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 ah하네요.
[우쿱] 시 본문
[우쿱] 시
w.안다미로
200ml 우유 주둥이를 뜯어 컵에 담는다. 미리 전원을 킨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담은 컵을 넣어 1분을 돌린다. 그 사이 식빵 1개를 꺼낸다. 갓 구워 따끈한 식빵 위로 어제 산 딸기잼을 크게 떠 바른다. 구석까지 골고루 바르면 슬라이드 치즈 한 장을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올린다. 땡. 알맞게 전자레인지가 울린다. 뚜껑을 열어 데워진 우유를 한입 마신다. 뜨겁지 않고 적당히 온기를 가져 좋다. 그대로 전자레인지를 끄고 옴폭 패인 그릇에 식빵을 옮기고 그 위로 우유를 붓는다. 원두커피를 내리듯 원을 그리며 부운 우유에 식빵이 젖어든다. 삼분의 이 정도 우유를 담은 그릇을 식탁에 옮기고 지난번 돈가스 시키고 닦아둔 나이프와 포크를 꺼낸다. 각각 왼손 오른손에 잡고 한입 크기에 맞춰 잘게 썬다. 칼이 나가는 길 따라 흰 우유가 들어왔다 빠진다. 단 딸기잼과 치즈비린내와 식빵의 고소함이 따뜻한 우유와 섞여 코를 간지럽힌다. 어제 저녁부터 먹지 않은 빈속이 참지 못하고 꼬르륵 재촉한다. 따뜻한 일요일 아침에 맞춰 여유롭게 아침식사 하려던 계획을 접고 네모나게 잘린 식빵을 급히 입에 담았다. 혀 가득 우유가, 씹을 때마다 딸기잼과 함께 흘렀다. 맛있어! 눈이 번쩍 뜨였다. 긴가민가했던 레시피가 훌륭했다. 제대로 즐기겠다고 산 백 프로 과일농축주스까지 입에 털었다. 달지만 새콤했다. 해님도 쉬는 완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먹을 거 갖고 장난 좀 치지 마요.”
“ ”
“애도 아니고 이게 뭐야.”
우유에 젖은 식빵 그릇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쉰다. 자다 일어나 바짝 마른 건조한 숨이 그릇 겉을 따라 훑는다. 승철은 나이프와 포크를 꼭 쥐었다. 지훈은 위로 향해 선 포크와 나이프를 힐끔 보곤 빈 우유 곽을 집었다. 싱크대에 서서 물을 틀어 씻는 뒷모습에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자기가 마신 음료수 캔을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책상 위에 쌓는 놈이 일부러 보란 듯이 그러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며칠 째 쌓인 서운함, 실망, 짜증, 불쾌가 따뜻한 아침에 가라앉다 다시 떠올라 부풀었다. 그대로 식빵을 던질 기세로 그릇째 들던 승철은 우유 곽을 털고 몸 돌린 지훈에 멈췄다. 드느냐 흔들려서 넘쳐 식탁에 쏟아진 우유와 그릇을 든 승철을 차례로 보던 지훈이 그대로 곽을 뒤집어엎고 부엌을 나섰다. 제 옆을 쌩 지나치는 작은 인영에 뒤통수를 노려봤다. 얼마 전 차분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13시간이나 자느냐 눌려 너저분했다. 어딘가는 반질반질해서 정말 꿀잠을 잤구나, 비웃듯 올라간 입술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더러운 새끼. 아까 마주보던 얼굴엔 베개자국이 선명했다. 나쁜 놈. 자꾸만 욕이 쏟아졌다.
그릇을 내렸다. 더럽고 나쁜 놈에게 던지기엔 식빵이 아까웠다. 딸기잼도. 치즈도. 우유도. 좋은 걸로 먹겠다고 전시된 제품 중에 비싼 걸로만 사서 더 그랬다.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지? 음~ 맛있어. 우유가 덜어졌지만 촉촉한 식빵의 단내가 바닥을 찍던 승철의 바이오리듬을 높였다. 절로 나오는 콧노래에 어깨를 들썩였다.
