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 ah하네요.
[우쿱] 도련님 본문
치마를 샀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풍성하게 퍼지는 롱스커트로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즐겨 입던 지우의 인생에 처음 사본 치마였다. 고민하며 산 치마 허리는 밴드 타입이라 불편함 없이 편했고 치마 자락이 다리에 닿을 때마다 살결 위로 쏟아져 얇고 매끄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지우는 괜히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잎을 감싸고 숨은 꽃이 개화하듯 치마가 팡 퍼지고 하얀 꽃술이 수줍게 나타났다.
‘예뻐.'
조금 높고 건조한 너의 목소리.
다리를 헛디뎠다. 흔들리는 시야에 다리가 엉키고 그대로 무너져 바닥에 쓰러졌다. 활짝 핀 치마가 볼품없이 시들어 바닥에 퍼진다. 하얀 꽃술은 부러져 아무렇게나 뻗어있다.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우쿱/지훈승철] 도련님 (우쿱전력)
w.agapi
내 이야기는 도련님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면서 시작된다.
이지훈, 26살 △△대학 실용음악학과 대학생. 도련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기로 결정됐던 날 내가 알고 있던 도련님의 정보는 저것이 다였다. 매우 적은 정보는 일부러는 아니고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라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이 외동인 줄 알았다. 양가 상견례 때 남동생이 있다고 어느 누구도 얘기 하지 않았고 결혼식 때 자기가 남편의 친동생이라며 인사한 사람이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남편에게서 남동생에 대해 일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태껏 남편이 외동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다 시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슬픔에 젖은 남편을 추스르며 장을 치를 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 앞에서 눈물만 흘리던 도련님을 보았다. 색 빠진 갈색머리와 하얀 얼굴에 작은 남자가 울음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뚝뚝 떨구는 것이 안타까워 저기, 불렀을 때 옆에 있던 남편이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어떡해, 지훈아. 지훈아’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충격과 슬픔으로 젖어있었지만 울지 않았던 남편이 본인보다 작은 남자-지훈이라 하였다-를 끌어안고 속에서부터 들끓는 아픔을 토해냈다. 그것이 옆에서 같이 견디던 나의 눈물까지 터뜨려 한동안 장은 곡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도련님은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됐다. 남편의 의견이었다. 다 크긴 했지만 졸업 때까지 동생을 돌보아야 할 것 같다고. 나는 당신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걸 안 지 얼마 안됐을 뿐 아니라 다 큰 성인을 우리 집에 들여오기 불편하다 말했다. 남편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다가 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당신도 알잖아. 내 부모님은 친부모 아닌거 .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내 부모님이 얼마나 나에게 잘해주셨니.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은혜를 베풀고 싶었던 거 내 지훈에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이제 부모님은 계시지 않으니까..그러니 지훈이 졸업 때까지만 그러자.
그렇게 들어오게 된 도련님은 자신 때문에 신혼인 두 사람에게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며 조용히 지냈다. 아담하고 귀여운 겉모습과 달리 조용하고 무뚝뚝한 남자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를 가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살게 된 도련님이니 친분을 쌓고자 했던 나는 묘하게 벽을 치는 도련님에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청소도 필요 없다며 방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도련님 때문에 내 집에 있는 방에 들어본 적 없는 나는 도련님이 안에서 무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오늘 어떠셨냐 물어도 괜찮았다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는 도련님과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일을 끝마치고 저녁을 뜨던 그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도련님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나마 나았지만 그도 도련님을 어려워했다.
당신은 형인데 왜 동생을 어려워 해?
나랑 쟤랑 안 본 지 5년이 넘었거든.
왜?
서로가 상처여서.
그러다 남편이 회사 일로 바빠지게 됐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운 좋게 취직하게 된 회사에서 이제 막 신입사원을 벗어 난 그가 프로젝트를 처음 맡게 된 것이었다. 부장님이 자기를 좋게 봐줘서 사원에겐 파격적으로 큰 대형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해주셨다고 기뻐하던 남편은 하지만 곧 눈꼬리를 내리며 미리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대형 프로젝트인만큼 몇 개월 동안 집에도 잘 못 들어오고 당신에게 소홀해질 것 같다고, 퇴근 시간도 일정치 않아 저녁식사도 같이 못하게 된다고 당신이 동생을 어려워하는 걸 아는데 둘이서만 식사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연신 미안하다며 나를 끌어안고 등을 쓸었다.
