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woo, ah하네요.

[우쿱] blue (for.유삼님) 본문

텍스트

[우쿱] blue (for.유삼님)

다몬드 2016. 12. 11. 03:49

 

 

[지훈승철/우쿱] blue

 

for. 유삼님께

 

 

 

 

 

 

그런 사람이 있다. 마주치기만 해도 발끝에 잠들던 피곤을 머리끝까지 올리는 사람. 100m 밖 사람이 점으로 보이는 먼 거리에 저 멀리서 검은 머리가 보이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게 만드는 사람. 사라져 빈 공간에 제 냄새를 남기고 손톱 같은 달 하늘 아래서 수많은 검은 무리에 섞여 지나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기분 좋은 만큼 커진 웃음소리로 신나게 뛰어다니는 발걸음 그 하나하나가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지치게 만드는 그런 사람. 그 사람을 비유한다면 하늘 위 떠오른 해다. 붉게 타올라 무언가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것을 발산하며 행복을 전한다. 눈이 부시도록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에 무너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툭툭.

짧고 두터운 손가락이 책 위를 부지런하게 날라 다니는 손등을 건든다. 공부하다보면 묻기도 하는 볼펜 잉크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손가락 끝이 길면 다친다며 손톱을 짧게 깎아 둥그스름했다. 지훈은 손가락을 손등으로 밀었다. 내쫓고 다시 돌아온 손등을 따라 손가락도 따라와 이제는 손목 연결부위를 좌우로 만지며 집요하게 군다. 지훈은 귀찮게 구는 것을 손으로 쳐 밀었다. 샤프를 잡았던 터라 손가락에 걸려 있던 샤프가 반동으로 흔들리며 방해꾼인 손가락을 찔렀다. 날카롭게 잘린 샤프심에 찔린 손가락이 움츠러들고 사라진다. 책 몇 권과 연습장, 아가미를 벌린 필통으로 점령된 독서실 책상이 온전해진다. 그것에 만족을 하며 샤프를 고쳐 잡았다. 몇 번이고 풀어 울퉁불퉁한 종이 위로 지렁이 여러 마리가 꿈틀거리며 태어났다.

지 훈 아

손가락이 떠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친구를 데리고 와서 방해질이다. 제 손에 쥔 것에 색만 다른 기다란 놈이다. 이를 짧게 빼고 꼬부랑이 글자가 뛰어노는 하얀 들판 끝에 자국을 남겼다. 지훈은 못 본 척 했다.

이 지 훈

그 아래로 세 글자가 더 써졌다. 그리고 그걸 보라며 샤프 머리로 지훈의 손을 두들긴다. 지훈은 지훈아이지훈두 개를 까만 심으로 새카맣게 덮었다. 까맣게 지워지는 글씨에 손등이 찔렸다. 뭉툭한 손끝과 달리 창처럼 뾰족한 샤프 끝이었다. 지훈은 두 개를 완전히 지우고 나서야 손을 치웠다.

배 안고파?

점심 먹은 지 겨우 2시간 지났다. 이제야 내용물이 소화되고 각 세포에게 전달된 상태다. 고프지 않은데 음식을 넣고 싶진 않다. 지훈은 대답대신 글자 위를 또 칠했다.

음료수 마실래?

바람 쐬러 나가자.

머리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지.

지훈아.

지훈.

.

위에서 아래로 못난 글씨들이 길을 만든다. 그 위를 까맣게 덮었다. 하얀 들판에 검은 돌길이 생겼다. 퐁당퐁당. 물러가지 않은 장대 놈이 그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무시하고 책에 집중하려 하지만 시야 구석에서 깐죽대 계속 걸린다. 아예 몸을 지훈에게로 돌려 다리를 지훈이 앉은 의자 받침대에 올리고 팔뚝을 잡고 매달린다. 결국 지훈은 샤프를 쥔 승철의 손을 주먹을 쥐며 손으로 꽉 눌렀다. 갑작스런 공격에 승철 손바닥이 엎드려진다. 크고 까만 눈은 동그라미가 됐다가 세모가 됐다.

나가자.’

손은 못 움직이니 입술을 달싹인다. 못 알아들을까 봐 또박또박 천천히 무음으로 말한다.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지훈의 손아래 눌린 손바닥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집 가자.’

손을 뗐다. 납작 엎드려있던 손바닥이 벌떡 일어나 지훈의 손을 감싸 당긴다. 앉은 의자가 흔들리고 지훈의 엉덩이 일부가 의자에 벗어났다.

집 가서 자자.’

더 본인 쪽으로 잡아당긴다. 칸막이만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빈틈없이 시야에 꽉 찬 해맑은 얼굴이 아찔하다. 얼핏 풍겨오는 페르몬에 지훈은 눈을 감았다.

 

 

야 저 사람 그 형 아니냐?”

저문 해를 보며 오늘 하루도 잘 견뎠구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던 지훈을 옆에 있던 동기가 팔꿈치로 지훈의 옆구리를 찌른다. 제 감상을 깨뜨린 접촉에 짜증을 담아 손으로 터는 지훈을 아랑곳 않고 커피 잔을 든 손으로 보라며 저 쪽을 가리킨다. 뭔데, 그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쌀쌀해진 날씨에 흔히 보이기 시작한 청남방과 가디건을 걸친 두 인영이 얽혀 왁자지껄 길을 걷고 있었다.

맞지?”

지훈이 본 것을 확인하고 허리를 숙여 지훈의 귀에 맞춰 입을 가까이 하며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인다.

아 좀 붙지 마.”

옆으로 몸을 피했다.

뭐 내가 얼마나 붙었다고 그러냐. 귀에 닿은 것도 아닌데.”

유난이라며 입을 삐죽인다. 그래봤자 귀엽지도 않다. 짜증만 늘 뿐.

그래서 그 형 맞지? 유아교육과 이학년.”

삐진 건 삐진 거고 궁금한 게 커서 다시 묻는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시험 준비를 하다 맑은 공기를 쐬자는 동기의 제안에 도서관 밖으로 나와 휴게실에서 산 음료수를 손에 쥔 지훈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충 고개를 흔들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움직임이었지만 동기는 용케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
저 형 오늘도 대단하네. 어떻게 하루마다 사람을 바꾸며 자냐? 안 그래?”

지훈은 대답을 음료수와 함께 목 뒤로 넘겼다. 평소에 좋아하는 음료수가 오늘따라 없어 대체로 산 음료수는 너무 달았다. 마시자마자 후회했지만 이미 반 이상이 위장에 쏟아졌다.

알파, 베타, 오메가 상관없이 꽂히는 대로 자는 것도 신기한데 그런 사람이랑 자는 놈들도 대단해. 오메가라서 그런가? 감촉이 좋으니까? 오메가는 부드럽잖아. ...”

, 나 들어간다.”

벌써? ! 우리 나온 지 5분도 안 됐어!”
몸을 돌렸다. 다 마시고 빈 캔을 들어 이름을 부르는 동기에게 손을 흔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3층 독서실 문 앞에서 옆 벽에 비치된 분리수거함에 캔을 버리고 문을 열었다. 얇은 유리문을 열면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고작 얇은 유리문인데 싸늘한 공기가 도는 복도와는 천차만별이었다. 급격한 기온변화에 오도독 소름 돋는 팔을 쓸며 코를 훔쳤다. 향수인지 페르몬인지 모르는 옅은 냄새가 쿰쿰한 책과 마른 먼지와 섞여 산뜻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후각이 좋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빠른 걸음으로 제각각 개인플레이를 하지만 전체적으론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책상 사이를 걸어 구석진 제 자리에 앉았다. 작업이 중단된 화면이 아직도 발광하고 있었다. 하다만 작업들이 정신없이 늘어져있었다. 도서관 조명보다 시린 노트북 화면에 손바닥 볼록한 부분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눌린 눈동자가 부드러운 살에 닿아 옅은 통증을 보이며 눈물이 맺혔다. 난방기를 켜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실내에 노트북까지 보니 바짝 말랐던 눈이 갑자기 맞이한 수분에 앞다투어 빨아들여서 그렇다.

