를 채찍질하며 원고를 마쳤다.

너 같다.”

승철이 원고에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책으로 나오면 좋겠어.”

계속 볼 수 있게.

마무리 점검으로 모여 서로의 원고를 돌려 읽던 날에 승철은 환하게 웃으며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훈뿐만이 아니고 동아리 멤버들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쏟았다. 승철은 동아리 회장이었고 이번 책 출판을 맡은 총책임자였고 문창과의 훌륭한 작가였다. 그의 칭찬에 다들 어깨가 남산처럼 높아졌다. 지훈은 승철의 원고를 기대했다. 유명한 작가의 글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이 그 사람이 최 승철이라면 지훈은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은근한 얼굴로 기대했다. 그러나 승철은 모든 원고를 다 읽고 수정할 부분을 가리키면서도 본인이 쓴 글을 끝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긴 냈구나. 아무도 승철의 원고를 보지 못했다 해서 동아리 회장 권력도 있고 하니 안 쓴 줄 알았다. 여태껏 빠짐없이 역대 동아리멤버들의 모든 원고를 책으로 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한 번에 제 원고를 넘기고 한참을 앞으로 넘기다 최승철 이름 세 글자를 봐서야 걱정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책을 덮었다. 벗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급하게 일어섰다.

어디가?”
.”

인사도 없이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자취방까지 올라가는 동산을 숨이 터지도록 뛰어 자취방 계단은 두 칸씩 밟았다. 마지막에 내려오려던 이웃과 부딪힐 뻔해 미끄러진 책을 고쳐잡았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그 사람이 잡을 새 없이 복도를 달려 맨 끝인 집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등 뒤로 닫히고 검은 방이 지훈을 반겼다. 신발을 던지듯 벗고 가방을 내팽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기하지 않아 집 냄새가 진했다. 지훈은 침대 이불을 들춰 그 안을 파고들었다. 완전히 몸을 감춰 머리 위까지 덮었다. 이불 안이 금세 데워졌다.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침을 삼켰다. 급한 호흡을 가다듬어 아까 펼친 페이지를 찾아 열었다. 최승철. 숨을 마셨다. 빨지 않아 체취가 남은 이불에서 승철의 냄새가 났다.

 

 

씻고나와 일부러 시야를 차단하고 마른 목을 축였다. 무거운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넣고 방을 괜히 한 바퀴 돌았다. 티비를 켜지 않아 방안을 도는 지훈의 발소리만 들려 방안이 나직했다. 자꾸만 침대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위로 올려 전 자취생이 남기고 간 야광별장식을 봤다. 달이 3개였다. 저 정도면 사람이 날아다니지 않을까? 중력이 세니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나는 상상을 했다. 나풀나풀 나는 사람들. 가장 높이 나는 사람은 그대로 우주로 날아갈 수 있으니 발에 줄을 묶고 그 끝에 돌멩이를 달았다. 발목을 잡는 줄에 사람들은 답답하지만 그대로 우주로 날아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보단 더 나으니 줄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지훈은 남들보다 유난히 추가 더 무거웠다. 하나는 부모님이 낳으면서 묶어준 돌멩이였고 하나는 승철이었다. 아무것에 묶이지 않았으면서 지훈의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떠나갈까 줄을 꼭 붙잡았다. 눈을 들었다. 세 개의 달이 가까이에 있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암스트롱처럼 달에 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깃발을 꽂고 기념사진도 찍자. 그런 상상을 하면 하늘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줄을 끊는 용기만 있다면 저 위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지훈은 한층 낮아졌다. 승철이 줄을 잡아당겼다. 지훈아. 멍들고 터진 얼굴로 눈물을 달며 지훈을 부른다. 지훈아.

침대 옆에 섰다. 이불 가운데가 볼록했다. 이불 끝엔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졌다. 이불을 아래로 내렸다. 잠든 승철의 얼굴이 나타나고 두꺼운 목과 깊이 파인 쇄골이 노출됐다. 지훈이 얼굴을 구겼다. 승철의 얼굴과 반쯤 드러난 상체가 엉망이었다.

늦은 밤에 문을 두들기며 자고 있던 지훈을 애타게 부르던 승철은 문을 열자마자 무작정 지훈에게 매달려 울었다. 불을 키려고, 달빛에도 보이는 젖은 승철의 얼굴이 장난 아니라서 뻗은 손은 무작정 부딪히는 입술에 막혔다. 여태껏 몸을 섞으며 나눈 키스와 달랐다. 여유롭게 지훈을 휘두르던 과거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지금 당장 키스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다. 놀라 뒤로 물러난 지훈을 쫓아가 지훈이 침대에 걸려 쓰러지면 그 위를 올라타 온몸을 맞대며 깊이 파고들었다. 혀뿌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혀에 속이 메슥거렸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뺨과 턱을 타고 목 뒤를 적셨다. 옷을 벗고 벗기고 급하게 자기 엉덩이에 지훈의 성기를 맞춘다. 그리고 무작정 허리를 낮춘다. 건조한 구멍이 끝도 못 들어가고 찢어졌다. 지훈은 성기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감촉에 놀라 승철의 허벅지를 잡았다.