%^&*&%##& 시끄러운 소음이 승철의 등을 덮쳤다. 예민한 귀에 걸린 소음 따라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소파에 늘어진 지훈이 티비를 틀었다는 걸 알았다.
“소리 죽여라.”
정적인 아침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했던 부탁은 더 높인 음량에 묻혔다. 승철이 이를 악물었다.
“이지훈. 소리 죽여.”
아 반칙!! 옐로우 카드입니다!! 흥분한 해설가의 높은 음성에 심판 뭐야~ 지훈이 투덜거린다. 승철의 이마에 교차로 마크가 두 개. 승철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일요일이다. 오늘은 일주일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꿀 같은 휴일이야. 마음을 다스리며 식빵을 찢어 입에 담았다. 촉촉한 식빵은 못 견디게 달았다. 네, △△△선수 달려갑니다. 포크를 찍었다. 수비수 둘을 뚫고 왼쪽으로! 젖어 담기는 대로 뜯어지는 식빵사이로 쨈이 떨어졌다. 가슴으로 네- 골인일까요. 쨈을 포크로 건져 식빵에 올렸다. 골...골...골..!! 우유가 뚝뚝 떨어지고 쨈은 참지 못하고 가출해 승철의 바지에 떨어졌다. 골입니다!!!!!
“그렇지!!!”
우유가 이새로 찍 터졌다.
끼이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반 남은 그릇을 싱크대에 던지듯 쏟았다. 그릇이 요란하게 뒤집어졌다. 큰소리에 쳐다보는 시선을 모른 척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 옆으로 슈퍼 갔다 온다고 쓴 모자와 지갑을 챙겼다. 모자를 탁탁 털고 우악스럽게 뒤집어썼다.
“어디가요.”
물고기 보러가자. 물고기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아쿠아리움을 가서 물고기를 보자.
“형.”
아니면 꽃구경도 좋고. 이른 봄에 매화가 창덕궁인가 경복궁에 꽃이 활짝 열렸다지.
“승철이 형.”
신발을 접어 신고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 공기가 물러가고 더운 낮 공기가 반겼다. 승철은 모자를 고쳐 썼다.
“너 없는 대로 간다.”
닫힌 문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눈가를 찌푸리며 혀까지 내밀었다. 이지훈. 나쁜 놈. 못된 새끼. 티비랑 둘이서 아주 잘 놀아라. 나는 봄이랑 데이트를 하련다. 흥.
△월 △△일. 최승철과 이지훈의 냉전이 1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 대리님 어디 아프세요?”
파티션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모니터에 시선을 두던 승철이 눈을 치켜떴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최사원의 걱정서린 얼굴이 대각선 파티션 위로 보였다. 텀블러를 든 채 내려다보는 얼굴을 마주보며 이 대리는 예의 그 순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봐봐. 식은땀도 나잖아요.”
땀에 젖은 이마로 뻗는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뺀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무 이상 없어요. 단호한 말투에 최사원은 뻗다 멈춘 뻘쭘한 손을 거뒀다. 가서 일 보세요. 틀었던 몸을 바로 하고 의자에 고쳐 앉은 이 대리에 최사원이 물러간다. 승철은 종료된 상황에 치켜뜬 눈을 내렸다. 보느냐 멈춘 타자가 조금씩 빨라졌다.
“저 과장님.”
얼마안가 작은 목소리가 방해했다. 승철은 아랫입술을 잘게 물곤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 이 대리 옆에 붙었던 최사원이 승철 앞에서 텀블러를 두 손으로 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무슨 일이죠?”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이 대리님 아프신 것 같아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봐도 좋지 않아서...”
최 사원 따라 쫓아간 시선에 이쪽을 보는 이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이대리 아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데요?”
