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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ah하네요.

[우쿱] 청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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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쿱] 청혼

다몬드 2016. 10. 22. 21:00

 

 

 

 

[지훈승철/우쿱] 청혼

 

 

w. 안다미로

 

 

 

 

 

 

 

첫눈에 반했다.

짧은 다리로 힘껏 뛰어다녔던 동네가 제 세상에 전부였던 시절에 내 심장을 콱 움켜쥐던 예쁜 사람이었다. 통통한 얼굴과 흙에 문대어 물든 바짓단이나 하늘로 퐁퐁 솟은 짧은 머리카락이 제 학교 친구들과 별 차이가 없었는데도 밤하늘 별님처럼 반짝거렸다. 하늘 위에만 둥둥 떠다니는 별님이 내 옆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급히 눈을 돌렸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처럼 왼쪽 가슴에서 심장소리가 쿵쿵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안녕, 수줍음을 숨긴 씩씩한 인사로 다가온다. 나는 모래를 꽉 쥐며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친구랑 한참 놀던 모래 위를 잠깐 배회한다. 눈치가 그리 빠른 편이 아닌데도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걸 느꼈다. 어 안녕. 나는 바보처럼 세 박자나 쉬고 인사에 답했다. 씩씩하던 네 인사말과 달리 옆집 친구 아기처럼 옹알옹알 입안에만 맴돌아 아래로 뚝 떨어진다. 그 당시 동네 골목대장을 자청하던 용감무쌍한 나였지만 처음 보는 네 앞에선 선생님 앞에 선 사고 친 초등학교 일학년처럼 부끄러웠다. 그런 나를 모르고 너는 같이 놀아도 되냐 물었다. 나대신 친구가 응! 같이 놀자! 대신 답했다. 너는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고 나는 벌떡 일어나 네 자리를 만들었다.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식빵처럼 납작하게 뭉개는 어른들의 엉덩이만큼 제 엉덩이도 꽤 무거웠는데도 불구하고 내 엉덩이는 양쪽에 날개를 달고 붕 떠올랐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작은 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보고 활짝 웃는 네 얼굴이 정월대보름의 둥근 달처럼 가득 내 눈에 담겼다. 아까부터 바쁘게 뛰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급히 모래를 헤집었다. 내 몸에서 사라진 심장을 찾으려고 바들바들 떨며 모래 위에서 방황하는 손가락 끝에 같이 조물 거리던 네 손가락이 닿았다. 작은 몸에서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장 무섭고 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 우린 드디어 같은 반이 됐다. 나 하면 너, 너 하면 나가 자동으로 따라붙는 절친이었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못하다 마지막이 돼서야 같은 반이 됐다. 우리는 또 반에서 반으로 쉬는 시간마다 뛰어다닐 필요 없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젖어 책상 2개를 붙이고 신나게 떠들었다. 남아가 여아보다 많아서 다들 남녀 짝꿍이었을 때 우린 자처해서 남자짝꿍을 했다. 다른 남자짝꿍들은 작은 서운함을 내비추거나 짜증을 부렸지만 우린 우리가 붙어있단 것이 큰 기쁨이었다. 유일하게 선생님만이 붙은 우리를 걱정하며 쳐다보았지만 큰 말썽은 일으키지 않아 일 년 동안 짝꿍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선생님은 짝꿍 정하기를 매우 귀찮아하는 바른 선생님이었다. 잠자는 시간 빼고 가끔 서로의 집에 잠자기도 하며 매일 붙어있는데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더 붙고 싶어서 뭐든지 함께했었다. 화장실도 같이 가고 태권도 학원도 같이 다니고 같이 떡볶이도 먹고 게임방도 같이 갔다. 가끔 다른 친구가 붙어 어울리기도 했지만 한참 놀다가 보면 끝엔 둘만 남았다. 실컷 놀고 집에 갈 때면 하루 종일 웃느냐 아픈 광대를 두 손으로 문지르던 너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몇 년 전 처음 보던 땅에 떨어진 별님은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너의 귀를 움켜쥐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손 안에 가득 들어오는 작은 귀가 내 손 안 가득 잡히면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너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잡은 귀에다 바보 멍청이 말미잘! 외치고 우다다 도망갔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네가 정말 좋아! 그 말은 몸만 큰 허세 가득한 육학년이 된 나에게 신종 고문 같았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너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들었다. 잡히면 죽는다! 내가 지른 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이 곧 도깨비처럼 뾰족해져서 심상치 않게 달려오면서도 네 입술이 방긋 웃고 있으니까. 쫒기고 쫒아가는 집에 가는 길 위로 사랑을 쌓았다.