나는 몹시 걱정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며 남편 등에 손을 둘렀다. 그것보단 내가 남자 도련님하고 같이 있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계속 미안해 하길래 장난 식으로 그리 던졌더니 남편은 괜찮아. 라고 즉답했다.
지훈은 괜찮아.
의심 하나 없는 확신이었다.
말대로 남편이 바빠지면서 나는 도련님과 숨 막힌 생활을 같이 하게 되었다. 쾌활한 남편이 없는 식사 시간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던진 토스에 도련님은 툭툭 걷어찼다. 랠리가 툭툭 끊겼다. 식사를 마친 도련님이 그릇을 싱크대에 두고 방에 들어가면 불편한 정적에 속이 더부룩했다. 너무나 불편해서 도련님께 친구들이랑 약속이 없냐고 물어봤었다. 그는 없다고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었다.
불편해. 자기야. 생각보다 도련님하고 지내는 생활이 너무 괴로워.
하지만 남편에게 말하진 않았다. 새벽 한 두시에 들어와 피곤에 젖어 기절하듯 자는 그에게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잠에서 깨자마자 출근하는 남편이 가끔 괜찮아 물어보면 괜찮아 하며 웃었다. 평소의 다정한 그라면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굳은 눈매를 보고 내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남편은 피곤했고 지쳐있었다. 나는 고맙다며 미소 짓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도련님이 웬 꽃을 들고 왔었다. 호박 꽃같기도 하고 나팔 꽃같기도 한 꽃 몇 송이가 핀 화분이었다. 꽤 큰 화분에 담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의아한 얼굴로 도련님을 쳐다봤고 도련님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서요.
처음으로 본 도련님의 미소는 새하얀 구름처럼 포근하고 다정했다.
천사의 나팔꽃이라 했다. 개나리 색에서 노랗게 퍼지는 꽃잎이 나팔과 닮아서 그렇게 불려진다고 했다. 길을 지나다 꽃가게에서 파는 걸 보고 형수님이 생각나 샀다는 도련님은 처음으로 밥을 먹고 곧장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학생이지만 다 큰 성인을 선뜻 받아주고 돌봐주는 게 고마운데 쑥스러워서 그동안 표현을 못했다고 사실은 매일 마음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었다는 도련님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며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는 무뚝뚝했던 도련님의 처음 보는 모습이 계속 신기하고 너무 귀여워서 발가락이 간지럽고 속이 말랑말랑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그 뒤부터 나는 도련님과 많이 가까워졌다. 잘 다녀오겠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도 꼬박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본인이 설거지 하겠다며 나를 거실로 밀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음식을 싸들고 오기도 했다. 식사가 끝마치면 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체로 내가 떠들고 도련님이 듣는 편이었지만 나는 이 상황이 좋았다. (비록 남동생이 있었지만)남편처럼 나도 외동이어서 친근하게 구는 도련님이 동생 같아서 귀여웠다. 남편이 새벽같이 일어나 가고 늦은 밤에 들어오는 생활동안 외로웠던 마음도 채워졌다.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고 매운 걸 못 먹고 오이를 좋아하지만 피클을 싫어하고 영화 취향도 같았다. 남편하고도 같았다. 도련님은 어렸을 때 형이 좋아서 뭐든지 같이 하다가 취미도 취향도 비슷해졌다고 얘기했다.
많이 좋아 했나 봐요?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진심으로요.
하루는 남편하고 크게 싸웠다. 이유는 굉장히 사소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서로 견딜 수 없어 큰 소리가 오고갔다. 결국 참지 못한 남편이 밖을 나가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분한 마음이 뾰족해져서 심장을 쿡쿡 찔렀다. 당신이, 어째서, 나한테, 그래.
형수님.