나도 자자고 하면 자겠지?’

들어간다는 제 말에 묻혔지만 분명히 동기 놈이 뱉었던 문장들이 머리 위를 혜성처럼 떠돈다.

너 같은 쓰레기랑 누가 자?

하마터면 딸꾹질처럼 진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동기에게 가장 무례한 말을 뱉는 예의 없는 사람이 될 뻔했다. 사실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긴 하다. 다만 더 이상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아 뒤늦게 정신 차리고 삼켰다. 하지만 역시 조금 후회된다. 그 말을 뱉지 못한 게.

지훈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걸리는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반듯한 가운데는 두툼한 원형이 위치하고 있었고 포장지 끝은 핑키 가위로 자른 것처럼 뾰족했다. 제법 귀엽게 인쇄된 겉면은 오래 동안 바지 뒷주머니에 생활하느냐 쭈글쭈글했다.

선물이야.’

얼떨결에 받아 뒷주머니에 들어간 게 벌써 두 달 째였다. 청바지를 자주 입지 않아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묵혀있던 콘돔이었다. 버려야겠지.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 사이를 통과해 문을 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휴지나 종이로 가득 찬 쓰레기통에 콘돔이 눈에 띄게 한 가운데 있었다. 관자놀이와 목뒤까지 바짝 혈관이 일어났다. 뻐근한 목뒤를 주무르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험이 코앞이었다. 이제 제법 손에 익은 과제를 끝마치기 위해 옆에 벗은 안경을 쓰고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한 음씩 띄엄띄엄 끊기며 짧게짧게 키보드를 치다가 어느 순간에 빨라진다. 오타 없이 완벽하게 써지는 글자들에 쉴 틈 없이 몰아붙이며 해치워나가는 지훈의 안경이 하얘진다. 곧 지훈의 안경이 밝은 도서관 빛에 의해 눈이 가려지고 부르르, 떠는 핸드폰은 소음이 되어 공기에 흩어졌다.

 

 

책을 펼치고 밑줄 친 대로 소리 없이 중얼거렸던 지훈은 책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물건들에 놀라 눈을 끔벅였다. 노랗고 빨간 형형색색한 것들이 펼쳐진 책 위로 떨어져 산을 만들었다.

이거 먹어, 지훈아.”

마지막까지 탁탁 털고 빈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두며 맞은편에 앉으며 웃는다.

비타민 사탕이야.”

하나를 들었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혀에 침이 고일 것 같은 상큼함이 느껴지는 비타민 사탕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손에 쥐기만 하고 먹지 않는 지훈 대신 하나 까서 주려고 하길래 뺏어 못하게 하고 물었다.

동아리 활동하고 남은 건데 너 생각나서 가져왔어. 공부한다고 매일 늦게까지 공부하느냐 피곤에 쩔어있잖아.”

공부할 때만 쓰는 안경을 올려 고쳐 쓰며 지훈은 말없이 사탕을 바구니에 담았다.

선배나 먹어요.”

동아리 하나에만 열중하면 속상해 한다고 바쁜 요즘에 동아리 활동 두 개 하느냐 각질이 일어난 입술이 저 못지않게 푸석했다.

요즘 레인보우 활동한다고 잠도 못자고 바쁘게 돌아다녔잖아요.”

바구니 안으로 비타민 사탕이 톡톡 들어간다. 못해도 30개가 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남아서 가져온 게 아니라 일부러 가져온 거다. 지훈은 사탕을 까서 승철의 입술에 밀어 넣었다. 방해 없이 들어온 사탕을 입 안에 구르며 승철의 두 눈이 글썽거린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감동받았다는 듯이 목소리도 떨린다.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괜찮아. 튼튼한 게 내 제일 장점인걸.”

일어난 입술이나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

연달아 다섯 판을 뛰어도 다음날 수업 들으러 등ㄱ..”

제발 장소 좀 보고 말해요.”

책 위에 얼마 없던 비타민을 던졌다. 입술에 제대로 명중한 비타민은 제 할 일을 마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섹스했다는 말이 뭐 어때.. 아 미안해! 안할게!”

아파 아파. 연달아 날라 오는 단단한 비타민 사탕에 손을 뻗고 그 뒤로 얼굴을 돌려 숨으며 피한다. 일부러 인지 아니면 순수해서 그런지. 둘 다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니지만 빈 테이블 없이 학생들로 꽉 찬 학교 앞 카페에서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게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이미 그런 소문이 붙는 본인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 가짠데. 왜 그냥 냅두는지. 제가 다 속상해 지훈은 족족 승철을 맞히며 마지막 사탕을 집었다.

?

딱딱하고 납작했던 원형 비타민 사탕과 다른 감촉에 손을 멈췄다. 똑같이 동그랗긴 한데 좀 더 부드럽고 얇은 느낌이다. 이상함에 손을 펼쳤다. 디자인이 묘하게 다른 포장지에 설마하고 만졌다.

다 던졌어?”

더 이상 날라 오지 않는 사탕에 손을 아래로 내린 승철이 지훈의 딱딱한 얼굴과 손 위에 올라온 내용물을 보고 눈치 없이 해맑게 웃는다.

선물이야. 성인이라면 하나씩은 갖고 다녀야 하잖아. 특히 알파라면. 안 그래?”

동의를 구하면서도 소파 옆 쿠션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한다. 이번엔 진짜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훈은 강속구로 승철에게 던지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켰다. ? 일어나 말없이 어딘가로 걷는 지훈의 등을 쫒으며 몸을 돌렸던 승철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터는 지훈에 기함하며 벌떡 일어섰다.

! 그게 얼마나 비싼 콘돔인데!!”

후다닥 달려가 쓰레기통 입구를 연다. 꽤 크게 지른 소리에 사람들이 돌아본다. 지훈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고르고 골라서 선정한 거라구!! 없어서 못산다는 거 반품 팔면서 겨우 사서 너 생각하고 애들 몰래 하나 가져온 건데 그걸 버리냐?!”
좁은 틈으로 손을 넣으며 더러운 쓰레기를 뒤진다. 지훈은 점점 뒷걸음질을 하다 몸을 홱 돌리곤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따라 움직이는 주변 시선에 더 이상 여기 있을 수가 없어 민망함에 짐을 빠르게 챙겼다. 남은 음료수를 얼음과 함께 삼키고 왜 안 잡히냐며 틈에서 손을 빼고 아예 아래 문을 열고 쓰레기통을 꺼내 찾는 승철을 피해 인사도 없이 나갔다. 비타민에 섞어 슬쩍 콘돔을 주려던 못된 행동에 대한 나름의 복수였다. 틈만 나면 자자, 섹스하자, 라면 먹고 갈래? 달큰한 페르몬을 슬쩍 흘리며 유혹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점점 골목대장처럼 개구지게 장난치고 가볍게 다가와 흔드는 태도가 별로였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항상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 지훈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승철을 만날 때마다 늘 피곤했고 지쳤다.

! ! ! ! ! !”
뒤에서 껑충껑충 뛰는 소리가 들린다. 급하게 발을 옮기기도 전에 뒤까지 바짝 쫓아와 크게 도약하며 온몸으로 지훈의 뒤를 덮친다. 위에서 누른 무게에 허리가 꺾여 무너진 지훈을 이리저리 안으며 크허헝 웃는 사람을 할 수만 있다면 겁나게 때리고 싶다.

. 좀 형!”

손에 쥔 책과 가방이 떨어질라 꽉 잡으며 성을 냈다. 보통 그러면 살짝 퍼진 지훈의 알파향이라던가 지훈의 무서운 기백에 물러가는데 오메가인 승철은 그런 지훈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 좋은 냄새 나! 하며 옷이 당겨져 드러난 목에 코를 박았다. 힘껏 들이마시며 천천히 뱉은 호흡에 척추를 따라 닭살이 돋았다. 지훈은 있는 힘껏 바둥거리며 승철에게서 떨어졌다.