, 너는 종종 옛 이야기를 꺼내다보면 그 길이야기를 했다. 풀냄새가 나는 마른 돌담이 쭉 늘어진 그 길에 쌓였던 우리의 추억을 한 겹 한 겹 펼쳐서 눈을 이만큼이나 접으며 즐겁게 추억했다. 학원을 마치고 내려올 줄 모르던 해님이 눈을 깜박이며 잠들 때쯤에 붉고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서로 손을 잡으며 당시 유행했던 개그를 쳤다. 말다툼을 하고 기분이 상해 앞뒤로 이만큼이나 거리를 두고 걸어가기도 했다. 엄마한테 혼나 동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엉엉 우는 네 뒤를 조용히 따라가기도 했다. 태권도 검은 띠를 따고 신나서 서로 치고받으며 길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로 같은 곳이면 좋겠다고 설사 우리가 떨어진대도 영원히 함께 하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적도 있다. 그때 처음 한 뽀뽀는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아직 발표도 안 난 중학교 배정에 서로가 떨어질까 무서워 잡은 손을 꽉 쥐고 앞니가 아프도록 꾹 닿은 입술은 볼 장 다 본 지금도 수줍어 말 못하는 추억이었다. 순수했던 감정은 다시는 흉내 내지 못 할 만큼 아름다워서 그것만큼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음에 숨겼다.

 

 

중학교 2학년 처음 떠나는 수학여행에서 너와 크게 싸웠다. 그때 나는 다들 겪는다는 성장통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학교 다니는 게 싫지 않았는데 반짝거리는 별님이던 네가 더 이상 별님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는 초등학교 때보다 한 뺨 커졌고 목소리가 거칠어진 것 빼곤 여전히 변함이 없었는데 내가 변했다. 나만 변했다. 내 안에서 너는 친구가 몰래 보여주던 야동 배우 같았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갑자기 네가 옷을 벗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학교, 학원, , 버스 안 어디든 너는 욕정에 젖은 짐승이 되었다. 해님 아래 뛰어노느냐 붉은 혈색을 띠던 피부가 촉촉하게 달라붙었고 까만 눈동자가 젖어 번들거리며 눈, , 입을 싹싹 핥았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발기한 성기를 바지 안에서 꺼내 서로의 것을 문지르기도 했다. 나는 헉헉 뱉는 네 숨에 네 손길에 닿은 네 몸에 방향성을 잃은 비행기처럼 휘청거렸다. 안 돼 안 돼 하던 입술은 어느새 너를 탐했고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체를 비볐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 손에 쏟아지는 순간 흥분으로 빨갛게 점칠 됐던 세상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추락했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온 몸이 으깨졌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과 환멸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를 피해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을 해줄 수도 달리는 것 멈출 수도 없었다.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내가 너무 더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너를 밀었고 나는 도망갔다. 처음에 왜 그러냐고 묻던 네가 달래기도 하고 화도 냈지만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너의 따뜻한 살 냄새가 자꾸만 내 머리를 어지럽혀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너를 그대로 덮칠 것 같았다. 만약 그런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별님을 내가 더럽히게 되니까. 기쁘게도 같은 중학교가 되었고 앞으로도 함께 일거라 믿었던 너에게서 나는 이제 도망쳐야 했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나를 너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제까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뒹굴던 친구가 갑자기 밀어대니까 미움을 받(고 있다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궁금했을 것이다.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까 너의 상처는 겹겹이 쌓여 안에서 곪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툭 터지는 봉긋한 주머니를 너는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잘못 건드리면 아프기만 하고 더욱 커져서 어쩔 줄 모르며 가만히 내버려뒀다. 나는 그런 너를 모른 척 했다. 이젠 네가 근처에 없어도 내 옆엔 늘 벗은 네가 있어서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너에게 미안했지만 또한 밉기도 했다. 왜 너는 더 이상 빛나지 않는 거지 엉뚱한 화풀이를 했다. 그 화풀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너에게 갔다. 너의 곪은 상처는 더욱 커졌다. 나는 결국 수학여행으로 온 낯선 도시 낯선 밤거리에서 기어코 너를 울렸다.