그 때 도련님이 다가와 등을 두들겼다. 나는 그때서야 이 집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몹시 쪽팔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부가 싸우는 걸 보이다니. 그러면서도 억울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나쁜 놈 미운 놈 욕을 하며 우는 나를 옆에서 말없이 토닥이며 위로하던 도련님의 품에 안겨 그렇게 외치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은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에 누워있었고 도련님이 침대 옆에 앉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도련님에게 못 보일 꼴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련님은 일어났어요? 다정하게 묻고는 베개에 아무렇게나 퍼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프지 말아요. 아프면 안 되니까.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 때부터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됐다. 집안일을 하다가 베란다에서 고개를 숙인 꽃 앞에 다가가 꽃잎을 만지며 정신을 놓을 때가 많아졌고 도련님의 방문 앞 손잡이를 괜히 잡았다 뗐다 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인사하며 웃을 때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확확했다. 그것이 이상해 두 뺨을 두들기고 정신을 차리려 하지만 아파요? 하며 도련님이 큰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 저를 보는 도련님의 진지한 두 눈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내가 이상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몸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몸을 찢고 나올 것처럼 속이 시끄럽고 무서웠다. 이 감정을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늦은 밤 퇴근하는 남편의 등에 매달려 눈물을 조금 흘렸다. 남편은 조금 곤란해 하다가 내 몸을 끌어안아 입술로 위로해줬다. 도련님이 오고 나서부터 하지 않은 관계는 낯설고 아파서 나는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너무 무서워서 매달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퇴근한 침대 위 남편의 빈자리를 쓸던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련님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어둡고 피곤한 얼굴의 도련님은 햇볕이 부서져 들어오는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다. 한순간에 깜깜해진 방안이 짙은 어둠에 잠겼다. 방은 한순간에 바다 속에 들어간 잠수함 같이 먹먹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이불로 감싸면서도 허벅지가 떨리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도련님은 침대 옆 창문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다가 다리 한쪽을 침대 위에 올리고 내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큰 손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 입을 맞췄다. 나는 그 입술을 받아들였다. 도련님 입술은 텁텁하고 옅은 담배냄새가 났다.
임신을 했다. 생리를 하지 않아 혹시나 싶어 산 임신 테스트기엔 줄이 두 줄 처져 있었다. 곧바로 달려간 산부인과에선 축하한다며 임신 4주라 얘기했다. 나는 얼떨떨해 초음파사진을 손에 들고서 길거리를 걸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다가 마주오던 사람 어깨에 몸이 풀썩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급하게 일으키려는 상대에게 괜찮다며 보낸 뒤 나는 일어나려다 떨어진 초음파 사진을 보고 눈을 감았다.
남편은 들뜬 얼굴로 나를 끌어안고 빙구르르 돌았다. 프로젝트가 절정에 이르면서 극도로 예민해졌던 남편의 얼마만에 미소였는지. 나는 눈앞이 부셔지는 어지러움에 내려달라며 호소했고 그는 아기 괜찮아? 하며 배에 손을 두고 호들갑을 떨었다. 괜찮다고 남편 손을 밀어도 아니야. 아가야 아빠가 미안해. 우리 아가 잘 자라서 10달 후에 건강하게 보자며 벌써 자식바보행세를 했다. 도련님은 그 옆에서 잔잔하게 웃으며 축하한다며 인사를 했다.
참으로 예쁜 그림이었다.
잠이 오질 않아 베란다에서 나팔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용한 발걸음에 고개를 들자 도련님이 제 앞에 있었다. 무채색 잠옷을 입은 도련님은 저녁과 달리 굳은 얼굴로 꽃과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묻어난 두 눈에 나는 고개를 숙여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누가 아빠인지 몰라요.
작은 목소리로 고해했다. 도련님은 말이 없었다. 안방에서 잠든 남편의 고롱고롱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괴로워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낳을 거예요.
도련님은 말이 없었다.
임신하면서 몸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리 강하지 않은 음식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하고 마시는 물마다 다 써서 마시지도 못했다. 먹지 못하니 몸이 쇠약해져 자꾸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면서 여유로워진 남편은 내가 걱정돼 이것저것 사왔지만 어느 것도 소용없었다. 어떡해. 당신. 그러다 당신 쓰러지겠다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편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눈만 감았다.
이 아이가 도련님의 아이일까 무서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 도련님이 사온 영양죽을 겨우 삼킬 때마다 커다란 죗덩어리를 차곡차곡 안에다 쌓는 것 같았다. 무겁고 아팠다.
그런데 도련님의 아이어도 좋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이잖아.
진실은 나만 알면 됐다.
남편이 사라졌다.
나에게 거짓말했냐며 무섭게 추궁하다가 이러다 너를 때릴 것 같다며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무섭고 무서워서 발발 떨었다.
도련님은 내 앞에 구겨진 종이를 집어 펼쳤다.