수업 없어요?”

빨개졌을 귀를 손으로 가리며 사라져달라는 마음을 담아 물었다. 승철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수업 들으러 가기 싫어.”

땅이 꺼지라 깊은 한숨도 뱉으며 싫은 티를 낸다.

최고의 선생님이 되겠다면서요.”

선생님도 수업이 싫을 때가 있어.”

그럼 선생님 못 할 텐데요.”

승철의 몸이 더 작아진다. 꿈이 있어 왔고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는 싫다. 언제 챙겨왔는지 비타민 사탕이 담긴 바구니를 밑으로 늘어뜨리고 어깨를 움츠러뜨린다.

수업 끝나면 같이 저녁먹자.”

손목에서 흘러 내려오는 가방을 어깨로 고쳐 매며 싫어요, 거절했다. ~! 눈만 치켜뜨며 묻는 말에 약속 있다고 대답했다.

나 두고 딴 오메가 만나는 건 아니지?”

눈을 가자미처럼 가늘게 뜨며 묻는다.

내가 형처럼 이 오메가, 저 베타 만나는 줄 알아요?”

그건 그래.”

반박도 없이 시원하게 수긍해서 이상한 허탈감만 얻었다.

왜 쉽게 인정해요?”

맞는 말이잖아.”

지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요.”

그래, 잘 가. 차 있는 오메가 조심하고 찝적대는 오메가 더더욱 조심하고 시험 잘 봐.”

시험 인거 말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지훈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휘어졌다.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다정한 사람이니 공부할 때 중얼거리며 외우는 지훈의 공부 습관을 알고 카페에서 책 펼치고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짐작했겠지.

형도 수업 잘 들어요. 튀지 말고.”

손만 대충 흔들며 길을 걸었다. 약간 경사진 보도를 따라 올라가면서 승철을 상대하느냐 허비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책을 펼치며 사람을 용케 피해 다니며 머릿속에 우겨넣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은 내용이었지만 한 글자라도 더 넣어야 했다. 왔다갔다 사람들 틈을 통과했다. 그러다 일어 올라온 보도에 발이 걸렸다. 앞에서 어른거리며 다가오는 인영에 피하다 그랬다. 쪽팔리게 자빠지진 않았지만 무릎채로 넘어졌고 책과 가방이 떨어졌다.

이지훈 뭐냐.”

쪽팔림에 흙이 묻은 책을 급하게 줍던 지훈은 앞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쩌다 강의 옆자리를 함께 앉아 수업을 듣는 무리 중 하나가 지훈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구부리며 킬킬대고 있었다.

무릎 안 아프냐?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남이사.”

하필 봐도 저 새끼가 봤다. 사람 속을 긁는데 선수인 놈이었다. 지훈은 입구가 열려 튀어나온 물건을 급하게 가방 안에 담았다. 도와줄까? 그 놈이 본인 앞에 떨어진 볼펜을 주어 건네며 묻는다.

됐고 네 갈 길이나 가.”

꺼져라는 말을 빙 돌려 말했다. 하지만 멍청한 놈은 알아듣지 못하고 꿈적 않다. 대신 쓸어 담듯이 물건을 담는 지훈 앞에서 뭔가를 주워 눈앞까지 올리며 묻는다.

너 콘돔도 가지고 다니냐?”

지훈의 손이 멈췄다. 설마하고 든 시선엔 익숙한 포장지가 그 놈 손에 들려있었다. 지훈은 급하게 그에게서 뺏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야 너 설마..”

비타민 사탕이야.”

그 너 쫓아다니는 오메가 새끼랑..”

네 애인이 너 밤마다 클럽 전전하며 아무 놈이랑 뒹구는 거 모르지?”

동기 입이 다물어진다. 불만으로 쏘아보지만 제 연인과 잘 알고 있는 지훈이 가지고 있는 제 약점에 더 이상 놀릴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뒤로 물러선다. 가방을 들고 책을 옆구리에 끼며 동기 어깨를 두들기며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멀어지면서 거친 욕설이 뒤에서 들렸지만 그것은 지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제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내용물. 깜찍한 디자인에 안전하게 섹스하세요가 적힌 콘돔을 지훈이 모르게 넣은 최승철을 잡아 족쳐야했다. 시험이 급해 지금은 못 잡지만 수업이 끝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이공 건물과 인문 건물이 꽤 멀었지만 그 거리는 수치로 열 받은 지훈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두고 봐, 최승철.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둬.

 

 

장마가 그치고 닿는 부위마다 불쾌를 동반하는 습한 더위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학원이 끝나고 약속장소까지 바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달려왔던 터라 몰랐던 더위가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목을 죄었다. 부산에 살며 여름 내내 시원하게 보냈던 것과 다른 내륙 도시의 더위는 고문과 같아서 학원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것에 잠깐 후회했다.

[어디야]

문자 알림음에 거의 다 왔어요, 빠르게 답장했다. 술을 자유롭게 마시기 위해 만들어졌던 걸로 알고 있던 영화감상 동아리가 한학기가 끝나서야 제 존재를 드러냈다. 초등학교 방학숙제도 아니고 방학동안 꼭 봐야하는 영화 리스트 10개를 작성해 그중에 3개 이상 보고 감상문을 쓰라 했다. 방학동안 학원을 다니며 전공 공부를 더 하려 했던 지훈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2개 빼곤 상영이 끝난 영화들이었다. 당당하게 불법다운 하지 말고 디비디 방이라도 가서 보라는 회장에 뒷말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났다. 신기하게도 갓 들어온 일학년들만 그랬다. 이삼학년들은 익숙하다는 듯 종이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었다.

지훈은 리스트를 다시 훑었다. 혼자 사는 자취방에는 디비디를 볼만한 여건이 전혀 없었다. 노트북은 공부용이었고 티비는 화면이 잘리는 십 년 전 모델이었다. 그렇다고 남자 혼다 디비디방 가서 보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보지 말자, 안 보면 어마무시한 벌칙이 2학기 때 당신을 기다릴 거라는 회장 말이 걸리긴 하지만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고 넘겼는데.

, 너 돌아가신 할아버지 만날 수도 있어.”
승철의 한마디에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벌칙이 무엇인지 말을 아껴서 더욱 그랬다. 고민하는 지훈을 대신해 승철이 같이 보자 했다. 나 이거 진짜 보고 싶었던 거거든. 시간이 안 돼서 못 보던 건데 같이 보자. 학점이 모자라 계절 학기를 들어야했던 승철은 친구들 다 집에 가서 나 혼자 있는 것도 서러운데 너까지 같이 안 놀아주면 외로움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며 약간의 협박을 섞었다. 지훈의 자취방 아무도 모르는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고 열고 들어와 그거 말고 저거, 저거 잡아야지. 그렇지. 게임하는 지훈 옆에서 오지랖 넓게 훈수까지 두며 조르길래 지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마음이 크긴 했다.

쨌든 둘은 디비디 방을 가기로 약속을 했고 승철보다 하루가 바쁜 지훈의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한 건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지훈은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 짧은 거리 더위에 노출됐다고 땀이 났다. 더욱이 순환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갇힌 더럽고 더운 공기가 더욱 갑갑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거울을 보며 땀을 닦고 머리를 정리했다. 알람도 못 듣고 자다 지각해서 있는 대로 꿰입은 옷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얼굴도 뽀송했다. 시원한 학원 건물에 계속 있었던 탓이 컸다. 손에 든 핸드폰이 징징 운다. 그새 못 참고 승철이 전화하는 것이다. 지훈은 주저 없이 통화거절을 옆으로 밀었다. 종료됐다는 빨간 화면이 깜박이고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왜 안 받아!!”

