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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숨 쉬는 이유가 되어버린 네가 내 숨을 막는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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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숨 쉬는 이유가 되어버린 네가 내 숨을 막는다

다몬드 2016. 11. 27. 18:16

 

 

  w. 안다미로






승철이가 지훈을 만난 건 사람이 술을 먹는게 아니고 술에 사람이 먹힌다는 걸 몸으로 배우던 대학 신입생 시절, 풋풋하고 촌스러웠던 20살 때 일이었다.

아슬아슬한 내신과 만만치 않은 수능으로 운 좋게 들어간 대학은 낭만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꽃샘추위처럼 살을 파고들고 뼈를 가르며 승철을 시리게 만들었다. 등교하다 잡혀 반강제로 들어간 영화 동아리에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영화는 안보고 술만 거하게 마셨다. 매일같이 문자로 동아리모임(이라 쓰고 술자리라 읽는다)을 통보하는 일명 영희방은 반강제로 가입시킨 좋은 선배들과 재밌는 동기들로도 견디기 어려운 악명 높은 곳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말술들만 모였는지 술만 꺼내면 술짝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붓고 마셨다. 옳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술에선 강했던 승철이라 처음엔 이까꼬 다 마셔주지! 호기롭게 굴었지만 매일 불려나가 사랑주라며 건네는 선배들의 술잔을 간이 쉴 새도 없이 들이붓다 보면 어느새 고주망태가 되어 짐승이 된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여섯시에 시작해 턱과 인중에 난 수염처럼 푸릇푸릇한 새벽에 끝난 술모임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승철은 잘 가라는 선배들과 동기들의 인사를 흘려들으며 핸드폰을 입에 물고 개처럼 네발로 집에 기어 들어와 옷만 겨우 벗고 누웠다. 텁텁한 입안과 기름진 얼굴과 떡진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지만 그것도 잠깐, 어차피 내일은 주말에 시작인 토요일이다. 약속된 건 없다. 오랜만에 가지는 휴일이었다. 승철은 마음을 푹 놓고 말 안 듣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 위로 덮었다. 잠은 토끼처럼 껑충뛰어 승철을 한 번에 덮쳤다.

아으응

간지러워.

처음엔 잠결이었다. 먼지가 올라간 듯 얼굴이 간지러워 손으로 긁었다. 두 번째 때엔 잘 때만 얼굴 근처에서 나는 귀찮은 벌렌 줄 알고 손을 휘저었다. 세 번 째때는 자꾸 얼굴을 귀찮게 건드길래 짜증이 나서 몸을 돌리며 팔을 홱 저었는데 얼굴을 괴롭히는 것이 사라지면서 으악- 비명 소리가 났다. 얼굴 근처에서 난 거라 승철은 살짝 잠이 깼다. 깨긴 했지만 새벽까지 마신 술은 아직 덜 풀렸고 잠도 한참 모잘라서 목 아래로 내려간 수마가 다시 얼굴 위로 올라왔다.

올라오려했다.

이상해.’

그런 느낌 있지 않은가. 뚫린다는 느낌. 날카로운 송곳으로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은 그런 거. 길을 가거나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종종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아무도 자길 쳐다보지 않았고 혼자 뻘쭘해지고 마는 그런 시선.

잠결에 승철은 그 느낌을 받았다. 뚫릴 것 같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내 방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시선.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시선은 아까보다 강렬해졌다. 도저히 편히 잠들 수 없는 불편한 시선에 승철은 자기 위해 자자, 자자. 자기세뇌를 걸었지만 그럴수록 잠은 꼬리가 보이도록 등을 돌려 저 멀리 도망갔다.

결국 승철은 눈을 떴다. 도대체 어떤 시선이길래 이런가 싶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미처 잠을 쫓지 못하고 먼저 떠진 눈에는 말랑한 하얀 얼굴이 제 코앞에 있었다.

헛것인가. 술에 절어있는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꿈인 거 같아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사람인데. 까만 눈동자 안에 술에 쩐 남자가 반쯤 눈떠있다. 어린애? 피부는 솜털까지 보송보송해보였고 얼굴은 볼이 통통한 둥근형이었다. 십센치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어린애에게선 풋풋한 아기냄새도 났다. 어린아이는 승철이 눈을 떴음에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마주치더니 꼼지락대며 손가락을 뻗었다. 손에 쥐면 감쪽같이 사라질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승철의 속눈썹 끝을 건드렸다. 승철의 눈썹이 파르르 잠자리 날개처럼 떨었다. 손가락이 살짝 떨어졌다. 승철은 반쯤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아이는 그 짧은 손가락으로 승철의 눈머리를 가리켰다.

아저씨 눈곱 꼈어.”

왁 시발!!”

내 방에 사람이 있어!!

깜짝 놀라 소리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술과 잠에 범벅이 된 뇌가 심하게 흔들렸다. 술을 해독해주던 간이 멀미를 했다.

으읍..!”

팔딱 뛴 위 입구가 열리고 올라오는 신맛에 입을 틀어막고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승철 방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열려있는 변기위로 시원하게 쏟았다. 어제 덜 취하기 위해 먹은 안주들이 반쯤 소화된 채 승철에게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했다. 전처럼 넓고 얇게 퍼진 것들에 비위가 또 상해 계속해서 얼굴의 동그라미를 다 크게 열어 오바이트를 했다. 요란한 오바이트 소리에 화장실 안이 시끄러워진다. 왕왕왕, 메아리 쳐 귀를 타고 들어와 아직까지 어지러운 달팽이관을 마구 흔든다. 이젠 머리까지 아팠다.

아 죽을 것 같아...”

얼마간 더 속을 게워내고 지친 얼굴로 뚜껑을 덮어 변기버튼을 눌렀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토사물이 함께 쓸려나갔다. 승철은 찬 대리석에 주저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고작 어제 만난 음식들과 인사를 했을 뿐인데 벌써 몸이 지치고 땀이 났다. 잠이 다시 몰려온다. 마지막 기력까지 오바이트 하는데 쏟아서 방으로 걸어갈 힘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화장실에서 자버려? 잠시 고민할 때 확 문이 열리면서 승철은 머리를 얻어맞았다.

"이 화상아!! 술 먹지 말랬지!"

엄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사람 만날 때 입는 옷차림으로 답답하다는 얼굴로 손을 또 든다.

! 엄마!”

승철은 목을 움츠리며 엄마 손을 피해 팔을 허우적댔다.

"지금 아파트 사람들 집에 모여서 이야기중인데!! ?!! 쪽팔리게!! 어제 몇시에 들어왔어?! 또 술 무서운 줄 모르고 다 마셨지?! 이 무식한 놈아!!!! 너 엄마 망신시키지 말고 방에 곱게 있어!!"

머리대신 등을 시원하게 갈긴 엄마가 문을 닫고 사라진다. 매서운 손바닥에 등이 아프다. 팔을 뒤로 해 아픈 곳을 붙잡고 울었다. 아니 붙잡진 못했다. 몸은 제법 유연했지만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이어서 승철은 몸을 베베 꼬며 어떻게든 아픔을 참으려 애썼다.

이 여사님. 너무 무셔.”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났을 등에 울며 입을 헹궜다. 입 냄새가 최악이었다. 결국 칫솔을 꺼내 치약을 묻히고 이를 닦았다. 위아래로 닦으며 발생한 거품이 턱에 묻어 물 세수까지 했다. 물로 축축한 얼굴을 수건에 대충 닦으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부엌에서 들리는 아주머니들의 꽃같은 웃음소리에 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이사온 이 아파트는 복도식으로 같은 층인 사람들끼리 서로 왕래가 잦아 자주 모여 수다를 떨곤 했다. 거기서 나이도 많고 성격도 화통해 왕언니라 일컬어지는 승철 엄마에 승철 집은 아주머니들의 모임장소로 자주 쓰였다. 덕분에 그분들 모두 이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갠지 알았고 승철이 대학을 어디 다니는지 알뿐만 아니라 승철이 매일 술에 떡이 되어 엄마한테 깨지는 것도 알았다. 엄마는 동네 창피, 아니 아파트 창피하다며 술에 쩔어 누운 승철의 등을 때렸다.

여보~ 승철이 죽어요~”

옆에서 말리던 아빠는 당신도 술 냄새가 만만치 않게 난다며 같이 맞았다. 술 좀 그만 마셔요!! 승철과 아빠는 매일 혼났다.

부끄러울 게 뭐 있나.”

승철이 엄마한테 술로 혼나는 거 한 두번 보신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싶다. 어차피 모이는 아주머니들의 반 이상은 술 때문에 속 썩는 집이었다. 승철네 만의 일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이 집의 가장이자 카리스마인 엄마의 명을 어겨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승철은 뒤꿈치를 들어 얌전히 제방으로 들어갔다.

으억! 너 뭐야!”

그리고 거기서 자기 침대에 앉아 양발을 번갈아 앞뒤로 흔드는 어린아이를 마주했다.

뭐야. . 제 방인가 싶어 멈춰 뒷걸음질 해 문을 확인하고 다시 들어온 승철은 처음 보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었다.

너 누구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름 알려주는 거 아니랬어요.”