최 사원을 향해 말했다. 날카로운 말투의 승철과 단호한 이 대리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모르던 최사원은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사라졌다. 기죽어 작아진 최사원의 등을 동기인 박사원이 두들긴다. 괜찮아. 눈치 보여 속삭인 목소리가 작았다. 승철이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사무실을 둘러봤다. 원래 이렇게 조용했던가, 싶을 정도로 사무실이 고요했다. 평소엔 좀 더 활기차고 밝았던 것 같은데 쥐 죽은 듯한 사무실에 의문이 들었다. 고개 숙여 정수리만 보이는 가운데 키보드 치는 소리와 마우스 소리, 펜을 꺼내고 넣는 소리만 귀에 들렸다.
야.
가까운 오른쪽에서 정한이 음소거로 승철을 불렀다. 보지 않은 척 무시하며 내린 시선에는 모니터 한쪽에서 반짝거리며 작은 창이 승철을 불렀다. 윤천사라 적힌 창이 톡톡톡 연이어 울어 화면 위까지 금세 찼다. 질긴 놈. 승철은 저를 보며 히 웃는 정한을 노려보곤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싸웠냐?]
세 글자에 얼굴이 팍 구겨졌다.
[아니]
무시하려다 읽었다고 숫자가 사라지자마자 테러하는 정한에 짧게 답했다.
[싸웠네]
[아니거든?]
즉답에 정한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웃지 마]
[일해]
[일 더 얹어주기 전에.]
과장의 권력을 사적인 것까지 휘두르는 취미가 없지만 지금은 진심이었다. 연달아 세 개를 보냈고 톡을 껐다. 화면이 반짝거렸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우는 소리거나 놀리는 거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윤정한이 이러는 이유랑 회사 분위기가 왜 이러는지 너무 잘 알아서 가슴이 턱턱 막혔다. 티를 안낸다고 노력했는데 남들 눈에는 다 보이는지. 승철은 제 공적인 일부분까지 영향 받는 원인을 흘겼다. 무얼 하는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정수리가 얄미워 자꾸만 마음이 뾰족했다.
“이 대리. 오전에 시킨 보고서 다 됐습니까?”
드높인 목소리에 미어캣처럼 다들 우루루 고개를 올린다. 이대리만 고개 숙인 채 잠깐 말이 없다 네, 대답했다.
“갖고 오세요.”
이 대리가 보고서를 가져올 동안 승철은 쓰다 멈춘 제 보고서를 눈으로 훑었다. 형식이 엉망진창이었다. 딴 데다 신경 팔려서 그렇지. 세 시간이나 붙잡았던 보고서를 미련 없이 지우고 새 화면을 띄웠다. 순백의 용지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지훈, 제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얇은 입술을 앙 다물고 고집 있는 눈으로 저를 보던 얼굴이 선명해졌다 흐릿해졌다. 이지훈 개새끼. 지훈의 이마에 여섯 글자를 썼다. 깜박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다 세 글자를 지우고 싸가지라 고쳤다. 지훈의 눈꼬리가 높이 솟았다. 제 이마 쪽으로 눈동자를 올리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씩씩 화를 냈다. 뭘 잘했다고 성질이야. 승철은 입을 삐죽이며 손을 놀렸다. 나쁜 놈. 고집불통. 독한 새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평생 혼자 잘난 맛에 살 놈이지, 네가. 흥. 평생 혼자 살아라. 지훈의 얼굴이 점점 새카매졌다.
“과장님. 부탁하신 보고서입니다.”
깜짝이야.
한참 집중하던 승철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 옆에서 이대리가 서류를 두 손으로 내밀고 있었다. 헉. 절로 터지는 소리를 입을 꾹 다물어 삼키곤 보고서를 받아 펼쳤다. 보고서를 훑는 동안 심장이 계속 콩닥콩닥 뛰었다. 천상 체육인같은 튼튼한 겉모습과 달리 승철은 작은 것에 잘 놀랐다. 놀이기구는 발도 못 들이고 초파리에도 혼비백산했다. 제가 아까 이 대리를 불렀던 것도 까먹고 애인 욕에 집중하던 승철이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죄 짓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어쨌든! 발소리 좀 내고 다니지. 지가 닌자야 뭐야. 심술에 한마디 하려 보고서에서 고개를 들던 승철은 제 모니터에서 저를 옮기는 이 대리의 시선에 잠시 넋을 놓다 싱긋 웃었다.