안 돼, . 다쳐.”

상관없어.”

울음에 승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훈은 다시 앉으려는 승철의 허벅지를 꾹 쥐었다.

형 진짜 다친다구요.”

괜찮아. 너 때문에 아픈 건 참을 수 있어.”

꽃이 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왜 울어. 울면서 안기는 이유가 뭐야. 묻고 싶은 이유는 그 한마디에 모두 사라졌다. 울음을 토하며 들썩이는 승철의 허리를 잡아 내렸다. 비명이 터졌다. 승철이 지훈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지훈의 성기를 삼킨 승철의 엉덩이가 잘게 떨었다. 지훈은 우는 승철의 뺨에 키스하며 단단한 몸을 안았다.

.”

....지훈아..”

두 팔을 지훈의 목을 감싸 안으며 승철은 지훈에게 매달렸다. 자세를 바꾸어 거칠게 안을 헤집어도 지훈을 부르며 떨어지지 않았다. 울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목이 쉬도록 지훈을 부르던 승철이 낯설어서 자꾸만 그 얼굴을 훔쳐봤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지훈은 승철의 몸을 더듬었다. 온 몸이 열상이었다. 다행히 깊게 베이지 않은 얕은 상처였지만 손마디 정도의 긴 상흔도 있었다. 아물어 흔적만 남긴 위로 덧대어진 것도 있었다. 지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계속 보다간 참지 못하고 울 것 같았다. 이번엔 뭐 때문이야. 다치는 걸 세상 싫어하고 엄살도 심한 사람이 이번엔 왜 또 스스로를 상처 입혔어. 어째서 매번 이러는데.

아름다운 꽃일수록 가시가 많다. 그러니 조심해라.’

지훈의 옛 룸메이자 애인이 있었으면서 승철과 섹스를 했던 형이 지훈에게 해준 충고였다. 지훈이 승철이 돌아가고 이름과 과를 묻고 난 직후였다. 지훈은 귀담아 들었다. 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묘하게 자주 마주치는 승철을 경계했으니까. 그런데 틀렸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지훈이 아닌 승철이었다. 스스로 몰아붙여 끝내 가시 덩쿨을 목에 감아 피를 흘리는 사람은 승철 본인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지훈이 물은 적도 승철이 말한 적도 없다. 자해로 엉망인 몸을 꽃으로 덮는다는 것만 알았다. 처음 기숙사에서 보고 놀라 도망가다 두 번째 문을 열었을 때 작약이 핀 어깨를 손으로 더듬는 걸 봤다. 입술 끝을 살짝 올려 꽃을 내려 본 눈은 생기 없이 칙칙했다. 눈만 본다면 시들어 길가에 떨어져 신발에 짓뭉개진 죽은 꽃과 다를 바 없었다. 문고리를 놓쳤다. 그 소리에 승철이 고개를 돌렸다. 반쯤 걸친 와이셔츠를 급하게 올려 몸을 숨긴다. 지훈은 시선을 돌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나가려던 걸 승철이 불러 잡았다.

 

당신의 꽃이 내 몸에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몇 번이나 읽던 문장이 떠올랐다. 동아리서 낸 책 중 승철이 쓰던 글이었다. 자살하러 찾아간 바닷가 해안가에 선 주인공의 고독한 인생 고백이 주를 이루는 음울한 글이었다. 지훈은 승철이 밤에 울며 찾아올 때까지 몇 번이고 읽었다. 이불 속 공기는 장마처럼 눅눅하고 얼굴은 마른 눈물이 들러붙어 짠 기에 아팠지만 한 문장씩 뜯어 삼켰다. 과거도 현재도 없는 주인공은 바람처럼 형체가 불분명했다. 바다에 빠져죽지 않아도 주인공은 이미 죽어 없었다. 존재했으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흐르는 눈물이 땀과 섞여 시야가 불분명해질 때마다 승철이 보였다. 모래를 깨뜨리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지평선 저 너머를 보는 최승철을, 온 몸이 꽃으로 빽빽이 도배되어 파리하게 시들었다.

더럽고 추악한 이 몸에 당신의 꽃이 필 수 있다면 나는 지옥 같은 삶을 연명해도 기뻐 춤을 출 것입니다.

언젠가 탄생화를 물었었다. 잘 몰라 찾아보니 매화나무라 알려줬다. 승철은 지훈의 탄생화가 나무라는 것에 크게 실망했었다. 동물귀가 달렸다면 축 처져 땅바닥에 붙었을, 너무나 속상해 하던 얼굴에 지훈은 나무에 꽃이 필지 모른다며며 인터넷에 찾아 승철에게 보여줬다. 아담하게 피어 옹기종기 모인 꽃들은 꽃에 감흥 없던 지훈에게도 퍽 예뻤다.
예쁘다.”