아이구. 웃기는 소리하네.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왔는데 이름 물어보는 거 당연한 거 아냐? 속으로 대꾸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 해봤자 이해 못 할 테니까 승철은 침대에 엉덩이를 내려앉으며 질문을 바꿨다.

엄마 따라 왔어?”

.”

집 어디야?”

그런 거 알려주면 안 된대요.”

아 땡겨. 뒷골이 조금 당겼다. 승철은 뻐근한 뒷목에 머리를 크게 돌렸다.

너 왜 내 방에 있어.”

심심해서요.”

심심하면 남의 방에 막 들어와도 돼?”

들어가도 된다고 했어요.”

누가?”

여기 아줌마가요.”

이 집은 엄마 이름으로 되어있다. 방은 승철 방이었지만 승철이 게 아니었다. 마치 썸같다. 내 거 같은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어어-. 아니 이게 아니고.

여긴 내방이고 난 허락 안 했으니까 나가.”

대답은 꼬박꼬박 잘한 꼬맹이가 입이 다물어진다.

형 잘거니까 가.”

침대 안으로 더 들어가 이불을 다리에 덮으며 다시 말했다. 제 말에도 아이가 꿈쩍도 안하길 래 엉덩이를 툭툭 치며 가라 아가야 했더니 그제야 꼼지락 대며 엉덩이를 뗀다. 이제야 나가나 싶어 베개에 눕던 승철은 침대가 꺼지는 느낌에 고갤 돌렸다.

아저씨 자는 거 보면 안돼요?”

뭔 개소리야. 어이가 없어 황망하게 아이를 올려다봤다. 침대에 완전히 상체를 기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잇는다.

얌전히 있을게요. 안돼요?”

싫은데.”

한 번만.”

싫어. 이름도 주소도 안 알려주는 모르는 애 옆에 두기 싫어.”

쪼잔해.”

꼬맹이가 삐졌다. 승철을 흘기며 일어나 몸을 돌린다. 모르는 아이가 내 방에서 자는 나를 보겠다는 황당한 소릴 해서 나가라 한것 뿐인데 쪼잔하단 소릴 들은 승철은 어이가 사라졌다. 몸도 머리도 술에 지쳐 힘든데 거기에 정신적 데미지도 입었다. 헛웃음이 났다. 내가 꼬맹이한테 별소리 다 듣네. 친구였으면 내가 쪼잔하냐며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을 텐데. 한 손으로도 가뿐히 들릴 어린애한테 화내는 것도 웃겨 승철은 그냥 넘겼다. 재밌네 하며 눈도 감았다. 남들보다 높은 체온에 금세 이불 안이 따뜻해진다. 아직 시린 삼월에 따뜻한 이불에 몸을 편히 맡기며 속을 비워 편안해진 상태로 잠을 청했다. 수마는 부드럽게 헤엄쳐 승철을 안아주었다. 잠든 승철의 얼굴도 느슨해지며 서서히 잠에 빠진다.

. . . . .

안 나가냐?”

옆에서 빤히 느껴지는 시선에 눈도 안 뜨고 입만 열어 말했다. 옆에 기척이 움찔 떨었다. 승철은 등을 돌렸다.

아저씨.”

“...”

제 이름 이지훈이구요.”

한쪽 눈을 떴다. 얼굴을 돌려 쭈뻣거리며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어린아이를 쳐다봤다.

보석아파트 101502호에 살아요.”

“..그래서?”

저 이제 아저씨 자는 거 봐도 되죠?”

 

 

그 이후 지훈은 자주 승철 집에 놀러왔다.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승철이 있든 없든 내키는 대로 놀러왔다. 학원도 안 다니는 꼬맹이는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집에 벗어던지고 말도 없이 승철 집으로 건너왔다. 버스로 통학하던 승철이가 무거운 가방을 손에 쥐고 터덜터덜 집에 오면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집어먹으며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있던 지훈이 늘 있었다.

또 너냐.”

분명 비번을 걸었던 승철 컴퓨터를 켜가지고 신나게 뿅뿅 거린다. 유행처럼 지나간 크아를. 화려한 화면을 가만 보니 레벨이 높다. 게임 좀 하던 승철보다 월등하다. 승철은 가방을 벗고 지훈 머리통을 한 손에 꽉 쥐었다.

너 집에 안 갈래?”

아파아!!”

아프라고 준 힘에 게임하느냐 키보드에 올려둔 손을 들어 승철 손가락을 잡는다. 떼려고 하다 힘이 안되니 때린다. 승철은 어림 없다는 듯 힘을 더욱 줬다. 지훈의 다리가 바둥바둥 흔들린다.

! 이 아저씨야!!”

꼬박꼬박 존댓말 쓰던 꼬맹이 지훈은 이제 승철에게 반말을 한다. 기분 나쁘면 아저씨라고 망말도 한다.

지금 몇시야.”

머리통을 좌우로 흔들어주고 놔줬다. 얼굴이 울상이 됐다. 화면 속 지훈은 터진 풍선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게임은 끝났다.

“6시밖에 안됐어.”

“6시나 된 거지, 꼬맹아. 끄고 집 가서 밥 먹어.”

아줌마가 밥 먹고 가랬는데.”

울 엄마는 지훈을 유난히 예뻐했다. 집에 맛있는 음식은 지훈 입으로 쏙쏙 들어갔다. 승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가방을 구석에 두고 겉옷을 벗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꽃이 피면서 살을 에우던 추위는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한결 가벼워진 겉옷을 옷걸이에 걸며 체크무늬 셔츠도 벗었다. 게임을 완전히 끈 지훈이 의자를 돌려 승철을 빤히 쳐다본다. 승철은 청바지를 벗다 말고 고갤 돌렸다.

.”

(알고보니) 초등학교 1학년인 지훈은 막 학교에 입학한 어린애답게 말도 많고 웃음도 많지만 가끔 아무말도 안하고 승철을 쳐다볼 때가 있다. 밥을 먹다가, 티비를 보다가, 게임을 하다가, 자다가. 특히 자고 있을 땐 해부하듯 이마부터 턱 아래까지 찬찬히 뜯어본다. 반듯한 이마와 속눈썹이 촘촘하게 맞물린 눈, 둥근 눈두덩이, 높은 코, 두터운 입술 단단한 턱. 자고 있는 승철이가 무섭기까지 한 눈빛에 깰 정도로. 강렬하게. 또렷하게. 눈을 깜박이고 잠에 취해 베개에 얼굴을 묻다 서서히 맑아지는 시야에 눈만 돌려 지훈을 쳐다봤다.

.

잠에 깨어나지 못한 입가근육이 아무렇게나 풀어진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승철 눈을 가리킨다. 처음엔 저 뜻이 눈곱 꼈다는 얘기인줄 알았다.

, 자다 깨면 누구나 다 눈곱 있어.

민망함에 큰소리를 냈던 날 지훈은 고나리같은 작은 손가락으로 승철의 눈곱을 대신 떼 줬다. 어어, 말리기도 전에 지훈 손가락 끝에 묻은 노란 눈곱에 부끄러워 지지야 제 손으로 닦으려는 걸 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제 바지에 슥 닦았다. 그리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승철의 눈을 건드렸다. 갑자기 눈앞에 드리운 손가락에 깜빡 감은 눈위로 말랑한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졌다. 승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지훈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승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낙타 눈 같아.

 

기분이 나빠야 하는건가 좋아야 하는건가 고민을 하는 동안 지훈은 승철 방을 제집마냥 드다 들었고 승철은 이제 제 방에 지훈이 있는 게 어색치 않았다. 없으면 어색할 정도로-하지만 없는 적이 없었다.- 완벽히 스며들었다.

형 술 먹었지?”

아차. 승철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지훈은 용케 보고 눈을 가로로 이렇게 찢고 화를 낸다.

내가 술 먹지 말랬지!!”

야무지게 팔짱도 꼈다.

한 잔밖에 안 먹었어.”

한잔이 두잔 되는 거 나 알아!”

쟤는 말을 너무 잘한다. 요즘 초등학생은 공부하면서 웅변 같은 것도 배우나 보다.

사람이 사회생활 하다보면 마실 수도 있지.”

우리 아빠가 자주 쓰는 변명에 지훈의 얼굴이 엄마처럼 매서워진다.

형은 학교 다니잖아! 학생은 술 먹으면 안돼!”

내 나이가 술 먹을 수 있는 나이라고 설득해도 지훈에겐 통하지 않는다. 학생이 공부도 안하고 무슨 술이야! 고지식한 어른들처럼 손가락을 흔들며 혼을 냈다. 무섭진 않았지만 잔소리가 싫었다. 엄마에 이어 옆옆집 지훈에게까지 듣는 잔소리에 술을 마시고 나면 냄새를 없애기 위해 껌을 씹고 친구 향수를 빌려 뿌리기까지 했다. 미니 페브리즈도 샀다. 물론 숨기는 걸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지훈은 개코였다. 오늘도 말짱 도루묵이 다.

울적해서 마셨다 왜!”

마땅한 변명이 없이 성냈더니 통통한 지훈의 볼이 빵빵해진다.

맨날 울적하대. 자기가 돈을 버는 거야 뭐야.”

지훈이 흥 콧방귀 끼고 야무지게 고개도 돌렸다.

내가 돈은 안 벌어도!! 군대가야 하는 대한남아의 맘을 알아?”