“보고서가 엉망이네요.”
이 대리의 얼굴이 딱딱해진다.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란 말입니다.”
승철은 보고서를 이 대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시하세요. 오늘까지.”
보고서가 구겨진다. 오전 내내 바치고 오후까지 끌고 와 겨우 마쳤던 보고서가 오늘 안에 끝날리 없지. 더욱이 퇴근시간까지 겨우 2시간 남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부족한 건지 다정하게 알려주는 평소와 달리 별말 없는 승철에 이 대리는 목례를 하고 본인자리로 돌아갔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계절감 없이 겨울용 정장을 입은 이대리 뒷목이 반짝거렸다. 미련한 놈. 모두가 재킷을 벗고 누군가는 반팔 와이셔츠 차림으로 있는데 혼자 꿋꿋하다. 승철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훈의 눈코입까지 까만 글씨로 엉망인 가운데 턱만 하얬다. 키보드를 눌렀다. 자음과 모음이 연속으로 이어져 단어가 되고 한 문장이 됐다. 완벽하게 꽉 찬 지훈의 얼굴을 인쇄했다. 한 장의 프린터는 승철의 손에 곱게 올려졌다. 18포인트에 정자로 빽빽한 용지를 말없이 내려 보다 접어 가방에 넣었다. 버리기엔 미련이 남았다. 화면에 띄어진 한글 삭제만 순식간이었다.
그 회사를 보려면 탕비실에 붙은 배달메뉴를 보라했던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던 글이 갑자기 생각났다. 너무 공감돼서 눈물을 좀 흘렸던 것 같다. 승철은 치킨 쿠폰 열 개가 사라져 텅 빈 벽보를 보며 눈가를 비볐다. 진행속도가 더딘 프로젝트가 끝이 보일 때라 그런가. 최근에 야식이 일상화됐다. 갓 들어온 일개월차 막내사원부터 회사에 기생하는 부장까지 어느 누구건 관계없이 회사에 꼼짝없이 묶여 매달리니 남은 건 식성밖에 없더라. 하나가 보이면 두 개가 터지고 두 개를 수습하면 네 개의 문제가 생겼다. 과장이 된 지 이제 일 년 된 승철이 혼자 수습하기에 벅찰 정도였다. 유능한 직원들이 없었으면 진작 뻗었을 것을. 승철은 퀭한 몰골로 일을 하는 사원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프로젝트 끝마치면 내가 회식 거하게 쏠게요. 그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좀 그랬다. 그것만 남으면 그래도 나은데. 애인과 동거한지 이제 두 달된 승철은 집에 가고 싶어 좀 먹을 지경이었다.