엘리베이터 앞에 승철이 있었다. 꺼진 폰을 들고 삐죽 나왔던 입술이 지훈을 보고 역세모로 바뀌었다. 저기죠? 지훈은 그런 승철을 못 본 척 복도 끝에 보이는 디비디 문을 가리켰다. . 옆에서 지훈을 흘기던 승철의 대답이 짧다. 들어와 영화를 고르고 안내된 방에 들어서도 삐져 말이 없는 승철에게 소파에 앉아 가방을 열어 주전부리요, 과자를 꺼내 줬다. 승철이 좋아하는 외국 젤리였다.

~”

연달아 나오는 콜라와 포장된 팝콘에 승철이 얼굴이 밝아진다.

미안해요. 이거 사느냐 늦었어요.”

승철이 좋아하는 젤리가 학원 근처에는 없어서 저 위까지 올라가 사느냐 그랬다. 승철은 이거면 이해하지~ 고새 풀어져서 신나게 봉투를 뜯었다. 투명 봉지에 담겨져 있던 젤리를 하나 꺼내 지훈에게 먹으라며 건넨다.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단 것엔 약했다. 싫으면 말고. 젤리를 입에 물고 팝콘을 뜯던 지훈의 팔을 친다. 뭐요. 까만 화면이 밝아지고 시작되는 화면에 승철의 얼굴이 환해졌다. 젤리 끝을 물고 아래로 늘어진 젤리를 입술로 움직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훈은 한숨을 쉬곤 입 밖으로 나온 젤리를 손으로 당겨 끊어내곤 입에 털었다. 단 맛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낭만 없는 자식, 승철은 불평을 쏟으며 다른 젤리를 꺼내 질겅거렸다.

영화에나 집중해요.”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대는 지훈 옆으로 승철이 엉덩이를 움직이며 자리를 잡았고 곧 둘은 영화에 빨려들었다.

 

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게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야.”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찬 소주를 잔에 쪼르르 담으며 승철은 열변을 토했다.

아무리 오메가 인권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우리 근처에서 수많은 오메가들은 범죄에 노출된 채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니까.”

소주를 한 번에 털고 안주로 산 땅콩과자를 3개를 잡아 씹는다. 바삭하게 튀긴 과자가 경쾌하게 이에 부서진다. 지훈은 승철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오메가 혐오가 가득한 환경에서 어느 오메가가 건강하게 자라겠어? 안 그래? 어 그리고 말이야. 이건 알파에게도 좋지 않아.”

형 아직도 눈 빨개요.”

제 앞에 있는 잔을 꺾어 마시며 지훈은 승철이 혼자 다 마시고 빈 소주병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다. 빈 병이 벌써 3개였다.

너무 슬퍼서 그래.”

승철의 눈에 눈물이 또 고였다. 영화 중반부터 욕을 그렇게 하더니 후반엔 눈물을 터뜨리며 울지 않는 주인공 대신 모든 눈물을 쏟던 승철은 디비디 방에 나와서도 멈추지 못했다. 전철을 타기 전 지훈이 편의점에서 산 휴지를 손에 쥐며 맹맹한 코를 풀던 승철은 다시 퐁퐁 솟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 나라는 잘못됐어. 처음부터 싹 다 고쳐야 돼.”

네 병 째 소주를 따고 술 병 째 들이붓는다. 네 병이 우스운 사람이지만 울다가 마신 술은 금세 취하게 만든다. 지훈은 급하게 병을 빼앗았다. 야아. 마시다 뺏겨 흐른 소주가 턱과 목을 적셨다.

알파라고 지금 나 속박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네 것이라도 속박하면 가만 안 둬.”

네에네에.”

지훈은 반이 빈 제 잔에 술을 따랐다. 승철은 빈 본인 잔을 손에 쥐고 앉은뱅이책상을 두들겼다.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 돼서 너 같은 알파나! 나 같은 오메가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거야.”

그래요.”

내가 유아교육가에 들어간 목표를 꼭 달성하고 말거라구.”
해낼 거라 믿어요.”

“2살부터 7살 때 받는 교육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내 몸 바쳐 보여준다.”

지훈이 피식 웃었다. 승철을 따라 한 번에 비운 소주가 식도와 위장을 태우고 들어가 혈관에 스며들어 핑핑 돈다. 승철과 달리 술에 약한 지훈의 얼굴과 드러난 목이 빨갰다.

그런 의미로 술 줘.”

술을 달라며 내미는 잔에 소주를 따랐다. 흘리는 것 없이 따른 소주잔을 높이 들어 엘리자베스를 위하여! 오늘 보던 영화의 비운의 오메가 주인공에게 건배사를 하고 한 번에 입에 턴다. 뒤로 꺾어 드러난 목 아래 부분이 삽으로 판 것처럼 움푹 패였다. 술 먹자고 지훈을 붙잡고 술을 산 뒤 허락도 없이 들어왔던 승철은 침대 위에 있던 잠옷으로 입는 지훈의 셔츠를 바꿔 입었다. 편하게 입는 셔츠인만큼 넥이 늘어져 목 아래로 드러난 살이 하얬다. 지훈은 다리를 모아 발바닥끼리 붙이곤 또 새 술을 까는 승철을 말렸다.

그만 마셔요. 여기 있는 거 다 마실 건데. 집은 어떻게 가려고. 여기서 자야지. 안 재워 줄 거예요. , 내가 알아서 잘게. 나가요. 지훈아. 왜요. 너는 꿈이 뭐야?

 

 

 

꿈이 있어 들어온 과는 의도한 건 아닌데 징글징글한 알파들만 그득했다. 자존심이 세고 자신들이 우월하다 믿는 오매한 알파들은 조용히 아싸로 지내며 졸업을 꿈꿨던 지훈에겐 꽤 곤욕이었다. 몇 없는 베타들과 우호적으로그렇다고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고- 지내려 해도 대여섯명씩 무리를 지으며 힘을 과시하는 알파들 때문에 알파인 지훈을 피해 다녔다. 그나마 깨어있는 베타들이 지훈에게 말을 걸긴 했지만 그건 지훈이 혼자 있을 때 일이고. 대체로 지훈은 어울리고 싶지 않은 무리와 같이 수업을 들었다. 너 정도면 괜찮지, 대장 노릇 하는 놈이 지훈 생각은 않고 오케이 해서 그랬다. 지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이 수업은 유난히 조별 과제가 많은 과목이었다. 혼자선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일학년이라 교양을 많이 듣기 때문에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참는 거였다.

하지만 역시 이들은 싫어. 전공 수업 시작 전 양아치들처럼 껄렁한 자세로 갖은 음담패설을 뱉는 무리에 지훈은 가방 속에 있는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했다.

봐봐, 목에 자국 있잖아.”

오 시발. 진짜네. 저 새끼 저거 목에 당당히 달고 다니네. 미친 거 아니야?”

층층이 올라간 경사가 있는 강의실 뒤에서 맨 앞에 앉아 노트북을 킨 오메가를 힐끔대며 입을 연다. 지훈은 팔짱을 끼고 의자 등에 기댔다.

어제까지 뒹굴었나본데. 냄새 존나 진해. 아주 정액으로 샤워하셨어.”

미친 새끼야.”

큰 웃음소리에 앞에 있던 오메가가가 고개를 돌린다. 까맣고 잘생긴 얼굴이 반듯했다. 여름이 다 끝나 가는데 아직까지 가디건을 입고 있다. 땀이 나지 않을까. 더위에 흐트러진 페르몬에 땀 냄새가 섞이면 꽤 섹슈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지. 그래선지 몰라도 제 앞에 있는 알파들의 입이 점점 거칠어진다.

씨발 홀리는 거 봐라.”

야 가서 따 먹어?”

개새꺄, 넌 꼴린다고 걸레랑 자냐?”

, . 쟤 이 과 들어온 게 알파랑 자려고 들어 온 거잖아. 그래서 자줬지.”

ㅋㅋ미친놈

여기서 쟤랑 안 잔 놈 없을 걸?”

왜 여기 있잖아.”