이번엔 진심으로 억울했다.

승철은 두달 뒤 입대를 한다. 반 년 전에 날라온 입대 통지서에 처음으로 입대하는 악몽을 꿨다. 두 달 뒤에 받은 건강검진은 역시나 1. 최상이었다. 되도록 뒤로 미룰까, 빨리 갈까 고민하다 날짜를 정하긴 했지만 하루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입대는 될 수 있는 대로 뒤로 미루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럴 수 없어 힘들 뿐이지만. 그래서 승철은 요새 매일 술로 살았다. 술이 친구였다. 군대에 기역도 보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는데 긴장을 풀어버리면 떠오르는 입대에 한 잔만 하고 술을 마셨다. 술은 음울한 미래를 동화 속 엔딩처럼 아름답게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집 오는 버스길에 겨우 잊었었는데 술 먹었다고 혼내는 지훈때문에 다시 떠올려 버려 승철은 침대에 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가기 싫어. 가야는 하는데. 진짜 가기 싫어. 2년이나 썩어야 한다니. 미친 거 아니야? 나도 빽 있고 싶다. 빽 있으면 안 가도 되는데. , 다리를 분질러볼까. 그러면 뭐해. 다 나으면 가야 하는데. 내 청춘 ㅠㅠ

형 군대가?”

승철은 고개를 올렸다. 지훈이 승철 앞에 서있었다. 승철은 지훈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올려 자기 허벅지 한쪽에 앉힌 뒤 작은 머리통에 볼을 비볐다.

지훈아, 형 군대 가기 싫다~우우~”

군대 안가면 안 돼?”

귀찮게 구는 승철을 밀며 물었다.

안 돼 가야돼. 남자라면 가야돼 ㅠㅠㅠ우우 ㅠㅠ가기시러 ㅠㅠ

승철은 두 팔로 아기냄새 나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지훈은 승철 품에 푹 안겼다. 좋아. 참 귀찮은 옆옆집 이웃사촌이지만 이럴 땐 참 좋다. 위에 형만 있는 승철에게 막내 동생이 생긴 기분이랄까. 곰인형 같은 포근함에 울적한 마음이 조금 풀린다.

내가 갈까?”

너가?”

.”

지훈의 눈이 곧다.

진짜로?”

. 형이 가기 싫으면 대신 내가 가줄게.”

군대가 뭔지도 잘 모를텐데 말은 잘한다. 승철은 지훈의 볼을 한 손으로 모았다. 오리 입처럼 나온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이익! 술냄새!”

지훈이 질색을 했다. 입술을 손등으로 닦는 꼬맹이에게 승철은 맘이라도 고맙다 전했다. 입술에 붙은 술냄새가 싫다며 머리까지 흔든다. 승철은 지훈의 얼굴을 붙잡고 일부러 더 뽀뽀를 했다. 으악 으아악 승철에게 도망치다 침대에 쓰러진 지훈이 발버둥을 쳤다. 승철은 지훈 위로 몸을 눌러 도망가는 얼굴을 따라 뽀뽀를 했다.

최승철! 지훈이 그만 괴롭히고 밥 먹으러 나와!!”

타이밍 좋게 밥 먹으라는 엄마의 외침에 행동을 멈췄다. 몸부림 친 아이의 둥근 배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완전 울 아빠랑 똑가타. 진짜 시러.”

술 좋아하는 지훈의 아버지는 술주정으로 자는 지훈의 얼굴에 뽀뽀를 한다 했다. 승철은 아저씨의 심정을 잘 알 것 같았다.

싫으면 시집가야 하는데?”

개구지게 웃으며 승철은 지훈의 배를 간지럽혔다.

꺄아아아아아!하지 마!, 하지마!!”

지훈이 형한테 싫다 했으니 시집와야겠다!”

으아아아아아하하하하하핫!!”
밥 먹으라고!!”

밥주걱을 들고 문을 벌컥 열며 엄마가 소리쳤다. 지훈과 승철은 깜짝 놀라 히끅, 딸꾹질을 했다.

 

반년을 원인모를(군대)우울증과 원인모를(입대)짜증과 원인모를(!!!)불안으로 술로 살다 한겨울에 입대했다. 방학하고 죽을 듯이 마신 술에 지훈은 못마땅했지만 승철은 술 없이 못 살 것 같았다. 그래, 하루정도 제정신인 상태로 지내자 하다가도 바짝바짝 입가가 말라 그대로 말라 죽을 것 같아서 술 없인 살 수가 없었다. 매일이 술이었다. 신입 때처럼 네 발로 기어들어오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승철은 볼 때마다 취해있었다. 지훈은 승철의 엄마처럼 아이고 시상아, 작작좀 마셔라 하며 승철의 등을 작은 손으로 제법 아프게 때렸다. 아파 아파, 지훈아! 침대 위를 구르며 피해도 그 작은 몸은 어떻게든 쫓아왔다. 꺄아! 승철은 지훈의 옆구리를 공격해 무너지게 한 뒤 무거운 몸으로 지훈을 깔아뭉갰다. 바둥거리는 몸을 구속해 승철은 알코올에 절인 입술로 지훈의 온 얼굴 뽀뽀를 했다.

그래봤자 그것도 한 달이었다. 입대 하루 전이 되어 승철은 이발소를 갔다. 바리깡에 툭툭 떨어지는 머리카락만큼 눈물을 한 웅큼 흘렸다. 이발소 아저씨가 누가 보면 영영 못 돌아오는 줄 알겠다며 뽑아 건넨 휴지에 코도 풀었다. 모자를 쓰고 후드모자 까지 겹쳐 도망치듯 집에 들어와선 바짝 깎은 밤톨머리가 어색해 거울도 못 보고 연신 제 머리만 매만졌다. 잘 정돈된 잔디 머리에 두상이 참 예쁘네, 라는 즐거운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꾸만 눈코입이 아래로 쏠렸다.

괜찮아. 금세 자랄 거야.”

“2년이나 이러고 지내야 하는데?”

“2년도 금세 지날 거야.”

“.....편지 많이 써 줘.”

매일 쓸게.”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훑으며 서툴게 건넨 위로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지훈은 정말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훈련소에서 다들 애인과 가족들 편지를 받을 때 나는 지훈이 편지만 실컷 받았다. 부모님은 누구나 다 가는 군대 사고나 치지 말라는 제법 따뜻한 말로 한 장의 인터넷 편지를 보내신 게 끝이었다. 지훈만 살뜰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 게임하다 컴퓨터 바이러스 먹었어]

.......좀 혈압 오르는 내용들이었지만.

그래도 건강을 묻고 아프지 말라 걱정도 하며 형이 보고 싶다는 말도 마지막 줄엔 꼭 쓰여 있었다. 같이 입소한 동기들이 편지를 뒤에서 읽다 너 아이 있냐고, 애 아빠냐며 놀라거나 놀려대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지훈의 편지는 지옥 같은 훈련소에서 승철에게 좋은 선물이었다.

퇴소를 하고 자대에 배치되기 전 잠깐 만난 부모님과 식사를 했을 때 지훈이 아직도 승철 방에 드나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형 냄새가 제법 빠져 헛헛한 공간인데도 학교가 끝나면 찾아와 컴퓨터 게임(바이러스 먹었다며? 지훈이 엄마가 사람 불러서 고쳤어. 미안하다고.)을 하고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잔다고 했다.

지훈아,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좋지 않아?’

하루는 엄마가 그런 지훈이가 걱정돼 사과를 꽂은 포크를 건네주며 물었었다.

형 이제 집에 없어서 지훈이랑 놀아줄 사람 없고 심심할 텐데. 가서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잖아.’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친구는 학교 가서 매일 볼 수 있지만 형은 이 방에서만 볼 수 있잖아요.’

그 때 지훈이 얼굴 네가 봤어야 하는데. 눈이랑 코가 빨개가지고 눈물 그렁그렁 다는데 얼마나 불쌍한지. 네가 너무 그리운가 봐.”

퇴소는 평일에 했다. 평일에 학생들은 학교를 간다. 초등학교 2학년인 지훈도 학교에 가야해서 오질 못했다.

전화 했을 땐 그런 티 안내더니.”

총을 잘 쏴 전화 찬스를 받은 날, 애인은 없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다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저녁 시간 때라 엄마가 받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받은 건 여보쎄요, 발음이 새는 지훈이었다.

형아.”

지훈아.”

지훈은 안부를 전하는 제 목소리에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형은 잘 지내지? 그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 그럼 다행이야. 전화기 너머로 활짝 웃는 지훈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제법 재미있었다. 호기심에 알짱거리던 선임들이 너 애랑 전화해? 흥미를 잃곤 떠나갔다. 지훈은 재잘재잘 떠들었다. 앞니가 흔들려 이를 뺐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쩐지 발음이 이상하다 했어. 승철은 킥킥 웃었다.

사진 찍어 놔.”

시러.”

앞니 빠진 지훈이를 볼 수 없다는 실망감에 사진을 주문했지만 지훈은 매몰찼다. 한 번만~ 형이 보고 싶어서 그래, ? 제 애교에도 지훈은 끝끝내 좋아 라는 말을 안했다.

귀엽지?”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기 전 엄마가 보여준 핸드폰 사진엔 소심하게 양 브이를 하고 앞니가 빠진 채로 활짝 웃는 지훈이가 있었다.