동거가 두 달. 연애가 육 개월이었다. 연애기간에 비해 동거를 빨리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삼십년이 넘었으니까. 좋아하는 빤스 취향부터 야동취향까지 부모님은 모르는 것도 다 이는 일명 ‘불알친구랑 연애’가 승철과 애인의 연애사였다. 코찔찔이부터 사춘기, 군대까지 서로 함께였다.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싫은 티를 내며 장난쳤던 불알친구와 연애를 하기 까지 참 많은 굴곡과 오해가 있었지만 연애 후는 번갯불에 콩 볶듯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한번 붙은 불은 쉽게 타올라서 포옹도, 키스도 섹스도 사랑한 만큼 부대꼈다. 그리고 동거. 추우 겨울 대한파가 대한민국을 습격한 날. 꽁꽁 언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넣고 집에 데려다준 애인, 지훈이 집 앞에서 무드 없이 프로포즈를 했다. 얼어 뻣뻣한 손으로 은색 심플한 반지를 승철의 네 번째 손가락에 껴주며 얇은 입술을 웅얼거리며 함께하자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함께하자인지 함께 살자 인지 지금도 헷갈릴 만큼 지훈의 입술은 추위로 얼어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목도리에 파묻은 얼굴이 주황등으로 가려지지 않을 만큼 붉어서, 승철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좋아해! 이지훈! 부끄러운지 모르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방방 날뛰며 지훈을 끌어안는 승철을 밀어내지 않고 허리를 안은 지훈의 얼굴에 좋다고 뽀뽀세례를 퍼붓던 과거는 먼 옛날처럼 아득하고 승철은 애인이 고파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야근으로 데친 파처럼 늘어진 사원들이 안타까워 회사 옆 커피점에서 산 커피와 간식거리를 일일이 전해주며 어깨를 두들겼던 승철이 이대리 책상 뒤에서 멈췄다. 익숙한 체향에 몸이 먼저 반응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재촉하다가 책상 위에 시선이 뺏겼다. 안 그렇게 생겨서 정리엔 젬병인 이대리 책상은 아비규환이었다. 모니터엔 휘갈겨 쓴 메모가 덕지덕지 붙었고 서류는 동산을 이뤘다. 그 옆으로 펜들이 늘어져있어 펜 잡다가 툭 건들면 서류가 눈사태처럼 우루루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약봉지. 승철이 미간을 구겼다. 약 안 먹었지. 퇴근 시간에 따로 불러 손에 쥐어줬던 약이었다. 미운 건 미운 거고 걱정된 건 걱정되는 거라 한 대 콱 쥐어 패고 싶은 애인에게 집 가서 먹고 자라고 준건데. 애인은 약을 뜯지 않았고 야근도 했다. 땀에 젖어서 엉망인 채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만 유쾌했다. 미련한 놈. 약도 안 먹고 야근까지 하면 돈을 더 벌어? 그 상태로 일하면 누가 알아준대? 어? 그래. 내가 아픈가, 지가 아픈 거지. 욕을 하며 흥 고개를 돌렸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저만큼이나 튼튼한 놈이 저렇게까지 땀을 흘릴 정도면 정말 많이 아프다는 건데. 걱정되어 묻고 싶어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속만 엉망이었다. 그 상태로 야근하니 일은 전혀 진전이 없어 시간만 버린 승철은 회사 옥상에서 정신을 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그란 달 주변에 왜 별이 없을까 따위를 생각하며 내일 스케줄을 차례로 떠올려보는데 어느 것도 머릿속에 남지 않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정한이 건넨 담배에 불붙일 생각도 못하고 끝만 씹은 승철이 하얗게 속을 토했다.
“땅 꺼지겠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냐.”
“정하나.”
“왜. 승철아.”
“지훈이 보고 싶어.”
“밑에 이 대리 있잖아?”
정한이 바닥을 가리켰다. 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이 대리는 다른 사람이야. 내 애인 아니야.”
정한이 깔깔 웃었다.
“24시간 매일 볼 수 있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인제 이제 이 대리, 이지훈 구분하며 좋아하냐?”
“내가 멍청하지. 어르신들 말이 틀린 게 없어.”
“뭐가?”
“부부는 가끔 봐야 한다는 거.”
얼씨구. 정한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24시간 매일 보니까 싸우기만 하잖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직전에 사인하고 온 터라 볼펜 잉크냄새가 났다. 나 무슨 서류에 사인하고 왔더라? 모니터 빛에 질린 하얀 얼굴을 훔쳐보느냐 정신이 팔려 기억이 안 난다. 부장한테 걸리면 엄청 깨질 텐데. 윽.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냥 네가 사과해.”
“싫어.”
“그럼 말고.”
이씨. 정한을 흘겼다. 아직 쌀쌀한 밤바람에 정한의 머리가 날렸다. 귀밑까지 기른 머리가 버섯처럼 볼록해진다. 얼굴이 안 잘생겼으면 안 어울리는 스타일이 외모 덕에 살았다.