그렇게 우는 너는 처음 봤다. 서럽게 눈물콧물로 온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상처를 토하는 너를 나는 멍청한 얼굴로 보았다. 팔을 흔들고 바닥에 발을 쿵쿵 찧으며 그간 쌓인 상처를 토한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고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라며 무슨 말이든 하라고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른다. 가감 없는 힘에 몸이 비켜나고 맞은 아픔에 내 손도 나갔다. 우리는 선생님이 올 때까지 서로 치고받았다. 함께 다닌 태권도가 쓸데없는 데서 빛났다. 정확하게 얼굴을 맞췄고 힘을 아끼지도 않았다. 우린 많이 맞았고 많이 때렸다. 급하게 달려온 남자 선생님께 각각 뒷목이 잡히고 떨어질 때까지 발길질을 하다가 밤새도록 혼났다. 제일 무서운 담임이자 학생 주임선생님께 엉덩이가 터지도록 맞고 손가락이 뻐근하도록 반성문 10장을 채워서야 선생님께서 벗어났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았다. 시린 새벽녘 공기에 몸을 떨며 우린 퉁퉁 붓고 밤새워 피폐한 몰골로 인사도 없이 각방에 들어갔다. 나는 서로 엉켜 자는 룸메 사이에서 잠잘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복도에서 서성이다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복도 끝 방에 들어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곳에 누웠다. 아침 햇살에 환한 방안이 눈부셔 옆으로 누우며 눈을 꾹 감았다. 맞은 갈비뼈가 욱신욱신 아팠다. 등에 뭔가 닿았다. 갈비뼈는 이제 부러질 것 같았다.

키스해도 돼?”

너는 답이 없었다.

 

 

우린 수학여행하고 원수를 진 게 틀림없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후 서먹서먹해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울렸다가 고 2때 떠난 수학여행에서 또 싸웠다. 고등학교도 같은 데 들어간 질긴 인연의 우리는 2번째로 같은 반이 되었고 짝꿍이 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너는 생애 처음 타 본 비행기에 흥분으로 몸이 들썩거렸다. 촌스럽게 굴지 마. 정신없어서 한마디 하니까 눈을 흘긴다. 바깥 안 보여준다. 운수 좋게 창가에 앉은 네가 몸으로 창을 가린다. 미안 쏘리. 내가 잘못했어. 손까지 비비며 잘못을 시인하니까 씩 웃으며 몸을 비켜줬다. 동그란 창문 바깥으로 떼어 먹고 싶은 구름이 흘러갔다. 솜사탕 같지 않냐? 기울어진 내 몸을 팔로 끌어 창 가까이 붙는다. 구름은 달까? 네 몸에서 복숭아 냄새가 났다. 얼마 전 네가 산 섬유향수였다. 글쎄. 단 건 싫은데. 네 냄새는 좋았다. 저 위에 다이빙 하고 싶다. 폭신폭신 할 것 같아. 떨어져 죽을 걸? 그럼 너를 밀어야겠네. 죽나 안 죽나. . 농담이야. 우린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쓸데없는 이야길 주고받았다. 너는 꽤 신이 나 있었고 나도 만만치 않게 즐거움에 들떠있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아름다운 제주도 자연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던 그 때까지 재밌었는데 같은 시기에 수학여행 온 타 학교 여학생이 너에게 번호를 물었을 때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예쁘장한 얼굴로 당당하게 물어오는 얼굴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네 얼굴을 살폈다. 당황해서 뺨이 붉었다. 아니, .. 말 더듬어 본 적 없는 네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열었다 다물었다. 옆 반 애들이 오오- 한마음 한뜻으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여자애는 남자 무리의 환호성에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도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너는 주저하다 그 폰을 받았다. 방황하는 손가락과 여자애와 핸드폰을 번갈아보는 네 눈동자를 나는 말없이 보고 있었다. 네가 눈을 돌렸다.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어떤 조언이나 남자들 무리처럼 환호도 하지 않고 너를 기다렸다.

번호 안 알려줄 거야?”

여자애가 사이로 끼어든다. 너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한다. 너의 눈빛이 변하고 곧 11개의 숫자를 꾹꾹 눌러 넘겼다. 남자의 환호는 아까보다 시끄러워졌고 여자애는 문자하겠다며 폰을 흔들고 저 멀리 사라졌다. 너는 등을 마구 치며 축하한다는 남자애들 무리 속에서 멍청히 웃었다.