자기들끼리 티격태격 주고받던 무리 중에 하나가 다른 곳에 시선을 던지던 지훈을 가리킨다. 갑자기 들리는 제 이름에 지훈의 얼굴에 물음표가 달렸다.

냄새 못 맡아서 페르몬 영향 못 받는다고 그래서 자긴 러트도 온 적 없다면서 당당하게 동정이라 말하는 놈, 이 새끼.”

비아냥대며 놀리는 얼굴에 무리가 왁자지껄하게 웃는다. 그 틈에서 지훈만이 평화롭다. 그게 어때서. 러트가 오는 이유가 섹스하라고 오는 거라고 믿는 멍청한 알파들하곤 같은 급이 되고 싶지 않다. 언제 동정을 떼고 몇몇의 오메가와 잤는지를 자랑하며 떠들고 싶지 않다. 몇 몇 오메가를 임신시켰고 그래서 좆될 뻔 했다는 무용담을 늘어뜨리는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다. 지훈은 그랬다.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섹스가 목적이 아닌 사랑의 표현방법 중 하나이게.

교수님 왔다.”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수에 앉아있던 무리가 뿔뿔이 흩어진다. 발표 잘해라, 첫 번째로 불린 지훈은 무리에 시니컬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노트북에 usb를 꽂고 킨 화면엔 참여자 이름 이지훈만이 적혀있었다.

 

네 자리 여기 아니잖아.”

무리들의 사나운 눈빛을 받으며 무사히 발표를 끝내고 앞에 빈자리에 앉은 지훈은 다른 조의 발표를 듣다 제 옆에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 오메가가 저를 보고 있었다.

썩은 내가 나서.”

주머니 안에 불이 나게 진동하는 폰을 무시하며 지훈은 팔짱을 꼈다.

너 냄새 못 맡잖아.”

쓰레기 냄새는 알아.”

. 터진 웃음에 급하게 입을 갈무리한다. 조용한 발표장에 분위기를 깨면 안 되니까. ppt를 보기 위해 깜깜한 강의실에 유독 까만 피부가 빨개진다.

안 무서워?”

쓰레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어?”

어마어마하면?”

청소부 부르면 끝이야.”

너 소문대로 귀엽다.”

지훈의 얼굴이 구겨진다. 소문대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귀엽다도 별로였다. 구겨지는 얼굴에 오메가는 이가 다 보이도록 크게 미소 지었다.

나 이거 벌레한테 물린 거야. 우리 집 뒤가 숲이라 모기가 많거든.”

목 뒤를 가리켜 자국이 난 곳을 문지르며 말한다. 지훈은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국이 뭔지는 지훈도 알았다. 모뒤에서 지훈을 죽이겠다 이를 가는 무리들은 매춘소에서 매춘녀와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찌질이들이라 몰랐고. 아니 알았어도 허풍에 그랬겠지. 멍청한 놈들이다.

그리고 나 개봉 안했어. 만져지긴 했지만.”

오메가는 키득거렸다.

또 나 해커 되고 싶어서 이 과에 들어온 거야. 그냥 해커 말고 나쁜 놈들처럼 이 컴퓨터 저 컴퓨터 쑤셔대는 해커.”

눈을 빛내며 제 꿈을 말하던 오메가가 말이 마치며 수줍게 웃는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하긴 해커를 꿈으로 왔다는 건 조선공학과에 들어가 해적이 되겠다는 것과 같다. 한 번씩 멋모르던 시절 꾸던 꿈을 아직도 꾸고 있는 철부지로 보일 수 있다. 누군간 웃고 누군간 안쓰럽게 보며 누군간 흘러 듣는 그냥 그런 꿈. 꿈이라 불릴 수 있는, 말할 수 있는 꿈.

나도 그래.”

그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곤 웃는다. 비웃다기 보단 동지를 만난 기쁨 같다. 아니 한 쪽 입꼬리가 더 올라간 거 보면 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해커를 꿈꾸고 이 과에 입학한 건 웃기지? 지훈은 괜히 머리를 매만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승철이 형이 왜 널 좋아하는지 알겠어.”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나 그 형이랑 같은 동아리잖아. 알파, 베타, 오메가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동아리에 승철은 열성 회원이었다. 그가 여러 사람을 만나 잔다는 헛소문은 그런 동아리를 못마땅해 하는 알파들에 의해 퍼진 것이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털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너 귀여워.”

 

 

대학에 대한 낭만으로 들어간 동아리의 첫 엠티에 떨리는 심장을 애써 아닌 척 하며 온 곳은 짠 공기가 부유하는 섬이었다. 서해에서 가장 유명한 안면도. 내륙 사람들은 바다에 대한 로망이 있으니까. 떠난 곳이 지겹게 본 바다라는 것에 실망했던 지훈이었지만 서해 바다는 좀 다를 거야, 다르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궤짝채로 안으로 들어가는 술들을 보고 지훈은 모든 걸 포기했다.

인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몇 잔째인지 모르는 술이 계속 돌았다. 강제는 아니지만 참여는 해줬으면 좋겠다는 회장님의 제안에 앉은 신입생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악독한 선배는 아니었는지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진 않았다. 그저 게임에 걸려 하기 싫은 민망한 벌칙 대신 벌칙주를 마실 뿐이었다. 벌칙주는 회장 옆에서 신나게 술을 말고 있는 선배의 작품이었다. 옆 동기가 마시고 바로 뻗길래 지훈은 맛만 보기 위해 입술에만 댔다 신세계를 접했다. 여태껏 먹은 술중에 제일 맛있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차며 풍부한 맛이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해 동시에 맛도 못 느껴 맛있는 걸 몇 번 먹어본 적 없는 지훈에겐 오랜만에 느끼는 제대로 맛있는 맛이었다. 갖은 술들이 섞여 수상한 맛일줄 알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지훈은 한 번에 원샷할 뻔 했다. 벌칙주 마시는 족족 뻗은 패전병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식당에서 흔히 보는 맥주잔에 가득도 아니고 반만 따랐을 뿐인데 마시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는 벌칙자들에 생존자 일부가 공포를 느꼈다. 죽겠구나. 단단히 정신을 붙잡으며 게임에 임했다. 다시 신나게 술을 마는 선배의 요란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지훈은 숟가락 하나를 집었다. 오목한 가운데 3이 적혀있었다.

자 내가 왕이다!”

회장이 숟가락을 보인다. 왕관이 그려진 숟가락이다. 여기저기서 제발 나는 걸리지 않게 해달라며 숟가락을 붙잡고 평소에 찾지 않던 신을 찾는다.

“1번 가운데 누워.”

모두 주위를 살폈다.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안 누우면 벌칙주 준다. 회장의 한마디에 다들 너 아니냐며 묻는다. 다들 아니라며 숫자가 보일라 숟가락을 가린다.

승철아, 너다.”

신나게 술을 말던 선배가 고개를 든다. ? 손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진짜 나? 되묻는다. 회장은 술 마느냐 옆에 외톨이 섬같았던 선배, 승철의 숟가락을 들어 가운데 적힌 일번을 보여준다.

가서 누워.”

하얗게 얼굴이 질린 승철이 선배 잠깐,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 사람 발길질에 의해 가운데로 떠밀어졌다. 아니 나 분명 이 번 뽑았는데? 억울해 하며 말해보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승철은 다들 한통속이라며 궁시렁대며 바닥에 누웠다.

이왕이면 섹시한 놈 불러줘요.”

, 31번 위로 올라가서 열 번 푸시업하기.”

지훈은 3번 숟가락을 보이게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어떤 섹시한 놈일까 기대하며 고개를 든 승철은 일어서는 지훈을 보며 오호,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해야 한다. 못하면 못한 숫자만큼 벌칙주야.”