“그만 봐. 뚫려.”
“네가 내 애인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더 좋았을 걸? 나 다정하잖아.”
“지훈이가 더 다정해.”
정한이 몸서리를 쳤다. 그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너 방금되게 재수 없었어. 알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과하기 싫어.”
사과는 제가 아닌 지훈이 해야 할 몫이니까.
오늘로 14일 째 되는 두 사람의 긴 냉정은 별거 아니었다. 아니 별 거 아닌 건 지훈의 의견이었고 승철에겐 별거였다. 그래서 싸웠다.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왜 별 게 아니야? 형은 왜 별 거 인데요? 언성이 높아지고 두 사람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치고받았던 치밀한 대화는 끝을 내지 못하고 찢어졌다. 알던 시간동안 숱하게 싸웠고 서로를 잘 알았음에도 이렇게까지 팽팽하게 맞선 적이 처음이라 승철은 크게 놀랐다. 그땐 친구였고 지금은 애인이라서 그런가봐. 이지훈은 잘 알았는데 여보야는 잘 몰랐다. 형아 하며 뒤를 쫓아다니던 그 이지훈이 갑자기 개명한 것도 아니고 다른 인격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랬다. 연애하는 이지훈은 낯설고 어려웠다.
‘형은 진짜.’
머리를 마구 손으로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던 지훈의 표정이 살면서 처음 본 것이라 그 날 밤 동거하며 처음으로 따로 잔 승철은 외로운 옆자리에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이 약한 지훈을 깨우지 않고 혼자 출근한 승철을 지각한 지훈이 사과한마디 없이 입을 다물면서 이 긴 냉전은 14일을 맞이했다. 집에선 대화가 사라졌고 일터는 전쟁이었다. 두 사람은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그 사이 은근하게 나눴던 스킨십은 꿈도 못 꿨다. 매일 볼 수 있다고 좋았던 것이 엄청난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매 순간 피부로 느꼈다. 차라리 안 보고 시간이 약이다 생각하고 기다리면 풀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질 못해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억울하고 분해서 가끔씩 훅 치고 올라오는 속상함에 가만있을 수 없어 한마디씩 속을 긁는 소리를 자꾸 해서 두 사람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사과를 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었다. 지훈이 잘못이라기 보단 내 잘못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이 강했다. 이십년 이상을 지훈에게 졌으니까 이번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말이 이십년이지 무려 삼십년이 넘었다. 열손가락이 접히고 펴졌다 다시 접힐 만큼 오랜 시간을 승철은 지훈을 짝사랑했다. 처음으로 이사 간 낯선 도시에서 저보다 작았던 지훈을 처음 만난 날부터 마음을 뺏겨 로봇처럼 살았다. 지훈이 하자하면 하고 싫으면 싫었고 좋으면 좋았다. 지훈이 명령하면 승철은 움직였다. 지훈이 입을 다물면 승철은 숨죽였다. 형아- 하고 앞니 빠친 채로 씩 웃는 얼굴이 너무 해로워서 가끔 울기도 했다. 그 때마다 지훈은 갑자기 우는 자기보다 큰 승철의 등을 그 작은 손으로 위로했다. 형아- 울지 마- 응? 울지 마- 어린애들은 옆에서 누가 울면 같이 울어서 지훈의 말간 얼굴도 울렁이다 왕 하고 터졌다. 통통한 볼과 코가 빨개지고 눈물은 마구 쏟아져 엉망인 얼굴에 승철은 더 미안해서 지훈을 꼭 끌어안으며 울었다. 미안해- 지훈아. 입에선 연신 용서를 구하는 말만 쏟아졌다. 너를 울려서 미안해. 부모가 와서 안아줄 때까지 그렇게 울었다.