재미없는 동기들 자랑잔치를 무료하게 바라보며 나는 옆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네 손가락에 온 신경을 쏟았다. 여자에게 번호를 주고 얼마 안 되어 띠롱 울던 핸드폰은 밥을 먹고 조금 쌀쌀해진 밤까지 쉬지 않고 하얗게 발광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서 소문을 듣고 한 번씩 남자애들이 네 등을 치며 놀렸고 너는 순둥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옆에서 나는 꿋꿋하게 밥을 퍼먹고 앞을 보지 못하고 기둥에 부딪힐 뻔한 너를 잡아끌어 다니기도 했다.

나는 인내했다. 너는 이유 없이 행동할 놈이 아니니까 네 취향도 아닌 여자에게 번호를 알려 준 이유가 있겠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바보같이 예전처럼 화가 나면 싸우던 짓은 하지 않으리라 이제 몸도 머리도 굵어졌으니 사람답게 생각하고 움직여야지 참고 참으며 기다렸는데 원색 조명을 아낌없이 쏟으며 시끄러운 음악에 풍선인형처럼 흔들리는 앞 무리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는 너 때문에 결국 참을 수 없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폰을 들어 바닥에 던졌다. - 소리와 함께 배터리가 분리된 핸드폰은 까맣게 꺼졌다. 너는 놀라 핸드폰을 멍청하게 내려다보았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로 쓰이는 실내 응접실에서 벗어났다. 어디 가냐며 잡는 선생님께 화장실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제주도의 쌀쌀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 지금껏 잘 감췄던 마음을 여기서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니까.

너 뭐야?”

그런데 네가 건드렸다. 씩씩 거친 숨을 뱉으며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내 팔을 잡아 돌리며 화를 낸다. 나는 네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바닥에 던졌다. 핸드폰이 툭툭 튀어 저 멀리 굴러갔다. 예고도 없이 네 주먹이 날라 왔다. 몸이 비틀 뒤로 밀려가고 이에 베인 뺨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붉은 타액에 시야가 빨갛게 변했다. 너는 모르지. 괴로워 울고 있는 내 마음을, 제일 친하고 제일 소중한 네 때문에 숨겨야 하는 내 마음 같은 거. 사실은 알고 있기도 하잖아. 그런데 왜 나에게 화를 내는데. 나는 멱살을 잡는 너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바닥을 뒹굴었고 선생님이 와서 말릴 때까지 몸싸움을 했다.

데자부다. 주임이 사랑하는 사랑의 매를 온 몸으로 흠뻑 맞고 입을 열지 않는 우리를 닦달이다 또 맞고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 자취가 사라지는 아침에 우린 방 안에 누웠다. 5명씩 묶어 잠들기로 한 방엔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없어 우린 어색하게 이불에 누웠다. 옆으로 누운 시야엔 목욕탕에서나 보던 스킨로션이 있는 갈색 화장대가 있었고 그 위엔 여전히 배터리가 분리된 핸드폰이 놓여있었다. 네모난 모서리가 단단한 돌에 부딪혀 으깨졌다. 액정만큼은 튼튼하게 줄도 안 그어졌다. 길게 줄이라도 가면 덜 억울할 텐데. 멀쩡한 액정을 보니 잠잠했던 마음이 울렁거렸다.

왜 그랬어.”

목이 잔뜩 갈라져 쉬었다. 등을 보고 누운 저쪽의 너는 말이 없었다. 자고 있는지, 자는 척 하는 건지 그 무엇이든 너는 또 내 질문을 무시한다. 내 마음을 또 몰라주지. 무시하지. 주먹을 꽉 쥐었다 펼쳤다. 너를 실컷 때린 주먹은 빨갛게 부어 꽉 쥘 때마다 얼얼했다.

좋아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이제는 숨기고 싶지 않다. 숨겨지지도 않는다. 꽁꽁 묶은 단단한 철문을 두들긴 건 너였다. 자물쇠를 찾아 연 건 바로 너였다.

널 좋아해.”

그만해.”

두 번밖에 안했는데 그만하란다. 나는 몸을 돌렸다. 아까 그대로 꼿꼿이 누운 네 등은 구김 없이 반듯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시작도 안했어.”

시작하지 마.”

.”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꽁꽁 숨겨. 들키지 마.”

싫다면 어쩔 건데?”

.”

사귀자.”

우린 친구잖아.”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는데?!”

네팔을 잡아 당겼다. 돌려진 너는 눈을 잔뜩 구긴 채 울고 있었다. 황망하여 나는 손으로 네 얼굴을 닦았다. 손가락과 손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너는 내 손을 잡고 제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널 좋아하는 게 무서워.”