이거 찍는다고 죽는 줄 알았다.”

귀여워서 찍으려 하니까 자꾸 도망가잖냐. 몰래 몰래 찍으려다 다 걸려서 나중에 너한테 보여주려고 찍는다 하니까 그때서야 겨우 찍었어. 너무 귀여워서 핸드폰을 던질 뻔 했다. 승철은 미소를 지은 채 폰을 엄마한테 돌려줬다.

엄마, 그거 인화해서 나 보내줘.”

 

백일 휴가를 받았다. 아침에 기차를 타고 출발해 오후에 집에 들어와 엄마한테 경례를 하며 신고했을 때 눈물이 흘렀다. 오자마자 우냐, 너는. 엄마는 우는 승철의 등을 어루만졌다. 군복을 벗고 이젠 어색한 평일복으로 갈아입을 때 문이 열리며 지훈이 들어왔다.

왔어?”

소파에 편히 앉아 재미없는 티비를 돌리던 승철은 현관 앞에서 동상처럼 굳은 지훈에게 활짝 웃었다.

지훈이, 형 안 보고 싶었어?”
.. ... 으아아아앙앙아앙

지훈이 울었다.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목을 놓으며 엉엉 울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훈의 모습에 놀라 승철은 달려가 지훈을 안았다. 허리에 팔을 감아 일으켜 신발을 벗기고 엉덩이를 털며 읏차 힘을 주어 안자 팔과 다리로 승철을 꽉 안았다.

그렇게 형이 보고 싶었어?”

얼굴이 벌게지도록 한 번 터진 울음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승철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지훈을 작게 흔들며 달랬다. 지훈의 눈물과 콧물로 침으로 어깨가 잔뜩 젖어 축축했다. 울음 새로 뭐라 말하는 것들은 보고 싶었단 말 뿐이었다.

다 울었어?”

한참을 울고 지쳐 승철에 몸에 기댄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몸으로 울어대 땀까지 흘린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하며 눈물로 더러워진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촉촉한 볼이 미열로 더웠다.

졸리면 자.”

시러어.”
너무 울어 탈진이 올까 물을 먹이고 자라며 등을 두들기자 고개를 젓는다. 자고 일어나면 승철이 사라질까 겁난 모양이다. 목에 두른 팔을 고쳐 잡으며 승철에게 바짝 달라붙는다. 새끼원숭이 같다. 승철은 아기냄새가 나는 지훈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럼 형이랑 같이 잘까?”

지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34일 동안 지훈과 승철은 같이 잤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지훈을 데리러 온 엄마가 손을 내밀어도 지훈은 승철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서 자고 내일 또 놀러오렴. 승철 엄마가 시선을 같이 해 다정하게 말해도 지훈은 승철 등에 얼굴을 묻으며 숨었다. 승철은 곤란해 하는 엄마와 아줌마에게 제가 내일 아침에 집에 보내겠다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아줌마에게 괜찮다 손을 저으며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지훈을 등에 붙인 채 뒤뚱뒤뚱 방에 들어가 한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승철에게 달라붙는 지훈을 끌어안으며 토닥토닥 자라고 가슴을 두들겼다. 지훈은 어린애가 아니라며 짜증을 부렸지만 얼마안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승철의 잠옷을 손에 꼭 쥐고 곱게 자는 어린애에 애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고 나가서 휴가다운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하는데 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오라는 친구들의 전화에 무음으로 설정하며 승철도 같이 눈을 감았다.

 

34일 동안 다시 예전처럼 말 잘하고 술 먹지 말라 잔소리하던 지훈이가 울먹거린 얼굴로 복귀 날 빨리 나와서 꼭 같이 놀자고 약속을 꼭꼭 했는데. 선임이 되면서 휴가가 잦아지자 귀찮은 얼굴로 또 왔어? 심드렁해졌다. 처음 휴가 나올 때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던 애는 어디 갔냐. 이제는 지훈의 게임 컴퓨터가 되어버린 제 컴퓨터를 만지는 지훈에게 뭔가 억울해서 그런 말을 하면 지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든 채 언제 그랬냐며 꽥 소리를 질렀다. 소리에 놀라 귀를 막고 한걸음 물러서면 흥, 콧방귀를 꼈다. 그 모습이 괘씸해 나 친구들이랑 밤 샐 거니까 집에서 자 으름장을 놨다. 그리고 지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말로 나온 승철은 12시가 되기도 전에 붙잡는 친구들을 뿌리친 채 집에 들어왔다. 얼마 마시지 않아 멀쩡한 정신으로 깜깜한 방문을 열었을 땐 제 침대마냥 똑바로 누워 팔다리를 벌린 채 지훈이 자고 있었다. 승철은 조심스레 옷을 챙기고 화장실에 가 씻은 뒤 지훈을 벽에 밀고 옆에 누웠다. 지난 번 휴가 보다 더 커진 지훈이 몸을 돌려 승철의 가슴에 제 팔을 올렸다. 다리까지 올려 편한 자세로 몸을 고치며 자는 말간 얼굴에 뽀뽀를 하며 승철은 지훈을 안으며 눈을 감았다.

 

2년의 군 생활이 끝났다. 전역은 생각보다 그냥 그랬다. 일병 때 선임이 눈을 감으라해서 감았다가 깜깜하지? 그게 네 앞으로의 미래다라는 소리에 몸을 떨었었는데 막상 전역을 하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또 할래? 라고 물으면 절대 괜찮다며 부리나케 도망가겠지만. 얄궂지만 좋은 선임들을 만났고 착한 후임들을 만나 평탄한 군 생활을 보냈다. 떠나는 날 손재주가 좋은 김민규 일병이 손수 모양을 낸 십자수 군 모자를 받고 조금 눈물도 흘리고 기쁨의 포옹을 마치고 돌아온 일상생활은 매우 바빴다. 대학 친구들을 만나고 학교 복학 준비를 하고 아르바이트도 구했다. 어디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2교대 공장에 들어갔다. 문방구 물품을 만드는 곳은 알고 보니 주말까지 잔업으로 가득 찬 힘들기로 유명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물풀에 뚜껑을 손수 닫고 크레용을 두 손에 서너개 잡아 제 위치에 꽂고 스티커를 붙이고 펜을 개수에 맞춰 상자에 담고. 밥 먹는 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일 정도로 바빴다. 하루 만에 손에 물집이 생겼다. 핸드폰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집에 오면 바로 잠에 빠졌다.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라 했지만 승철은 오기가 생겨 개학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다. 2교대라 아침 일찍 나가 오후 늦게 퇴근하니 부모님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그만큼 지훈도 보기 힘들었다.

지훈이가 너 바빠서 못 보니까 섭섭해하더라.”

잔업이 유일하게 없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에 저녁을 먹다 그 말을 듣고 승철은 고개를 들었다. 이번 겨울 방학부터 태권도를 다니기 시작했다던 지훈은 지금쯤 태권도장에서 신나게 발차기를 할 것이다. 흰색 띠를 두르고 도장을 누빌 지훈이가 머릿속에서 쿵쾅쿵쾅 뛰어다닌다. 한 번 얼굴 좀 비춰줘. 승철은 대답대신 식탁 옆 색이 바란 벽지 너머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지훈아.”

그 날 밤에 잠옷 차림으로 들어온 지훈을 의자에 앉히고 시선을 마주친 채 승철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놀러 와.”

승철 손 안에 들어간 지훈의 손가락이 움찔 떨었다.

형 알바 끝나면 대학 들어갈 거고 대학 들어가면 공부한다고 바빠져.”

형 공부 잘 안하잖아?”

맞는 말이라 잠시 벙어리가 된 승철은 정신을 꽉 잡아당겼다.

이제 형 취업준비 해야지. 복학하면 아직 이학년이지만 지금부터 준비해야 안 늦어. 이제 매일 늦게 집에 들어올 거고 그러면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예전처럼 너랑 같이 놀고 밥 먹고 못 해.”

잠은 같이 잘 수 있지?”

요동치는 지훈의 눈동자에 승철은 지훈의 손을 꽉 쥐었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주말에는 놀... 수 있지?”

지훈의 목소리도 마구 떨린다. 승철은 제 엄지손가락을 쥐며 불안하게 쳐다보는 지훈의 얼굴을 쓸며 씩 웃었다.

이제 늙은 형하고 그만 놀자.”

 

 

 

아저씨.”

아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발도 아프고 손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 아 그냥 다 아파. 아 시밤. 겁나 힘들어.

아저씨.”

배고프고 춥고 졸립다. 밥 먹고 싶고 씻고 싶은데 잠부터 자고 싶어. 내 이불. 내 베개. 폭신하고 따뜻한 내 방이 그립다. 엘레베이터 너 언제 내려 올 거야? 나 겁나 힘들다고.

어이 아저씨.”

아 시끄러워. 누가 자꾸 아저씨를 찾는 거야. 아저씨 있으면 좀 반응 좀 하라고. 하 씹. 진짜. 너무 힘들어!!! 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기업이 한 달 만에 망해버린 뒤로 내 인생은 뜻대로 된 게 없어!

귀가 먹었나, 아저씨!”