그때부터였던가. 승철은 지훈이 울면, 슬프면, 우울하면 미안해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다 내 탓 같았다. 내가 너를 좋아해서, 사랑해서 미안해. 내가 친구라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라서 미안해. 그게 버릇이 돼서 이 지경이 된 것 같아. 절대 꿈조차 고통이라 맘 편히 펴보지 못한 애심을 노래처럼 지훈의 귓가에 속삭여도 괜찮은 지금에 나는 왜 그럴까 밤새 뒤척이던 고민의 답은 결국 그거였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베개만 들고 거실에 나갔던 지훈의 등을 발로 찰걸. 일부러 맛없이 한 반찬을 꾸역꾸역 먹던 지훈의 멱살을 잡을걸. 같이 출근하는 승철의 차를 타지 않고 버스 타던 지훈에게 크게 화를 낼걸. 그 때 만든 우유 젖은 식빵을 던질걸. 가출하고 집에 바로 돌아오지 말걸. 약을 주지 말걸. 후회만 열일곱 바구니였다. 속을 살살 긁는 얄미운 이지훈을 확 긁었어야 했는데 막상 그 앞에선 아무것도 못했다. 아픈 지훈을 모른척하고 가출하는 저를 부르는 지훈을 무시하고 야근하는 지훈의 등을 못 본 척한 게 최대한의 복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훈 앞에서 가루처럼 부서졌지. 거실에서 베개만 베고 자는 지훈을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새벽마다 살피고 밥을 챙기고 약을 챙기고 비록 듣진 않았지만 퇴근을 허락해줬고 가출은 1시간 만에 끝.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래. 누가 말했는지 모를 명언은 오늘도 몇 번이나 승철의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보고서를 펼쳤다. 아픈 몸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끝에서 두 번째로 퇴근한 지훈이 넘긴 보고서였다. 결코 오늘 안에 끝낼 수 없는 보고서를 마지막까지 훑으며 승철이 헛웃음을 삼켰다. 아주 지랑 똑 빼닮았네. 얄미운 만큼 완벽했다.
모두가 퇴근하고 남은 사무실을 확인하고 나온 승철은 가는 길에 소주를 샀다. 분명 오늘 마시면 내일이 엉망일거라는 걸 알았지만 사지 않고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친구였을 때조차 지훈에게 꼭 붙었던 승철이 14일 째 지훈과 냉전중이니 애정의 배터리가 붉은 빛을 깜박이며 경고음을 울렸다. 이러다 방전하면 죽을 거야. 몰리고 몰려 절벽에 선 승철은 결국 또 지기로 했다. 죽어서 지훈을 못 보는 것보단 살아서 보는 게 좋지. 이지훈 그 나쁜 놈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고개를 젓겠지만. 생각하면 속이 활활 타오르고 쓰리지만 최승철은 이지훈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소주를 깠는데 막상 집 문 앞에 서서는 한 발자국을 떼지 못했다. 회색 철문이 뭐가 무섭다고 손이 벌벌 떨려, 술을 너무 마셔서 수전증이 오나봐 허허 웃어넘겨도 문고리 하나 잡지 못했다. 소주를 더 마실까.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시계바늘이 위험한 시간대로 향했다. 지금 안자면 다음날 개 망할 시간이었다. 하. 몸을 기울여 문에 기댔다. 금속의 찬기가 몸을 타고 뼈를 갈랐다. 추워. 콧물이 찔끔 나는 것 같아 그 핑계로 도어락을 열었다. 서로 생일을 더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긴장하며 들어간 거실은 고른 숨소리가 가득 찬 채 어둡게 반겨 승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현관 주황등이 불청객처럼 눈치 없이 빛났다. 힘없이 신발을 벗었다. 툭툭 벗겨진 구두처럼 아무렇게나 발을 뻗으며 걸어가 소파 옆에 주저앉았다. 이불을 덮은 지훈의 얼굴이 편안했다. 눈치 없던 불청객이 사라지고 달빛이 그리는 얼굴이 도자기처럼 매끈했다. 색색 느리게 뱉는 숨소리가 컸다. 주저앉아 무릎에 두 손을 올린 채 살짝 벌어진 지훈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철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약 먹었어, 안 먹었어.”