그러니 날 흔들지 마. 무섭다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단 말이야.

힘을 주어 네가 잡은 내 손을 얼굴에서 치웠다. 눈을 뜬 네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끝이 없는 바다 위에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망망한 검은 섬에 나는 키스를 했다. 감긴 부드러운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려 너를 내려다보았다. 감은 눈동자가 천천히 열린다. 나는 그대로 네 눈을 보며 입술을 맞댔다. 첫 키스는 짜고 달았다.

 

 

대학은 재미를 느낄 새도 없이 군대를 갔다. 적응하기도 전에 반 학기 다니고 휴학을 했다. 너는 조금만 더 다니자고, 캠퍼스 안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데이트가 아직도 많이 쌓였는데 벌써 군대를 가냐며 말렸다. 수험공부 한다고 고등학교 내내 도서관 데이트했잖아. 대학교 와서 선배들 부름에 술 마시느냐 제대로 된 대학 낭만도 못 즐기고 일찍이 군대 가서 고생 하냐고, 나는 너랑 더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말에 잠깐 흔들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다잡았다. 안 돼. 일찍 가야해. 왜에~?!!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며 짜증을 부리는 너의 팔뚝을 잡아 겨우 중심을 잡았다. 뇌가 흔들려 어지러웠다. 너는 내 볼을 잡고 달싹거리는 내 입술을 뽀뽀로 막았다.

, , , , , 쪽쪽, , 쪽쪽쪽.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네 허리를 잡고 침대로 쓰러졌다. 어젯밤 밤새 구겨졌다 아침이 되어 제 형태를 찾은 이불은 네 밑에서 또다시 형체 없이 구겨졌다. 하얀 피부에 붉게 난 자국을 한 번 더 깊게 빨아 흉터처럼 네 몸에 새겼다.

가지 마, ? 나랑 더 놀자.

품에 파고드는 너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너랑 더 놀고 싶다.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과에 적응하느냐 연인에게 소홀했던 게 미안했기도 했고 군대는 어떤 이유에서든 가기 싫다. 하지만 군대는 대한민국 남아라면 언젠가 가야했고 그렇다면 빨리 해치우는 게 좋다. 나는 1주년 기념으로 맞춘 은색 커플링에 키스를 했다. 혼자 두게 하지 않을게. 자원입대는 네 것까지 모두 내가 처리했다.

2년 내내 너는 어지간히도 나를 괴롭혔다. 상의 없이, 본인 허락 없이 내 것까지 자원입대 신청했냐는 불만이었다. 나는 술잔을 기울던 어느 때쯤에 흘려 말하던 아무 대화를 짜 맞추며 네가 허락했다는 말을 했다. 사실은 칙칙하고 재미없는 군대에 너마저 없으면,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밖에서 딴 사람을 만나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까 봐 그러면 아무리 침착하고 이성적인 나라도 군대고 뭐고 탈영할 것 같아서 억지로 밀어붙인 거였다. 너도 그걸 아니까 아무 말 못하는 나에게 짜증을 쏟았다. 눈칫밥 먹는 이등병 스트레스를 모두 나에게 풀었다. 일병이면 삽질만 한다고, 상병엔 아직 일 년이나 남았다고 그러고 병장 땐 나가서 우리 뭐하지? 머리 다 굳었는데? 불안해하는 모든 감정을 다 쏟았다. 나는 그냥 받아주었다. 모두가 잠자는 밤에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던 투박한 손이 있으니까. 그거면 군 스트레스도 답답한 군대 생활도 다 괜찮았으니까 나는 그것대로 행복했다. 선임들 몰래 잡던 손, 근처 모텔에서 하루 종일 몸을 섞으며 보낸 하루 휴가, 밤에 몰래 나와 먹던 뽀글이, 동상 걸린 발을 나대신 꼭 손에 쥐며 울먹이던 동계 훈련까지 모두 네가 있어서 힘든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너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하늘에 떨어진 별님처럼 내 앞에 떨어져 내 심장이 흙바닥에 뒹굴도록 놀래더니 이제는 내 곁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어야 할 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내 짧은 삶에 네가 없인 이야기 되지 않는 곳들이 많다. 아니 다다. 너를 만나기 전에 기억은 매우 짧고 쓸데없으니 내 인생은 전부 너였다. 한 순간도 너에게 반하지 않은 적 없었고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한 적 없었다.