그 뒤에 넣은 서류 다 떨어지고! 겨우겨우 서류 통과해 면접 보면 얼어서 입도 못 열고 망하고! 부모님 보기 민망해 눈치 보며 알바나 전전하고! 무려 삼년이나!! 취준생으로 살면서 취직하리라, 꼭 합격하면 그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했는데! 시발 이 회사 쓰레기야. 노동 착취해. 엉엉.

아저씨!”
!”
뒤에서 오금을 가격당해 볼품없이 무너졌다. 한 팔엔 서류가방을 들고 다른 팔은 주머니에 손을 넣던 승철은 어찌할 새도 없이 무릎 채 바닥에 찧어 orz 좌절자세로 바닥에 철푸덕 넘어졌다. 겨울에 시린 공기에 언 대리석에 찡한 무릎을 부여잡고 어떤 새끼야! 고개를 올려 노려보았다. 청색 교복바지에 진갈색 떡볶이코트를 입은 학생, 지훈이 무심한 눈길로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 해요.”

언제 불렀어!”
아저씨라고 여러분 불렀잖아요.”

나 아저씨 아니거든?!”

지훈이 아픈 무릎을 안은 승철을 위에서 아래로 훑더니 픽 웃는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명백한 비웃음이다. 네가 아저씨가 아니라고? 눈으로 욕하는 것 같다. 승철은 앞으로 튕겨 나간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요 얄미운 새끼 한 대 때리려 했는데 함흥차사였던 엘레베이터가 땡 열려 지훈이가 들어가는 바람에 못했다. 버튼을 누르고 눈썹을 위로 올리며 고갯짓으로 들어오지 않냐 묻는 지훈에게 안 들어가!! 하려다 입구에서 부는 바람이 차 바로 발을 뗐다. 문이 닫히고 익숙하게 5층을 누르고 위로 올려 숫자가 바뀌는 화면을 보는 지훈을 옆에서 꼬라 보았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순했던 지훈이 요새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부모님 속은 크게 속 썩이진 않는 것 같은데 성격이 바뀌었다 할까. 저만 보면 아저씨라 그러고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고 이제 존댓말도 쓴다. 남처럼 굴어. 속상하게. 거기다 사회 초년생으로 어설프고 지친 승철을 볼 때면 예의 예쁜 보조개를 달고 한쪽 입꼬리를 치키며 우습게 본다. 어린애였을 땐 말을 좀 안 듣긴 해도 저가 좋아서 매일 같이 찾아온 놈이 이제는 늙은이 취급하니까 아직 28살 청청한 나이인데도 아저씨 아저씨 그러니까 짜증도 난다. 너 예전에는 형이라 불렀잖아?! 한 번 아저씨 소리에 진절머리가 나 성을 냈더니 지훈은 똘망하게 눈을 뜨며 아저씨를 아저씨라 말하는데 아저씨라 말하지 말라하면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르지 못하고... 드라마 대사를 인용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저씨만 외치며 나를 괴롭혔다.

왜요.”

눈도 안 돌리고 묻는다. 승철은 지훈 옆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훈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승철을 어깨로 밀며 벽으로 붙었다.

너 요즘 좀 안 예쁘다?”

언제는 예뻤어요?”

지훈은 머리를 쓸며 말했다.

얼굴 좀 치워요.”

볼을 손으로 쭉 민다. 미는 대로 눌린 볼을 잡고 이놈새끼 내 귀한 얼굴을!! 하려다 엘리베이터가 땡 열리고 지훈이가 내려 또 타이밍을 놓쳤다. 승철은 내려 옆으로 꺾으며 저 앞으로 총총 걸어가는 지훈의 가방을 노려보았다. 추위에 지훈의 귀가 빨갰다. 승철은 회색 가방 위 움직일 때마다 달랑거리는 모자를 잡아 지훈의 머리에 덮어주었다. 놀라 선 지훈의 모자위로 손을 올려 수고하라며 (힘을 담아)거칠게 쓸며 앞으로 나갔다. 긴 복도에 제 구두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고 잠깐 보았을 땐 모자를 손에 꾹 쥐고 고개를 숙인 지훈이 복도에 황망히 서 있었다.

 

부장에게 엄청 까였다. 어느 정도 회사가 적응되고 맡게 된 업무에서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분명 몇 번이고 확인하고 확인해서 올렸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컴퓨터 앞에 선배가 부탁한 자료정리를 하던 승철은 저를 큰 소리로 부르는 부장에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부장실에 들어가선 크게 혼이 났다.

내가 확인 못하고 위로 올렸으면 어떨 뻔 한 줄 알아요?!!’

본래 화를 잘 내고 다혈질인 분이라 화내는 것에 익숙했었는데 목에 핏줄이 솟고 보고서로 책상을 내리치니까 엄청 무서웠다. 귀신 말곤 무서운 거 없는 성격이었는데도 부장의 카리스마에 짓눌려 부장실에 나와 화장실에 갔을 땐 눈에 꼭지가 열렸다. 세면대를 꾹 잡고 떨어지는 눈물에 눈을 힘껏 감았다.

울지 않아, 울지 않아. 스스로 최면을 건다. 크게 혼이 났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부장이 했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제 실수였고 제 불찰이었다. 잘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안 되었는데 억울하다고 토로할 이유가 없었다. 승철은 물을 틀어 눈을 닦고 거칠게 휴지로 물을 닦았다. 까끌한 핸드티슈에 여린 살이 쓸려 벌겋게 부었다. 승철은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저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동료들에게 애써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한 실수를 바로잡으려면 일 초가 급했다.

 

깜짝이야.”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들어오려던 지훈이 멈칫했다. 서류가방을 두 손으로 잡고 벽에 기대 어딘가 넋이 나간 듯 한 승철에 놀란 것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제가 들어와도 문이 닫혀도 미동 없는 승철에 지훈은 의아해하며 승철의 팔을 잡았다.

뭐해요?”

미약하게 잡아 흔드는 힘에 승철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친 얼굴에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울었어요?”

지훈의 손이 승철의 눈을 어루만졌다. 장갑을 끼지 않아 찬 손에 움찔 놀란 얼굴이 제법 얌전하게 지훈에게 손을 맡겼다.

무슨 일이에요?”

지훈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 하는 사람이 말이 없으니까 지훈이 자꾸만 물었다. 승철은 대답대신 손을 들어 5층 단추를 눌렀다.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서야 저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안 지훈은 엘리베이터 공간에 희미하게 나는 냄새에 눈을 찌푸렸다.

술 마셨지.”

마시면 안 되냐.”

술 이야기에 그제야 승철의 입이 열린다. 지훈은 승철 가까이 코를 들이밀었다. 킁킁 맡은 사이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

한 번 땅이 울리고 문이 열린다. 지훈은 승철 손을 잡아끌었다. 계속 벽에 붙어있던 승철이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며 지훈의 뒤를 따랐다.

왜 안 돼? 나 이제 학생 아니고 어른인데 왜 술 마시면 안 돼?”

술 냄새는 나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추워서 입이 좀 얼긴 했어도 발음이 또박또박하다.

내가 오늘 부장한테 깨지고 속상해서 술 좀 마셨는데. ? 술 밖에 날 위로하지 않는데 마시면 안 돼?”

지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훈아.”

가서 자요.”

익숙하게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린 문으로 승철을 밀어 넣는다. 승철은 야 이지훈, 발에 힘을 주어 버텨보지만 그래도 술 마셨다고 제 뜻대로 되지 않고 힘없이 몸이 안으로 밀려 문이 닫혔다. 쨍한 주황불빛에 눈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연 승철은 건너건너 닫히는 문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저씨, 재미 들렸어요?”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럭키 하고 버튼을 누르다 안에 주저앉은 인영에 지훈은 또 깜짝 놀랬다. 익숙한 코트와 익숙한 정수리에 그 사람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보고 퍽 짜증을 내며 안에 들어왔다. 지난번과 달리 진한 알코올 냄새에 코를 움켜쥐었다. 말을 걸었는데 반응이 없다.

어이, ?”
발을 들어 엉덩이 부분을 툭툭 쳤다. 벽에 쓰러질 듯 기댄 몸이 앞으로 미끄러지다 벽에 이마를 박는다. , 제법 난 큰 소리에 지훈이 놀랐다. 아읍씨, 아파아. 나무늘보같이 뒤늦게 이마를 부여잡고 승철이 낑낑 울었다. 몸을 피다 중심을 못 잡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려 해 지훈이 뒤로 서 다리로 막았다.

왜 또 술이야.”

빨간 이마를 부여잡은 얼굴이 위로 향했다. 승철은 흐리멍텅한 눈에 힘을 주려 애썼다.

지훈이네.”

술 마시지 말라 했잖아.”

회식인데 어떠케 그래.”

신입 사원 옆자리에 앉은 부장님 때문에 회식 내내 술을 받아야 했다. 취준생일 때 술을 잠시 멀리 했었던지라 그사이 약해진 간은 들이 부운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지금 승철의 몸을 도는 피는 99프로 알코올로 되어있을 것이다.

변명하지 마. 마시고 싶어서 마신 거잖아.”

지훈이 일축했다. 그것도 맞아. 부장님은 술을 크게 강요하지 않았다. 거절 안 한건 승철이었다. 승철이 베시시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알코올 냄새가 진하다. 지훈은 승철의 머리를 헤집으며 5층 버튼을 눌렀다. 부유감에 승철이 얼굴이 구겨진다.