반응이 없다. 발뒤꿈치를 들어 입술을 부딪혔다.
“안 먹었지, 응?”
오뚝이처럼 일어선 몸을 다시 발에 힘을 주어 몸을 숙이곤 진하게 입술을 맞댔다.
“싸가지 없는 놈아. 형 말 맛있게 씹을래?”
감은 두 눈이 얄미워 눈두덩에 쪽쪽 뽀뽀를 했다. 그대로 들었던 고개는 두 손에 막혀 멈췄다.
“술 마셨지.”
느릿하게 뜬 눈이 또렷하다. 역시 안 잘 줄 알았어. 승철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애인이 속 썩여서 마셨다, 왜”
“허 참. 누가 누굴 속 썩여. 형이 나를 속 썩였지. 말 안하고 가출하고 무시했잖아.”
“네가 나를 아니고? 내가 너를?”
“형이 나를.”
거짓말 치지 마. 그 말은 닿은 입술에 뭉개졌다. 건조한 입술이 촉촉하게 젖었다. 뒷머리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짜릿해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둥근 혀에 매달렸다.
“나 형한테 안 미안해요.”
입술이 떨어져도 눈을 감은 승철의 얼굴을 쓸며 지훈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데 형 좋으라고 마음에도 없는 빈말하기 싫어. 더 이상 거짓말하기 싫어요.”
“그냥 빈말해. 난 그것도 좋아.”
14일 냉전동안 지훈을 맘껏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아. 중얼거림은 입술을 앙 무는 지훈에 닫혔다. 아파. 혀끝으로 물린 입술을 달랜다. 다정해서 승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란 시선에 따듯한 눈동자가 승철을 올곧이 올려다봤다.
“무서워요?”
안심하며 풀어지는 얼굴에 지훈이 묻는다. 지훈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승철이 말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입술이 닿았다. 지훈이 허리힘으로 상체를 일으켜 승철을 잡아끌어 제 다리위에 앚혔다. 고된 하루가 묻은 양복이 농도 짙은 키스에 구깃구깃 접혔다. 숨을 빼앗듯 혼을 홀리듯 열정적인 키스에 몸이 녹는다. 노곤한 손가락을 기어 지훈의 어깨를 쥐었다. 얇은 티 아래 몸이 뜨거웠다.
“너 열...”
하루 내내 아팠던 게 떠올라 밀어낸 몸을 지훈이 두 팔에 힘을 주어 강하게 안는다.
“형 때문에 그래. 젠장. 형을 얼마 만에 안는지 알아요?”
재킷을 벗기고 셔츠단추를 풀어 파고드는 손에 소름이 돋았다. 귀를 혀로 적시며 으르렁거리는 지훈의 낮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늘어진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지훈아.”
귓불을 잘근잘근 씹는 날카로운 이에 떨었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하지 마요. 이건 형도 나도 잘못 없으니까.”
우린 그냥 너무 사랑했을 뿐이야.
몸이 넘어간다. 티를 벗고 승철의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지훈의 얼굴이 익숙하다. 처음 몸을 섞은 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울면서 안았던 그 때같이, 벌벌 떨며 손을 맞잡으며 고백한 날 시간이 결코 약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절절하게 깨달으며 밤의 주인에게만 고백했던 진심이 닿았던 그 날처럼 달빛에 그려진 지훈의 얼굴이 선명해서 승철은 다리 사이를 가르며 밀고 들어오는 지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응...! 훈아..!”
갈구하듯 내민 두 손을 깍지 껴 잡는다. 단단히 얽힌 열손가락 사이로 쉬이 꺼지지 않은 애심이 들끓으며 손목을 타고 흐른다. 단단한 손목과 여린 안쪽 살을 깨물며 지훈은 제 이름을 부르는 승철을 안았다. 밤의 주인이 따뜻한 봄꽃에 스르르 녹아 흐르도록 밤새 빌어야 하는 말들로 가득 서로를 적셨다.
+리퀘내용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박준- 지금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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