위에는 남편의 인적사항이 적혀있었고 그 아랜 알 수 없는 의학용어로 뭐라 뭐라 적혀 있다가 마지막엔 무정자증으로 마무리됐다. 도련님은 그것을 한참을 보다가 종이를 곱게 접어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종이를 발작하듯 집어 구석으로 던졌다. 흉측한 벌레를 만진 것 같이 소름이 돋았다. 나는 아기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 남편과 합의하에 계획하고 시도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불임센터에도 갔고 거기서 검진을 받다가 시부모님 일이 터지면서 그 일을 잊었다.
한참 후에 센터에서 나에게 전화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자고 있던 나는 받지 못하고 남편이 대신 받았다고 했다. 남편은 아이를 가졌다며 얘기했는데 병원에선 그럴 수가 없다며 두 분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남편은 이상함을 느꼈고 거기서 그는 자신이 무정자증인 걸 알았다.
버려질거야. 다정한 그를 배신한 죄로 영원히 버려질거야.
난 끔찍한 결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다정한 남자였다. 부모님의 오랜 가정폭력으로 피폐하고 상처받은 많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남자였다.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나의 상처를 예쁘다고 어루만지고 예쁜 사람이라며 보듬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나에게 털어주던 사람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하고 유일했던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잠깐의 남편의 소홀함에 도련님의 작은 관심에 눈이 멀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용서를 빌어야 돼. 그에게서 용서를 빌어야 돼.
나는 한 가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급하게 나갔다. 짝짝이 신발을 끌고 울면서 아파트 주변을 찾아다녔다.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아 주저앉아 울었다. 밤은 추웠다. 전날 비가 내려 바닥은 축축했다.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채찍질했다. 계속 걸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피가 나는 발을 돌보지도 않고 다시 일어나 돌아다녔다.
그러다 발견했다. 저 구석 두 남자. 도련님과 남편.
도련님은 멱살이 잡힌 채 남편이 가하는 주먹을 가만히 맞기만 했다.
“왜 그랬어!! 왜!!!”
처절한 외침에 멈추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힐끅거리는 울음을 손으로 삼키며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너가 왜!!”
“싫어서 그랬어요."
"뭐?"
"형이랑 그여자가! 밤새 섹스하는 소리가! 그 소리가 방을 타고 넘어와 내 귀를 찌르는데 그걸 듣고 어떻게 가만 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너..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냐?"
"나에겐 돼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도련님이 아직 멱살을 잡고 있는 남편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남편의 얼굴 뒤로 손을 뻗어 누르며 키스를 했다. 당황해 벗어나려는 남편을 잡아끌어 벽에 밀친 뒤 무작정 입을 맞췄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키스. 용서없는 애정. 갈망.
나는 놀라 그 자리에 굳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고회로가 멈추고 숨도 멈췄다. 밀어붙히는 도련님을 남편이 힘껏 밀었다. 거친 숨소리를 뱉으면서도 도련님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형을 아직도 사랑해요. 나 포기 안했어. 피가 섞이지 않은 형 먹여주고 키워주는 부모님한테 죄 지을 수 없다고 그렇게 형이 날 밀고 도망쳤을 때도 난 하루도 형을 잊은 적 없어요. 잊어볼까 가족하고 연도 끊었는데도 안 됐어.”
“너 미쳤어.”
“형 때문이잖아요! 다친 나에게 손을 내민 건 형이었어요. 영원히 나만 사랑한다고 한 건 형이었잖아.”
“그렇다고 내 여자랑 자?”
“내건데 감히 여자에게 형 흔적을 남겼잖아요."
그게 싫어서 그랬어. 형은 내 거잖아.
동생은 상처가 많은 아이야. 동생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업으로 매우 바쁘셔서 보모를 둔 적이 있었거든. 그때도 낯가리고 수줍은 아이였지만 밝고 미소가 예쁜 아이였는데 어느부턴가 웃지도 않고 인형처럼 가만히 있더래. 부모님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워낙 바빠서 신경을 쓸 수 없었지.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
보모가.... 동생을 죽일 뻔했거든. 그 보모남편폭력에 시달린 사람이었는데 그 분노를 어린 내 동생에게 풀었다고 하더라. 동생은 매일 보모의 폭력에 시달렸지. 어린 아이였던 지훈은 부모님이 알게 되면 부모님을 죽여 버리겠다는 보모의 협박에 입을 다물었어. 그렇게 매일 매일 맞으며 망가진 아이는 결국 보모가 창밖으로 던져져 죽을 뻔 했지. 정말 운 좋게도 동생은 나무에 걸려서 살았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어.