참아요. 여기서 토하면 죽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입을 막는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듯 뛰쳐나가는 승철의 뒤로 지훈이 발을 빨리했다. 도어락에서 헛손질하는 손을 치워 대신 비밀번호를 눌러줬다. 열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나간다. 아무렇게나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가방을 든 지훈은 끔찍한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못 살아. 덜 닫힌 문을 열어 변기를 붙잡는 넓은 등에 손을 올려 두들겼다.

참지 말고 토하고 싶으면 다 해요.”

 

물을 내리고 이를 닦겠다는 승철에게 칫솔을 쥐어주고 컵을 자꾸 흘리길래 손 위로 겹쳐 잡아 입 헹구게 하고. 주체 못하는 몸으로 휘청대며 침대위에 쓰러진 승철 양말도 벗기고 옷도 벗겼다. 옷은 안 돼. 셔츠 구겨질까 단추를 풀려했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얼굴을 붉히며 등을 보인다. 지훈은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쉬고 승철 팔을 잡아 당겨 저를 보게 한 뒤 셔츠를 벗겼다.

나 덮치는 거야?”

지훈이 손이 멈췄다. 팔 한쪽을 빼고 있던 지훈은 눈만 올려 승철을 올려다봤다. 활짝 열린 가슴 앞으로 벗은 팔로 가리며 게스츠름하게 눈을 뜬다.

그러면 안 돼에-”

지훈은 팔을 마저 뺐다. 셔츠를 탁탁 펴 옷걸이에 걸고 승철 발아래 있는 이불을 위로 올렸다.

자요.”

같이 자자.”

지훈의 소매를 잡는다. 지훈은 어정쩡하게 일어나다 다시 앉았다. 승철이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형이랑 같이 자자.”

“ ”

같이 자자.”

“ ”

오늘 엄마아빠 없어.”

형 외로워. 덮은 이불을 열어 침대 옆을 툭툭 친다. 검은 날개가 팔랑인다. 지훈은 이불을 당겨 잘 덮어주고 승철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훈아-”

자지 말자고 한 사람은 형이었거든요.”

무슨 말이야.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술이 닿았다. 승철의 눈을 가린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철은 숨을 들이마신 채 멈췄고 교복 소매를 잡은 손가락은 잘게 떨었다. 잘 자요. 손이 떨어진다. 승철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지훈은 승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저린 다리를 손으로 두들기고 불을 끄고 나간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그 일련의 소음에도 승철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알코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입술 사이로 느리게 공기가 들어갔다 나왔다.

 

 

티켓을 받았다. 외국 유명한 연주자가 내한한 공연이라 했다. 썸녀랑 보겠다고 부장 눈치 보며 근무 중에 티켓팅 하던 선배가 오늘 초췌한 얼굴로 주길래 티켓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았다. 꼭 나대신 봐줘. 손까지 잡으며 부탁하니까 거절할 수 없어 일단 받았는데 애인이 없는 승철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음악 특히 클래식에 무지했지만 이런 것에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어 꼭 보고 싶긴 한데 혼자 가기가 그랬다. 날짜도 하필 평일이다. 회사 끝나고 부지런히 가면 볼 수 있긴 한데 그거 보러 간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다. 다른 선배들 줄까, 했지만 회사 사람에게 주다가 선배가 볼까 그러지도 못하고. 팔아버릴까 해도 그런 거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팔릴지도 모르겠고. 골치가 생겼다.

 

 

퇴근하고 15층에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승철은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폰에 시선을 둔 채 걸어오는 지훈이었다. 갈색 하복 교복을 입은 지훈의 목과 얼굴 옆으로 땀이 맺혔다.

너 볼래?”

갑자기 내민 티켓에 지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티켓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승철을 보고 미간을 모은다. , 너는 나만 보면 그러냐. 얼굴 미묘하게 굳고. 경계하고. 누가 너 잡아먹는대. 짜증이 나 승철은 지훈 폰 위로 던지듯 티켓을 올렸다.

뭐에요?”

음악회 티켓. 선물 받았는데 난 못 가서 너 가라고.”

같이 갈 애인 없어요?”

티켓을 앞뒤로 번갈아 보던 지훈이 물었다. 승철은 듣기 싫은 질문에 대답 대신 짝다리를 짚었다.

.”

지훈이 비웃는다. 승철은 울컥, 성을 냈다.

야 비웃지마.”

안 웃었어요.”

그 입술이나 단속하고 말하지. 승철이 지훈이 종아리를 쳤다. 지훈은 얼굴만 찌푸릴 뿐, 여전히 삐뚤어진 입술을 고칠 생각을 안 했다. 그저 티켓을 다시 승철에게 내밀었다.

뭐야.”

안 봐요.”

?”
관심 없어요.”

너 클래식 좋아하잖아?”

지훈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얼굴이다. 승철은 티켓을 지훈에게 밀어 거절했다.

너 내가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아는데 내가 네 엄마보다 널 더 잘 알거든.”

뭘 엄마보다 더 잘 알아요.”

거절하지 말고 애인이랑 같이 들어.”
애인 없어요.”

그건 나랑 같네.”

지훈의 볼우물이 움푹 파인다.

그럼 나랑 같이 들을래?”

?”

승철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 그런 거, , 번도, 안 가서, 가고 싶은데, 좀 부끄럽거든. 그래서 너도, 같이 가면, 좀 낫지, 않을까 하고.”

-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조용한 둘 사이를 가른다. 승철은 땀이 흐르는 뒷목에 셔츠를 빼며 올라탔다. 뒤에 따란 탄 지훈이 대신 버튼을 누르고 옆으로 선 승철을 마주 보며 입을 길게 가로로 찢으며 웃었다.

늙은 형하곤 안 놀아요.”

 

 

 

30살이 됐다. 승철은 여전히 개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 울면서 이를 갈면서 일 년만 참자며 다녔었는데 어느덧 3년차다. 일 년만 있으면 대리다. 무려 최 대리다. 회사가 좋아서 다니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 이깟 회사 때려치겠다는 마음은 같은데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새 출근준비를 하고 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캥거루족 최승철의 1순위 목표, 독립을 위해서 그는 더럽고 치졸한 사회를 견딘다. 오늘도 개처럼 돈을 번다. 돈만 본다.

최 사원, 소개팅 할래?”

그러다 소개팅 제의를 받았다. 선배와 함께 외근을 하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선배가 며칠 전에 산 새 차를 얻어타고 삐까뻔쩍한 내부에 욕심이 나 이곳저곳을 쓸다 저를 귀엽게 보던 선배가 그리 말을 걸었다. 승철은 갑작스런 소개팅 제의에 큰 눈을 깜박였다.

소개팅이요?”

. 최 사원도 이제 결혼해야지.”

인생에 들어본 적 없는 결혼에 경직됐다. 선배는 승철의 반응에 뭘 그리 놀래, 어깨를 쓸었다. 승철은 아니 결혼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선배는 껄껄 웃었다.

“30살이면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안 그래? , 최 사원 애인이라도 있어?”

승철은 우물쭈물댔다.

꼭 결혼까지 아니어도 한 번 만나봐. 언제까지 솔로로 살아서 부모님 속 썩일 건데.”

아직까지 부모님이랑 살고 있다며? 30살에 그러면 그거 불효다. 바뀐 신호등에 기어를 바꾸며 선배가 말했다. 승철은 안전벨트를 쥐며 곤란한 얼굴로 흘려 웃었다.

 

단지 입구에서 데려다 준 선배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걸어온 승철은 제 아파트 입구 계단에 있는 두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패턴이 화려한 남녀 교복이 위아래로 나란히 서 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가 아래다. 딱딱한 얼굴의 남자가 위다. 해가 짧아진 가을에 반쯤 어둠에 잠긴 아파트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승철은 어쩔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선 저 두 사람을 비켜가야 하는데 그러면 제가 그 두 사람만의 시간을 깨뜨리는 불청객이 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게 승철은 집에 얼른 들어가고 싶다. 직장인에게 가장 편안한 곳은 집이다.

나 너 좋아해.”

. 승철은 몸을 돌렸다. 우물쭈물하다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었다. 승철은 귀를 막고 단지 입구로 걸었다. 집에 가고 싶지만 저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풋풋한 분위기, 공기, 고백들. 그것을 어른인 제가 가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발에 밟힌 나뭇가지에 놀란 승철은 파드득 몸을 떨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배가 눈치 없이 울었다.

 

안녕하세요.”

장롱에서 꺼낸 가디건을 입고 소매에 붙은 먼지를 떼던 승철은 옆에서 거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지훈이었다. 교복이 아닌 캐주얼 복에 의아하다 지훈 손에 든 문제집을 보고 혼자 수긍했다.
공부하러 가?”
시험이니까요.”

문과는 시험 쉽지 않아?”

지훈의 눈이 가느다래진다.

문과 무시하지 마요.”

, 미안.”

사과하는 승철에 지훈이 승철을 바라본다. 평소라면 얄밉게 깐족댔을 사람이 너무 쉽게 사과한다. 이상하다. 가만 보니 주말이면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거나 영화 보는 사람이 누가 봐도 신경 쓴 차림이다.