승철은 핸드폰 모니터를 쓸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훈은 괜히 간지러워 뒷목을 긁었다. 그런 지훈을 보며 승철은 작고 귀여운 게 딱 이지훈이라며 한마딜 더해서 놀렸다.

그때는 설마 했다. 김칫국을 마시기엔 입이 너무 짰으니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 사랑해서 그런가봐. 조금 거리를 두면 보일지 모르겠는데 한참을 걸어 승철이 점이 될 때까지 멀어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형이 널 좋아한다면 둘 중에 하나야.’

외사랑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술 힘을 빌러 추하게 울고 일어난 다음날, 제 방이 아닌 순영이 방에서 깬 걸 알고 혀 깨물고 콱 죽으려던 지훈에게 꿀물을 주며 순영이 말했다.

지독하거나 못됐거나.’

 

 

강의를 듣고 돌아온 자취방이 텅 비었다. 그렇게 울며 매달려서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자고 있길래 혹시나 하며 급하게 걸어왔던 마음이 무너졌다. 모래로 지어 3초 만에 형태를 잃은 모래집은 먼지만 날렸다. 기침을 토했다.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상처는 쉬지 않고 늘더라. 만약 마음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거라면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을 거다. 세상 가장 상처받은 마음으로. 사람들이 불쌍하다 동정하고 박수치며 비결이 뭐냐 물으면 답은 오직 하나.

못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했습니다.’

발에 뭔가가 밟혔다. 종이었다. 몸을 숙여 종이를 들었다. 책에서 뜯겨졌는지 옆구리가 울퉁불퉁했다. 12포인트에 글자가 빽빽이 적힌 글을 보다 몸이 차가워졌다. 찬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돌아간 시선엔 문을 열고 들어온 승철이 서있었다.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지훈의 손에 든 종이를 보고 하얗게 질려서 문을 쾅 닫았다. 지훈이 급하게 달려 문을 열었다. 익숙한 복도만 눈에 들어왔다. 황망했다. 왜 또 도망가는데. 허탈감에 문을 닫았다. 주황색 조명이 켜지고 절망감에 내려다본 흰 용지에는 작은 글자들이 빛났다.

나를 사랑해주세요. 그 한마디가 뭐가 어려워서 나는 숨을까? 나는 발이 바닷물에 젖기 전까지 자문했다.

문을 다시 열었다. 완전히 나와 몸을 돌렸다. 문 뒤 벽에 달라붙은 승철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훈을 내려 보고 있었다.

형을 사랑해요.”

큰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꽃은 없지만 형의 상처를 다 덮어줄 수 있어요.”

원한다면 꽃을 그려줄게. 내가 원래 미술 쪽으로 가려던 사람이거든.

긴장에 주먹을 쥐며 농담 같은 진심을 던지다 안겨오는 승철의 어깨에 입이 다물어졌다. 가슴이 눌리도록 두 팔로 끌어안아 어린 원숭이가 엄마 원숭이에 매달리듯 강하게 안는다. 지훈은 두 팔을 들어 승철의 허리를 감쌌다. 울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말들은 입술을 맞대 입에 담았다. 모두 흘리지 않고 들을게요. 형의 고백을. 서로 뱅뱅 돌아 헛되이 보낸 삼년을 내가 다 보상할게요. 안아줄게요. 사랑할게요. 그러니 이제 숨지 말고 나에게 모두 보여줘요.

 

사막에 구름이 몰려든다. 그림자 없는 사막에 그늘이 생기고 뜨거운 기온은 서서히 내려간다. 하늘을 보고 지훈은 기어가는 걸 멈췄다. 얼마간 걸어 감각이 없는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지고 눈은 감겼다. 모래가 적당히 따뜻했다. 툭툭툭. 얼굴을 두들긴다. 눈을 타고 입술 사이로 흘러, 빗물은 달았다. 느린 빗소리가 서서히 빨라지고 곧 지훈은 비에 젖는다. 쓰린 피부와 목을 축이는 걸 넘어 사막에 빗물이 고인다. 무거운 몸이 떠올라 바람을 따라 흐른다. 사막의 동산을 타고 굴러 어지럽게 뱅뱅 돈다. 지훈은 눈을 꾹 감았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빠져 죽으리라. 따가운 빗물을 맞으며 급류를 따라 흐르던 지훈은 잔잔한 하류 어딘가 쯤에 멈췄다. 눈을 천천히 떴다. 여전히 내리는 빗 사이로 꽃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핀 정원이 반쯤 물에 잠겨 우뚝하니 서 있었다. 눈을 마주쳤다. 손을 뻗었다. 꽃이 지훈의 뻗은 손을 보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젖은 손이 뻗은 마른 손을 강하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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