승철의 발아래 선 지훈이 대학 기념으로 볶은 머리를 손으로 쓸면서 그 앞으로 몸을 숙였다. 가슴 옆으로 손을 뻗어 기대고 얼굴을 마주보도록 맞추라고 하길래 올라와 얼굴을 마주봤다. 회장 옆에서 술을 마느냐 바빠 제대로 보지 못한 선배의 얼굴이 생기발랄하다. 기대로 두 손을 가슴위에 잡으며 지훈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하나. 지훈이 팔을 벌리며 몸 전체를 내렸다. 제법 가까웠던 얼굴이 코앞에서 멈췄다.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환호소리가 터졌다. 말간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비췄다. 서로의 호흡이 섞여 인중이 간지러웠다. 입술을 쭉 내밀려는 승철을 피해 몸을 올렸다.

. 다시 내려간 지훈은 온 몸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추위가 아직 머무는 바닷가 근처라 긴 옷을 입었던 터라 얼굴과 목 손 정도만 노출됐지만 보이는 하얀 부분이 붉게 달아 오도록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열기가 온 몸으로 뜨겁게 퍼졌다. 목이 빨갰고 귀가 뜨거웠다. 열을 식히려 숨을 뱉었지만 승철이가 마시는 바람에 헛수고가 됐다.

. 승철이 눈을 감고 입술을 길게 내밀어서 고개를 기울어 피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야해 보였는지 비명소리가 더 커졌다. 키스해! 키스해! 응원하는 소리도 들렸다. 승철은 닿지 않는 입술에 눈 한쪽을 뜨고 비스듬하게 피한 지훈에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지훈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 삐진 승철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덕분에 수월하게 내려간 지훈은 승철의 피어싱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봤다. 귀가 작아. 검정 기본 피어싱은 한 개 두 개 세 개.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아홉의 반. 아홉의 반의 반. 아홉 반의 반의 반.

회장에 심술에 모두가 환호했다. 아래도 더 붙이고! 입술도 이렇게 이렇게!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동아리 사람들을 무시하는 지훈과 달리 승철은 그 분위기에 취해 돌린 고개를 바로 하고 지훈에게 추파를 던지며 찡긋거렸다. 이래서 이 벌칙이 고단한거구나, 그런 승철을 견디며 20개가 같은 10개를 마친 지훈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푸시업 자체가 힘든 건 아니었는데 힘이 제법 빠졌다. 뻐근한 팔과 긴장으로 굳은 몸을 풀며 누운 승철에게 손을 뻗었다. 승철은 눌린 뒷머리를 손으로 띄우다 뻗은 지훈의 손에 놀라다 웃으며 잡았다. 우어어, 둘이 사귀냐?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우우 우는 사람들에 지훈은 급하게 손을 뗐고 승철은 내가 찜했으니까 아무도 쟤 건들면 안 돼! 소리쳤다. 웃음파도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둘을 제대로 엮어줘야지! 회장이 소매를 걷으며 리듬을 탔다. 이지훈이~ 좋아하는 ~ 랜덤 ~ 게임~

미리 말하자면 지훈은 게임에 강했다. 본능적인 감각이라 해야 할까. 한 가지에 집중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도 있었지만 뛰어난 감각으로 장애물을 피하고 승리를 얻었다. 컴퓨터든 폰이든 게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빠르게 얻었기에 그래서 지훈은 술게임도 잘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착각이었다는 걸 안 건 승철이가 입으로 건넨 얼음을 물었을 때였다. 러브 잔 심화 버전을 시리즈로 겪고 내가 사람인지 술인지 감각이 무뎌질 때쯤 또 한 번 걸린 벌칙에서 일 번에서 오 번 중에 아무 숫자나 고르라 해서 머리 굴린다고 무난하게 3번을 고르다 걸린 마우스 투 마우스에 차라리 벌칙주를 마시고 뻗으려는 지훈의 손을 붙잡고 입을 부딪쳐 어느새 물고 있던 얼음을 입 사이로 건넸다. 더운 입안에 물과 함께 약간 녹은 얼음이 넘어왔다. 이에 걸리며 들어온 얼음을 어쩌지 못하고 굳었다. 그런 지훈을 대신해 승철은 능숙하게 지훈의 입 안으로 넘어와 얼음을 말아 감고는 가져갔다. 그 때 얽힌 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생생해서 지훈은 급하게 물을 한 입 마시며 감촉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게임이 점점 고조되고 연달아 잔을 들이붓던 지훈은 머리끝까지 취해 더 이상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휘청이다 사람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박수 치면 박수 치고 리액션 봇처럼 굴었다. 그 모습이 꽤 안쓰러웠는지 누군가 지훈의 팔을 잡으며 방에 들어가라 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제 다리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해서 그랬다. 분명 아까까지 내 몸에 달려 있었는데 어디 있지? 허리 아래 아무렇게나 뻗은 다리를 만지며 지훈은 제 사라진 다리를 찾아 다녔다.

지훈아, 자자.”

다리를 찾다 살짝 존 지훈은 부유감에 눈을 떴다. 어지러운 시야에 몸이 흔들거렸다.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러가고 위장이 탈탈탈 돌아가고 달팽이관이 위이이잉 돌아가고. 지훈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업은 건지 안은건지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발버둥을 쳐 저를 지탱하는 사람에게 벗어나 흐릿하게 기억하는 화장실을 찾아 문을 열곤 변기에 모든 걸 쏟았다. 빨강색부터 검정색까지 세상에서 접한 모든 색이 지훈의 입에서 탄생했다. 변기를 붙잡고 모든 걸 다 쏟아내는 지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드라마를 볼 때 왜 오바이트를 하면 사람들이 괴로워하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쥐어짜지는 위가 아팠고 역류하는 식도가 뜨거웠고 벌려야 하는 턱이 뻐근했다. 소화가 끝난 점심 식사까지 토하려 하는지 강한 힘에 눈물이 토독 떨어진다.

,.

울음소리와 섞여 흘러나왔다. 누군가 등을 부드럽게 두들겼다. 역한 냄새가 날 텐데 그는 끝까지 지훈 뒤에 있었다. 모든 내용물을 쏟고 힘겹게 변기커버를 내린 지훈 대신 버튼을 누르며 자려고 하는 지훈의 머리를 조심히 들어 입을 헹구게 한다. 들어오는 물을 살짝 벌려 담지도 못하고 흐르는 대로 냅뒀다. 옷이 젖었다. 차가워서 정신을 조금 차린 지훈이 손을 들어 컵을 받쳤다.

이 닦을래?”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있어. 지훈을 벽에 기대게 하고 나간 그는 얼마 안 있어 칫솔을 들고 나타났다. 눈을 비비던 지훈은 입 사이로 들어와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를 닦는 칫솔질에 시키는 대로 입을 열었다. , , , . 우웩. 아 미안. 살살 닦을게. 검고 하얀 사람이 눈썹을 아래로 내린다. 지훈은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세수도..해야겠다.”

치약 거품이 흘러 더러워진 턱에 곤란해 하던 승철이 지훈을 일으켜 뚜껑을 내린 변기에 앉힌 뒤 세면대에서 물을 받으며 지훈의 얼굴을 닦았다.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통통한 얼굴이 물에 말끔히 씻겨나갔다. 1살 차이일 뿐인데 피부가 너무 좋아서 승철은 역시 영계가 좋다는 농담도 쳤다. 말 의미도 모르면서 지훈은 픽 웃었다.

. 여기 팔 올리고. 그렇지. 자 조금만 더.”

세수를 마치고 승철에게 안기듯 기대며 화장실 옆방으로 들어온 지훈은 깔은 이불에 몸을 누웠다. 폭신한 감각에 기분 좋게 웃으며 자려고 하는데 옷이 젖어서 갈아입어야 한다며 자꾸만 괴롭혔다. 지훈은 짜증을 내며 팔을 하나씩 뺐다. 옷 벗는 게 쉽지 않아 도움을 받아 완전히 벗은 지훈은 옷을 입을 때쯤엔 잠에 반쯤 취해있었다. 옷을 다 입히고 발아래 있는 이불을 끌어올려 가슴까지 덮은 승철은 땀이 나는 얼굴을 손등으로 닦으며 자는 지훈의 코를 툭 건드렸다.