어디 가요?”
지훈아, 너 왜 문과 갔냐?”

지훈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을 못한다기보다 갑작스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승철은 아에 지훈쪽으로 몸을 돌리고 팔짱을 꼈다. 대답을 듣겠다는 뜻이다.

너 내가 수학 가르쳤을 때 재밌다고 이과가겠다 했잖아? 그런데 왜 문과 갔어?”

 

지훈이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수학만 유달리 못한다며 지훈 아주머니한테 수학 과외를 제의받았다. 첫 입사한 회사가 망하고 알바를 전전하며 취업준비를 하고 있던 승철은 그 제안에 당황했다. 승철이가 수학은 곧장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마침 이웃이겠다, 또 둘이 친하기도 하겠다며 부탁을 하는 아주머니께 저희 절교 했는데요 라는 말은 못하고 얼떨결에 과외가 성사되어 승철은 몇 년 만에 지훈을 만났다.

오랜만이야.”

“ ”

형식상 꺼낸 문제집을 펼치고 저를 쳐다보지 않는 지훈에 승철의 목 뒤로 땀이 흘렀다. 그 때 그 일 이후로 인사도 없고 왕래도 없었던 터라 일 년에 몇 번밖에 못 봤다. 그전에 매일같이 본 게 지훈의 순 노력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안 승철은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손을 들어 인사하는 저를 보지 않은 척 지나가는 지훈에 뻘쭘함을 느꼈다. 저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던 지훈에게 그만 놀자 라는 소리가 얼마나 큰 상처일지 말할 때는 몰랐는데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크게 느껴졌다. 난 그저 제 또래랑 더 놀라고 나름 신경 써서 말한 건데. 제 진심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지훈과 (이 나이에 이런 말 하기 우습지만)절교를 했다. 한편으론 억울했지만 또 한편으론 미안했다. 지훈이가 워낙 어른스럽고 제 말을 잘 들어서 아직 어린 아이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실수를 했다. 할 수 있따면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승철은 오랜만에 지훈을 만나 과외를 하는 날 훌쩍 큰 지훈이 익숙치 않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여전히 볼은 통통했고 얼굴은 동그랬지만 길어진 팔다리가 아이 티가 벗겨진 분위기가 제가 아는 지훈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아 속상했다. 승철은 목소리를 높이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지훈이 과외 형이 할 거야. 어때?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있으니까 좋지?”

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폐가 갈비뼈에 짓눌릴 것 같다. 갑갑한 공기에 무의식적으로 주먹으로 가슴을 치려던 걸 손을 내리고 한숨을 삼켰다. 옛날처럼 형아-형아- 하며 달라붙는 건 기대 안했어도 이정도까진 아닐 거라 생각했어서 승철은 머리가 아팠다.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꾹꾹 누르며 과연 이 과외를 계속 제가 할 수 있을지 승철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바뀔 수도 있죠.”

승철은 흐응, 콧바람을 불었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었다.

그건 왜 묻는데요?”

궁금해서.”

 

과외는 생각보다 오래 갔다. 지훈이 잘 따라왔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본격적으로 과외에 들어가면 말랑해졌다. 지훈은 승철이가 조곤조곤 말하며 펜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경청하였고 승철이가 풀어보라 하면 곧장 풀었다. 가끔 막히는 부분에선 혼자 끙끙 앓기도 했다. 작은 머리통을 부여잡으며 온 얼굴 근육을 이용해 표정을 구기며 푸는 아이가 귀여워 승철은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소리 내어 웃으면 지훈이 자존심이 다칠까, 자기를 비웃는다고 여길까 싶어서 그랬다. 그러다 지훈이가 고개를 돌려 알려 달라 부탁하면 미소를 지우고 그 다정한 목소리로 처음부터 하나씩 짚어주었다. 지훈은 머리가 좋아 다 알려주기도 전에 알아듣고 바로 지우개로 풀던 식을 지웠다. 까맣게 물들어 동그랗게 말려간 지우개똥을 손으로 털고 그 위를 뒤덮으며 움직이는 연필의 꼬리를 눈으로 좇으며 승철은 지훈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디 가요?”

지훈이 화제를 바꿨다. 승철은 팔짱을 풀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단추를 누른다. 말이 없다. 지훈은 그런 승철을 기이하게 바라본다.

소개팅.”

지훈의 얼굴이 일순 굳어진다. 반짝이던 눈동자가 날카로워지고 사나운 눈빛으로 승철을 노려본다. 승철은 그런 지훈의 눈빛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수학 점수는 한 번에 올랐다. 기뻐하는 아주머니께 초등학교 수학이라서 금세 티가 나는 것 뿐이라며 더 얹어주는 보너스를 거절했다. 사실 돈 한 푼이 아쉽고 과외하는 학생에 성적이 오르면 선생에게 더 얹어주니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지만 제자가 제가 제일 아끼는 동네 동생이라 굳이 받고 싶지 않았다. 뭐 또 이유가 있자면 수학 점수를 알려주며 수줍게 웃던 지훈이 때문이리라.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보고 그 옛날 적처럼 볼우물이 깊게 파이도록 웃는 미소에 그동안 속으로 쌓였던 섭섭함이 씻겨나갔다. 승철은 지훈의 얼굴을 붙잡고 뽀뽀를 했고 지훈은 발버둥을 치며 승철을 밀었다.

우리 지후니!!”

아악! 하지 마!”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죽을 것 같아.

오랜만에 마신 술에 시야가 어지럽다. 좋아했고 잘 마셨었는데 30살이 되자 이제 술도 안 받는다. 1병, 일곱하고 반잔에 몸이 휘청거린다. 높지 않은 계단에 자꾸 발을 헛디뎌 올라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결국 계단에 주저앉았다. 쌀쌀한 가을날씨에 가디건을 목까지 여미며 쭈그렸다. 살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서도 배 깊은 곳부터 훅훅 올라오는 열기에 뱉는 숨이 뜨겁다. 왁스로 멋을 낸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승철은 괴로워했다.

.”

제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불렀다.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길래 한 번 더 물렀다.

야 이지훈.”

“ ”

어디 가. 여기 앉아.”

고개도 못 가누고 앉은 계단 옆을 바닥으로 쳤다. 두 개의 다리가 우뚝 서있다.

그냥 가면 죽는다.”

올라가는 왼발에 한마디 했다. 왼발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한숨이 위에서 내려왔다.

나 술 먹었어.”

“ ”

혼 안내?”

애인한테 해 달라 해요.”

애인 없는데.”

소개팅 한 여자 있잖아요.”

소개팅 안 갔어. 혼자 술 마셨어.

올라가려던 다리가 위치를 바꿔 내려왔다. 검은 슬렉스를 입은 바지가 안쪽으로 주름이 지고 지훈이 승철 옆으로 앉았다.

술 먹었으면 곱게 집에서 자요.”

그거 말고.”

한 참의 침묵이 흘렀다. 승철은 무릎에 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이마를 대며 눈을 감았다.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몸이 빙빙 돌아갔다.

소개팅 왜 안 갔어요?”

그것도 말고.”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아 가을바람을 맞는다. 승철은 얼굴만 돌려 저 멀리 어둠에 시선을 던지는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을 땐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웃는 아이는 웃지 않으면 제법 무서운 얼굴이 된다. 예쁘게 휘던 눈은 가로로 길게 찢어지고 예쁜 입술은 단단하게 붙는다. 아직 젓살이 빠지지 않았지만 제법 어른 티가 났다. 승철은 새삼 둘 사이의 세월이 느껴졌다.

너 왜 나한테 존댓말 하냐?”

승철의 갑작스런 질문에 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꼬리가 눈썹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늙은 형이랑 놀지 말자는 말은 왜 아직도 기억하고?”

술 먹지 말라는 말도 안하고.

같이 자자니까 피하고.

수학 과외했을 땐 형따라 이과가겠다 하더니 문과나 가고.

내가 싫어?”

피식 웃는다.

아뇨.”

또 존댓말.”

두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린다. 일자로 뻗은 눈가가 예쁜 곡선이 됐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

좋아.”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말고.”

.”

이제는 승철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머리까지 왕왕 울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에취, 기침을 했다.

 

 

최 사원이 최 대리가 됐다. 직급이 올라가면서 조금 더 올라간 월급에 승철은 또 다시 퇴사를 못 했다. 대리라는 직급에 맞게 일이 많아지고 야근도 늘어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늘어나면서 양복 안쪽 주머니엔 사직서가 자리잡았다. 몇 번이나 매만져 손때가 묻은 사직서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주장을 했지만 통장에 찍힌 월급에 꼬리를 감추고 더욱 깊게 가슴 안 쪽에 묻었다.

다행이라면 이 부장이 회사에서 새로 차린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점. 이 부장 대신 새로 들어온 방 부장은 따뜻한 사람으로 잘못을 해도 엄히 꾸짖지 않고 나긋한 말투로 잘못한 점만 가리키는 신사였다.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제 몫의 일을 다 했고 성과도 좋았다. 그의 실력과 인성에 좋은 평판이 늘어 최 대리가 있는 부서는 점점 성적이 올랐다. 그래서 야근이 늘었지만. 사람이 좋으면 그래도 일할 맛은 나지 않는가.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읽고 가방 뒷주머니에 폰을 넣은 승철은 깜깜한 아파트 입구에 나란히 선 두 인영에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이 되기 전 쌀쌀한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가 머리 높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이거 언젠가 나 겪어보지 않았어? 승철은 본능적으로 풀숲 뒤로 몸을 가렸다. 승철에게 등을 보인 여자 앞에 한 계단 위에 있는 남자는 양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무심하게 시선을 내렸다.