중학교 때의 싸움은 이해 부탁한다.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다. 그 전에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다웠던 우리의 사랑이 내 욕심에 더러워지는 것 같아 그게 싫어서 도망 다닌 것이다. 사실은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도 나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못난 꼴을 보였다. 너는 나를 매우 똑똑한 수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바보다. 멍청이다. 말미잘이다. 네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나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다.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다. 오로지 너에 관련된 것만 눈에 들어오고 너에게 닿는 모든 것들을 질투한다. 그때의 그 여자애는 아직도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그 여자애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 발로 밟는다. 여자애에게 얘가 내 애인이니 꺼지라는 말도 한다. 울고 떠나가는 여자 등을 보면 속이 다 시원했다. 그 때 했어야 했던 일들은 꿈에서만 이루어졌다. 답답하게. 네가 그 여자애랑 주고받았던 문자는 아직도 궁금하다. 너는 별 거 없었다 하지만 내가 던지는 바람에 완전히 고장 난 폰 안에 너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점 하나까지 다 알고 싶다.

그런 나를 너는 모르지. 소원이라면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지만 내 추한 본모습까지 알려주고 싶지 않다. 아름답고 멋있지 않아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미소를 띨 수 있으면 된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다.

너는 이미 내 삶의 존재이니 나는 이미 행복하다.

 

 

 

 

 

 

승철은 편지를 접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몇 장의 편지지를 잡은 손이 가볍게 떨렸다. 3번 접은 편지지의 두께가 상당해서 편지 봉투에 넣을 때 조금 애를 먹었다. 어디 하나 구겨지지 않게 조심해서 편지 봉투에 완전히 담은 뒤 승철은 그것을 두 손에 쥐었다. 편지지만큼 깔끔한 편지 봉투 겉면엔 To. 이지훈 From.최승철 만이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 네가 쓴 거 아니지?”

승철이가 편지를 다 읽고 봉투에 담을 때까지 조용히 눈에 담던 지훈이 시선을 비켰다. 깔끔하게 자른 머리카락에 드러난 귀가 붉었다. 악필로 유명한 이지훈이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한다 해도 이렇게 깔끔히 쓸 수가 없었다. 편지야 최대한 노력했는지 좀 알아 볼만 했지만 봉투에 적힌 이름은 아무리 봐도 지훈이 글씨가 아니다. 누구야. 묻는 말에 그게 중요해? 지훈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대답은?”

승철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마주 본 지훈의 눈이 단단했다. 7살 때인가 보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커서 이렇게 어른이 되었는지. 귀여웠던 친구가 어느새 든든한 연인이 되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같이 동거를 하는 지금까지 제 눈에 지훈이 한 번도 못난 적 없었다. 마음이 흔들거린다. 편지 탓이다. 만나면서 한 번도 제 마음을 길게 말해본 적 없는 지훈의 고백에 승철은 배를 탄 것 마냥 속이 울렁거렸다. 아까 먹었던 점심밥이 올라올 것 같다. 너에게 흉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묻지만 손가락 끝이 떨리는 거 다 안다. 너랑 이십 몇 년을 함께 하면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 없다. 너는 내가 네 마음을 하나도 모를 만큼 꽁꽁 숨기고 표현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너는 손가락 끝으로, 시선으로 발걸음으로 네 사랑을 퐁퐁 흘렸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 알 수 있는 너의 사랑 표현. 나는 그것을 매우 좋아했다. 듣기 드물었지만 네 입에서 직접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이 나오는 것보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하루 삶속에서 나를 향한 사랑이, 감정이 묻어나는 것들이 매우 사랑스러웠다. 툭하면 얼굴 붙잡고 뽀뽀하는 나를 너는 스킨십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거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런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어 그랬다. 너는 그것만 몰랐다. 나에 대해 다 알면서도. 그런 점이 귀엽다.

테이블을 피아노처럼 두들기는 네 손가락을 잡아 당겨 쪽 입술에 뽀뽀를 했다. 너는 젖은 입술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 사람 많은 곳에서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응, 또다시 부딪히는 입술에 사라졌다. 너는 푸스스 웃었다. 잡은 손가락을 고쳐 잡아 내 손을 깍지 껴 바로 잡는다.

답은.”

이미 답은 해줬는데 확실한 걸 좋아하는 너는 또다시 묻는다. 나는 손에 쥔 편지에 뽀뽀를 하며 지훈에게 향해 웃었다.

, 결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