잘 자.”

눈치 빠른 회장의 장난에 속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연달아 마셔야 했던 지훈이 고주망태가 되어 이러는 꼴이 안쓰럽긴 하지만 귀여운 것도 사실이라 승철은 지훈의 볼에 뽀뽀를 했다. 쪽쪽. 누구는 코를 골고 누구는 입맛을 다시는 방에 홀로 깨어있는 승철은 기분 좋게 자는 지훈을 내려다보곤 몸을 일으켰다. 유일하게 깨어 있는 회장과 함께 엉망진창인 거실을 치워야만 했다. 술이 너무 세면 이게 문제야. 취하지도 않는 제 자신에 한탄을 하며 발을 떼던 승철은 저를 붙잡는 힘에 멈췄다. 뭔가 싶어 돌린 뒤에는 승철의 바짓단을 잡은 지훈이 눈을 반쯤 뜨며 승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지훈아. 뭐가 필요해? 물 줄까?”

자다가 목이 말라 깨는 경우가 많아서 지훈 앞에 주저앉아 조용히 물었다. 지훈은 말없이 승철을 마주보았다. 잠꼬대 하나보네. 승철은 손을 뻗어 지훈의 이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가늘게 눈을 감으며 승철 손에 몸을 맡긴다. 뻐금거리며 움직이던 입술이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물어진다. , 그래. 그것에 대답하며 승철은 지훈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일부러 길게 누르며 떨어진 입술에 그때까지 승철의 바짓단을 잡고 있던 지훈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지고 툭, 바닥에 떨어지고 승철은 지훈의 손을 이불 안에 숨기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빨리 안 오냐! 회장의 새된 외침에 승철이 미안 미안~ 능글맞게 웃으며 그 옆으로 달려갔다.

 

 

 

자취 방 보일러가 고장 났다. 들어오고 일주일도 안 되서 터진 보일러에 밤새 이불을 끌어안으며 삼월의 추위와 싸워야 했던 지훈은 아침이 되자마자 주인집에 전화를 걸었다. 까치집 그대로인 머리채로 내려온 주인은 터진 보일러를 보고 매우 미안하단 얼굴로 하루만 참아달라며 지훈의 손을 잡았다. 다음 달 월세 내가 10% 깎아줄게. 최신식 건물이라며 광고해서 계약한건데 이게 뭐냐고 사기 아니였냐며 따지려던 지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몇 개의 짐만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10%는 강했다.

다행히 수업이 있던 날이라 오전 오후에는 그럭저럭 보냈는데 밤이 되자 갈 때가 없었다. 입학한 지 겨우 일주일인 지훈에게 하루 신세를 부탁할 대학 친구는 아직 없었다.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 정도일 뿐. 모르는 사람을 재워줄 마음 넓은 사람은 이 대학에서 없기에 지훈은 고민하다 사우나를 겸비하는 목욕탕에 들어갔다. 혼자 저녁을 먹고 느즈막하게 들어간 사우나는 곳곳에 코고는 사람이 가득해서 잠귀가 밝은 지훈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잠자리를 찾던 지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욕탕으로 내려왔다. 남자 목욕탕 이층에 낮게 구비된 수면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담요와 딱딱한 사우나 베개를 들고 목욕탕으로 들어온 지훈은 평상 한 가운데 전라인 채로 자고 있는 사람에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냥 자는 것도 아니고 다리까지 제대로 벌려 완전히 대 자로 뻗어 누운 충격적인 비주얼에 벌어진 입을 손으로 올려 닫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아니면 이게 말로만 듣던 목욕탕 고수인건지 아래를 가리지도 않고 당당히 드러냈다. 목욕탕 가면 흔히 보는 게 동성의 알몸이라지만 그건 씻어야 하니까 어쩌다 보는 건데 이건 뭐 봐달라고 그러는 건가. 없던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더 신기한 건 그런 사람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다. 씻으러 옷을 갈아입는 사람도 씻고 나온 사람도 머리를 말리는 사람도. 놀라 굳은 저만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여기선 저게 당연한가 보지. 침착하려 애쓰며 심장에 손을 얹고는 조용히 발을 뗐다.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으려-그가 깰까봐. 깨면 그거야말로 더 민망한 상황이 아닐까- 애쓰며 평상을 뺑 돌려 걷던 지훈은 몸을 옆으로 돌리는 평상 위 사람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랐어.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닌데 혼자 긴장하다 혼자 놀란 게 창피해서 지훈은 귓불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지훈에게 등을 보이며 누운 남자가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운동을 했는지 단단한 어깨와 잘 빠진 등에 감탄도 잠시, 통통하고 큰 엉덩이에 시선을 뺏겼다. 엉덩이 사이가 반짝거렸다. 설마하고 코를 킁킁대면 알코올 냄새와 함께 달큰한 냄새가 섞여 옅게 났다. 지훈은 주저하다 평상 위로 무릎을 올렸다. 끼익- 낡은 나무가 지훈의 무게에 운다. 그 소리에 깰까 멈춘 지훈은 미동 없는 평상 위에 누운 남자에 조심히 무릎 하나를 더 올리고 손을 뻗어 제가 갖고 있던 담요를 그에게 덮었다. 완전히 펼쳐 덮으면 지훈에겐 목 아래까지 오는 긴 담요가 그의 어깨에서 멈춘다. 이정도면 됐지. 완벽하게 몸을 가린 담요에 만족하며 지훈은 천천히 평상에서 무릎을 뗐다. 달큰하게 나는 페르몬을 지울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제 냄새가 나는 담요를 덮었으니 좀 덜하겠지 싶다. 평상에 멀어져 2층 수면실로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나는 낡은 나무계단 소리에 이러다 못 내려오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시끄럽긴 해도 아늑한 수면실에 만족하며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날 밤 지훈은 통통하고 큰 엉덩이를 베어 무는 꿈을 꾸며 몽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찌뿌뚱한 몸에 겨우 눈을 뜬 지훈은 따뜻하게 저를 덮은 담요에 뜬 눈을 다시 감았다.

 

 

 

 

이상하다. 몸이 뜨겁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으슬으슬 춥다. 추운 겨울에 목도리에 모자까지 쓰고 장갑까지 꼈는데도 너무 추워서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땅이 자꾸만 올라와 몇 번이고 헛디디며 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대학 입시 면접을 끝내고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려오던 지훈은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몸은 점점 차가워지는데 아래는 뜨거웠다.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한 모양이다. 지훈 옆에 걷던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슬금슬금 지훈을 피해 멀리 돌아섰다. 꽤 많은 이들이 면접을 마치고 그렇게 가는 동안 지훈은 무릎에 얼굴을 가리며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했다. 갑자기 닥친 가을 한파에 단단히 무장한 몸도 얼어간다. 어쩌면 좋지. 일어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부모님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꿈쩍할 힘도 없었다.

그 때였다.

어디 아프니?”

부드럽게 감싸 안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따뜻한 손으로 숙인 얼굴을 들어올린다. 감각을 잃은 차가운 볼이 따뜻하게 데워진다. 잘 떠지지 않는 눈엔 하얗고 검은 사람이 걱정스레 지훈을 쳐다보고 있었다.

러트가 왔군.”

달큰한 냄새가 났다. 지훈은 따뜻한 손바닥에 코를 비볐다. 그는-낮은 목소리였으니까 남자겠지- 지훈의 얼굴과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은 냄새가 나.

이 나이 때면 본인이 알 텐데. 아직 미숙한 건가.”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소매 아래 숨은 손목에 혀를 내밀어 핥았다.

아 잠깐. 저기. 애야? 정신 차려.”

축축한 감촉에 당황한다. 지훈은 제 타액을 묻힌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 냄새가 좋았다. 그는 지훈의 허리를 잡아 억지로 일으키며 안았다. 오랜 시간 주저앉아 뻣뻣해진 다리에 한 번에 일어서지 못하고 그의 배쯤에 숙여 안긴 지훈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미치겠어.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야.