받아달라는 건 아냐.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알고 여태껏 받은 고백 다 거절한 거 아는데 못 참겠어서 고백한 거야.”

그 때는 귀를 막고 도망가느냐 못 들은 뒷말이 혹시 이것이었을까 승철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시선을 올리며 상상해봤다.

11년의 순정 모르는 사람 없는 거 알아?”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일순 경쾌해진다. 일부러 우울한 감정을 벗어버리려 속안에서 부채질을 하며 열심히 에너지를 끌어 모으는 거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야?”

여태껏 조용했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승철은 눈을 굴렸다. 두 사람만의 대화에 자기가 언제까지 여기에서 들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잘못 움직였다가 나뭇가지라도 밟아 소리를 내면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몰래 듣고 있던 걸 들킬 것 같았다.

“11년 째 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

승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받아주길 바래서 고백 한 건 아니지만 받길 원하는 상대의 마음이 자기에게 향하지 않으니까 심술부리는 거다. 여자아이가 얼마나 지훈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몰라도 강산도 변한다는 11년이라는 세월에 그 감정이 순수하게 남아있는지 그 감정이 옳은 건지 창으로 찌르는 거다. 마음이 불편하다. 남들에게 보여준 적 없이 불면 날아갈 새라 아끼던 마음을 남들이 마음대로 열어 흙 묻은 발로 짓밟은 기분이다.

말하면 네가 알아들어?”

?”

지훈의 말투가 뾰족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우습게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표정은 여기서 보이지 않지만 여자 아이의 찌푸려진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네가 쉽게 이해할 감정 아니야.”

. 고작 사랑이야. 순정이라 표현해 봐도 네가 하는 건 고작 사랑이라고.”

지훈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숨 쉬는 이유가 되어버린 사람이야.”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다.

 

"또 다시 내 숨을 막아버린 사람이고.”

 

뱉지 못한 숨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심장을 찌른다.

 

이 말에 담긴 무거운 감정을 네가 알아?”

 

눈을 가렸다.

 

모르면 알려고 하지 마.”

 

입술을 물었고

 

알면 입을 다물어.”

 

눈물을 삼켰다.

 

쉽게 지껄이지 마.”

 

그리고

 

날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나에게 가진 감정을 내가 책임져야할 이유 없어. 그러니 꺼져."


나도.

 

 

 

아저씨 솔직히 말해 봐. 이거 재미 들린 거지?”

편의점에 갔다 온 지훈은 1층에 놓인 엘리베이터에 럭키, 속으로 기쁨을 표하며 버튼을 누르다 엘리베이터 벽에 얼굴을 묻고 서있는 승철에 한숨을 푹 쉬었다. 열리자마자 풀풀 나는 술냄새에 진절머리가 난다. 잔소리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을 안 하는데 제 입만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지훈은 알코올 냄새가 그득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승철의 팔을 잡고 돌렸다. 순수하게 돌아간 몸은 눈을 감고 있었다.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얼마나 마셨어?”

한 병.”

소주맥주 다 합해서.”

세 병.”

양주는?”

네 병.”

점차 늘어간다. 감긴 눈 한쪽만 슬며시 떠 지훈의 얼굴을 살피다 험악한 얼굴에 다시 얌전히 감긴다. 지훈은 승철의 속눈썹을 잡아당겼다.

앗 아파!”

찡한 통증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지훈은 손에 묻은 속눈썹을 입바람으로 불어 날리곤 팔을 뻗어 벽에 몰아붙였다. 지훈 팔과 엘리베이터 버튼쪽 벽에 갇힌 승철은 지훈의 어깨 위로 두 팔을 올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아니~ 새로 후배가 들어왔다고 망년회 겸 회식을 하자는데 그걸 거절할 수가 있니. 더욱이 그 후배가 내 직속 후배인데 사수인 내가 빠지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적당히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아니 후배가 제 술 좀 받으라며 자꾸 건네잖아, ? 선배 덕분에 회사 적응하기가 쉬웠어요, 정말 감사해요 하며 주는데 너라면 그걸 안 받아?”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내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어필하는 거야.”

편의점에 간다고 대충 입은 지훈의 맨투맨 목 칼라 부분을 매만진다. 오늘 바람 제법 춥던데 훤히 드러난 목에 감기 걸릴라 승철의 두 손으로 목을 덮는다. 지훈은 귀찮다는 듯 승철의 손을 떼낸다. 아래로 처진 승철의 눈이 위로 훅 향한다.

너 왜 나보고 아저씨라 해? 나 아저씨 아니거든?”
“31살이 술 먹었으면 아저씨지.”

술 안 먹으면 아저씨라 안 부르냐?”

, 형이라 부르는데?”
지훈의 얼굴이 당당하다. 되물은 승철이 얼굴만 빨개진다. 지훈은 그런 승철을 빤히 쳐다본다. 집요한 시선에 승철이 눈이 돌아간다.

어디 갔다 왔어?”

화제를 바꾸려 물었다. 지훈은 벽을 짚던 손을 뗐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 승철 손에 쥐어줬다. 승철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만히 종이에 적힌 글씨를 따라 읽던 승철의 얼굴이 펑 터진다.

"이지훈!"
아직까지 5층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고 버튼을 누르다 와락 안겼다. 강한 힘에 몸이 휘청거려 안은 승철의 팔을 붙잡다가 얼굴에 뽀뽀세례를 받았다. 쪽쪽거리며 눈이고 코이고 볼이고 마구 쏟아내는 뽀뽀에 지훈이 기겁하며 승철을 힘껏 밀었다.

술 먹고 하지 말랬지!!”

알코올 냄새가 나는 볼을 손으로 마구 닦았다. 진짜 술을 전부 버리던가 해야지.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알코올 뽀뽀를 받은 지훈은 술이 제일 싫다. 알코올 냄새도 싫고 맛도 싫고 다 싫다. 수학여행 가서 짖궂은 친구들이 몰래 술을 들여와 마시자고 해도 거절했다. 애들은 촌놈이라며 놀려댔지만 지훈은 몸에 좋지도 않는 알코올이 뭐가 맛있다고 마셔대는 그들이 우스웠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과 놀지 않아도 지훈에겐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이 닦으면 해도 되지?”

그런데 승철은 못 끊는다. 못 끊겠다. 끊는다고 끊겨지는 것도 아니라서 지훈은 한숨으로 불만을 흘려버렸다.

해도 돼?”

대답 대신 지훈이 내렸다. 언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 승철은 뒤를 따라 내리며 진심으로 궁금해 했다. 그러다 제 앞에 있는 지훈의 휑한 뒷목에 두 팔을 뻗어 꼭 끌어안았다. 으악, 놀란 지훈이 승철이 가슴에 머리를 박았다.

뭐 해.”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뭐를.”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을.”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그래야 언제가 천일이지 만일이지 알잖아.”

승철의 지훈의 말랑한 볼을 꼬집었다. 입이 옆으로 당겨지며 벌어진 입으로 지훈은 승철이 하는 말을 기다렸다.

너를 처음 만난 날은 생생히 기억나는데 언제 마음을 가지고 나누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떠올라봐도 모르겠는 거야. 저 때인가? 하면 더 뒤인 것 같고. 아 이건가 보다 하면 아니 그때도 이미 그런 마음이었는데 싶으니까. 그래서 과거로 너가 초등학생이고 내가 대학생일 때까지 돌아갔는데도 결국 못 찾았어.”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승철은 고개를 숙여 지훈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기겁하며 도망가는 지훈에 깔깔 웃는다.

네가 많이 좋다고.”

그런 건 말로 해. 술 먹은 입술로 하지 말고.”

기분 나쁜 얼굴로 입술을 소매로 닦으며 집에 들어가려는 지훈의 손을 잡아 막는다. 경계 하며 몸을 옆으로 도망가는 지훈을 팔로 끌어안아 제 집으로 이끈다.

우리 엄마아빠 여행가서 모레까지 집 비어.”

손에 반쯤 구겨진 상자를 지훈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지훈의 귀가 붉었다.

부끄러움 많은 네가 이걸 샀는데 써줘야 하지 않겠어?”

엉덩이를 두들겼다.

술 먹은 사람 상대로 하고 싶지 않거든.”

이 빡빡 닦고 깨끗이 씻어서 술 냄새 완전히 지울게.”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딕- 틀렸다는 알림음에 에? 놀란 승철 대신 지훈이가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른다. 비밀번호 바뀐 거 아직도 못 외웠지? . 헷갈려. 그러다 집 못 들어가. 네가 있잖아. 내가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럼 기다리지 뭐.

문이 닫힌다. 조금 기다리면 안쪽에 하얀 불이 들어온다. 얼마 안 있으면 물소리가 나고 또 있다 보면 스위치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작게 들렸던 소음은 사라지고 빛과 소리가 사라진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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