이거 큰일이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하체를 부딪혀온다. 남자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훈의 귀로 얼굴을 숙였다.

너 이름이 뭐야?”

이지훈.”

여기 학생이야?”

앞으로 될 거야.”
아직 미성년자잖아. 남자가 혀를 찬다. 지훈은 그가 떨어질까 팔에 힘을 실었다.

약 있어?”

없는데.”

왜 없어!”
냄새를 못 맡으니까.”

알파의 첫 러트는 힛싸가 온 오메가만 없으면, 그 페르몬을 맡지 않으면 평생 러트가 올 가능성이 매우 낮다.(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극히 임신할 수 있는 오메가에게만 반응하도록 만든 본능이었다. 물론 첫 러트가 오지 않아도(그래서 러트를 맞이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충분히 성욕을 느끼고 성관계를 맺으며 몽정을 맞기도 하지만 미성숙하다. 임신도 불가능하고. 알파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한 번이라도 힛싸가 온 오메가에 노출되어 첫 러트를 맞이하여만 완전한 알파로 인정받는다.(실제 사회에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알파 세계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처음 맞이한 강렬한 충동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실제로 이 때가 알파 성범죄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인다. 그래서 어린 알파는 러트를 대비해 비상약을 챙긴다. 힛싸를 맞이한 오메가들의 접촉에 이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본능에 미쳐 날뛰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만든 약이었다.

냄새 못 맡아?”

그런데 지훈은 비상약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후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 내나 역한, 일반 사람들이 맡기 어려운 극도의 냄새엔 조금 반응을 보일 뿐 일반적인 향이나 페르몬엔 반응하지 않았다. 젖은 아래에 어쩔줄 모르며 몸을 비비며 들러붙던 오메가가 간혹 있었지만 지훈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훈은 비상약을 챙기지 않았고 19, 주변 알파들은 이미 진작 뗀 동정을 아직까지 떼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그런데 왜 나한텐 반응해?”

좋아서.”

그런데 이상했다. 이 사람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빵집에서 나는 빵 굽는 냄새가 이걸까. 꽃 집에서 나는 풀 비린내와 꽃향기가 이런 냄샐까. 아니면 입에 대지도 못하는 달콤한 케이크가 이런 냄샐까. 냄새를 맡아본 적 없어 어느 것이라 말할 순 없지만 지훈이 듣고 상상했던 모든 향들이 이게 아닐까. 혀끝이 아리도록 달콤하고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이름이 뭐야?”

발을 세워 남자의 입술을 찾았다. 아기 새처럼 모이를 쪼아 먹듯 도톰한 입술에 몇 번이고 뽀뽀를 했다.

,, 승철, , 얘 진짜 선수네.”

이름을 물어봐놓고 대답도 못하게 쪼아대니까 그, 승철이 지훈의 얼굴을 붙잡아 막았다.

자자.”

.”

싫어?”

어린애랑은 안 자.”

나 생일 빨라.”

승철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음울하고 어두운 페르몬이 어디서 나길래 호기심에 따라왔다가 달라붙은 어린 알파에 잡혀먹을 것 같다. 19살이면 벌써 동정을 떼고도 남았을텐데 산뜻한 페르몬이며 열정적인 반응하며 딱 처음 맞는 러트에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알파의 반응이라서 승철은 고민이 깊어졌다. 미성년자라 안된다는 건 변명이고 마음만 맞으면 잘 수 있는데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모르는 알파를 내가 맡아도 되는 걸까?

지훈의 얼굴을 붙잡으며 고민하는 승철이 답답한지 지훈이 팔을 들어 승철의 머리를 감싸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숙인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와 입안을 헤집는다. 서툴고 어설픈 키스에 웃음이 난 것도 잠시 촉촉이 남의 것으로 젖어가는 입 안에 엉덩이 사이가 뜨거워진다. 아직 힛싸가 오기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알파의 페르몬에 반응한 것이다. 망했어. 얼굴을 떼고 따라붙는 지훈의 어깨를 밀어 거리를 만들었다. 떨어진 몸에 볼이 부풀며 불만을 보이는 지훈에게 승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가자.”

어린 얼굴이 반짝인다.

단 한 가지 약속이 있어.”

지킬게요.”

반말 찍찍 하더니 제 말에 듣지도 않고 지킨다는 알파에 잠시 제 미래가 걱정됐지만 이미 저도 여기서 멈출 수 없기에 승철은 지훈의 눈을 마주치며 다짐하듯 뱉었다.

나랑 잔 거 절대 잊지 마.”

 

 

 

 

 

물론 지훈은 잊지 않았다. 부드럽게 안겨오던 몸과 단단하게 끌어안던 팔, 허리에 감아온 다리, 맛있었던 엉덩이. 인터넷이나 친구들을 통해 들었던 처음은 상상이상으로 아찔해서 하늘 높이 나는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달큰한 냄새에 술에 취한 듯 엉망진창인 머리를 흔들어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승철의 젖은 얼굴을 보면 이성이 날아갔다. 몇 번의 정사 후 지쳐 널부러진 채로 지훈이 허릿짓을 겨우 받던 승철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꾸 욕심이 나서 몇 번이고 만지고 핥고 물었다. 결국 승철이 기절해서야 행위는 끝났고 지훈은 승철을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그 옆에서 잠들었다.

그 이후에 이성이 돌아온 지훈은 미안함에 승철에게 땅에 머리가 닿도록 사과를 했다. 승철은 괜찮았다며 위로해주었지만 지훈은 속이 엉망이었다. 알파중에서 가장 이성적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그렇게 짐승처럼 굴 줄은 몰랐었다. 오메가를 자신의 성욕처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알파와 저가 뭐가 다른가. 그래서 지훈은 승철에게 거리를 두었다. 대학이 크니까 만날 일도 없겠지 했던 사람을 동아리에서 만날 줄 몰라 잠시 당황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괜찮을 것 같아 아닌 척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한 번 맛 본 달콤한 쾌락은 각인돼 지훈은 밤마다 뜨거운 욕망과 싸워야했다. 감은 눈 사이로 아른거리는 승철의 벗은 평상 위 누워 잠든 몸이 제 입맛대로 바뀌고 길들여져 지훈을 몇 번이고 흔들었다. 아침에 젖은 속옷을 맞이하는 게 놀랍지 않을 정도로 격렬한 밤을 지새우고 승철을 마주칠 때마다 올라오는 죄책감에 또 다시 거리를 두고. 밤을 지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생활에 지훈은 점차 지쳐갔고 승철은 지훈의 옆에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반드시 제 손에 떨어질 지훈을 안다는 듯이. 예쁜 입술로 속삭이며. 지훈아. 저를 불렀다.

그리고 결국 지훈은 승철의 손에 떨어졌다.

 

문을 닫자마자 달라붙는 승철을 끌어안았다. 벽에 밀어 붙어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며 구겨 신은 신발을 벗어던졌다. 하나씩 옷을 벗고 부엌과 벽에 여기저기 부딪히며 겨우 침대에 도착해 서로를 실컷 탐했다. 가장 이성적인 상태였지만 가장 본능적이기도 했다. 승철은 몇 번이고 지훈의 이름을 불렀고 지훈은 저를 부르는 승철에게 대답했다. 서로를 원하고 탐하던 밤을 지새고 늦은 아침에 일어난 두 사람은 약속을 하나 했다.

나한테만 집중해요.’

솔직하게 굴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진심을 나누고 이 약속을 과연 지킬 수 있을까 뜨끔하기도 하며 그렇게 그들은 시작했다.

 

 

 

 

 

 

 

 

 

 

+역순으로 시간이 뒤로 흘러갑니다. 맨 마지막 빼고 아래서 위로 읽으면 똑바로 시간이 흐르면서 일들이 일어나죠

+이것이 청게가 맞는지 모르겠지만...유삼님 선물로 받아주세요.

+1차 수정 후  재 업로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