부모님은 절망했지. 자신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이 꼴이 됐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하던 사업도 잠시 중단하고 지훈이한테 모든 관심을 쏟았는데 지훈이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어. 이미 너무 상처를 받아서 모든 걸 거부 한거야. 부모님은 힘들어했고 지훈이는 하루하루 말라갔지. 보모는 사라졌지만 그 그림자는 짙게 남게 된거야.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 나를 만났대. 정말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말에 지훈이를 데리고 갔는데 지훈이가 울고 있는 내 손을 잡았거든. 울지 마. 하면서. 그게 처음으로 지훈이가 입을 열던 때였어. 그게... 내가 이 집안의 자식으로 들어가게 된 일이야.
도련님을 받아들이고자 결정했던 날에 남편이 나에게 고백했던 것들이었다. 남편은 지훈이 때문에 구원받았고 지훈이는 나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부모님이 나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자신을 매우 사랑했다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힘든 일이라며 사실 도련님을 받아들이는 건 나를 위해서라며 그렇게 울었다. 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옆에 있길 바래서.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나는 도련님을 받아드렸다.
그래서 도련님과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나는 몹시 괴로웠고 자책했다. 남편을 욕보인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도련님을 사랑하게 되서 내 죄를 덮고 싶어서 그리고 정말로 아이가 갖고 싶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도련님의 계획이었다.
나에게 웃어 준 거 꽃을 준 거 키스를 한 게 모두 다.
“너는..”
남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무너진다. 도련님은 그 앞으로 무릎을 구부려 남편의 얼굴을 다정하게 손으로 감싸 잡는다.
“형도 날 사랑하는 거 알아요. 형 고삼 때 자고 있는 내 입술을 훔쳐갔잖아요.”
“...”
“그 전에 술 먹고 들어와서 날 붙잡으며 사랑한다고 울었던 적도 있었죠.”
“.....”
“그런데 부모님에게 상처주기 싫어서 날 밀어낸 것도 알아요. 형은 착한 아들이니까.. 그래서 나도 그런 형을 위해서 잊어버리려 했는데 형이 날 불렀어요.”
“....”
“그 때 그랬잖아요. 다시 날 부르면 사랑하겠다고.”
“...”
“아니예요?”
“....아니지 않아.”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걸어 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휘몰아치는 태풍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고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모든 걸 부정했다. 소리가 되지 못하고 흘러 떨어지는 비명들을 지켜보다 꽃이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이 사온 천사의 나팔꽃.
수줍은 미소로 건네주었던 그 꽃은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주어 싱그럽게 제 색을 발하고 있었다. 도련님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것을 들었다. 묵직한 무게에 그것을 내려 보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바닥으로 던졌다. 쾅! 화분이 떨어져 바닥에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어둠을 걷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검은 용들이 서로 얽혀 몸싸움하듯 부피를 더해갔다. 그 묵직한 부피감에 짓눌린 나는 괴로워 숨을 헉헉 뱉었다. 살려줘. 살려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지고 어둠은 몸집을 부풀려 나를 뭉갰다. 뭉개져 막힌 코에 공기도 희미해져 간다. 누군가 저 멀리서 아득히 저를 부르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린다. 호흡은 끊길 듯 툭툭 잘린다.
이거 무슨 꽃이야?
천사의 나팔꽃이래.
와 이름 예쁘다. 누가 사준거야? 남편이?
아니. 도련님이.
아 같이 살게 됐다는 도련님? 오올. 멋있다아. 예쁜 꽃을 형수님한테 사주고~ 착한 도련님이네.
헤헤.
그런데 있잖아.
응?
이 꽃 말야.
어.
맹독성 식물이었던 것 같은데.
뭐?
이 꽃잎 한 장 우려서 마시면 세 명이 모두 즉사할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고. 예뻐서 관상용으로 키우긴 하는데 오랫동안 키우면 독이 쌓여서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다고 들었던 것 같아.
무서운 소리 마. 도련님이 그런 걸 왜 나한테 선물하겠어.
하긴. 도련님이 이런 걸 왜 너한테 선물하겠냐. 너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그냥 그 꽃이랑 비슷한 다른 꽃인가 봐.
그래. 그럴 거야.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미안해~ 안 그럴게.
지우가 죽었다.
원인불명이라고 그랬다. 혹 최근에 크게 건강이 나빠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요? 묻는 의사에 말에 승철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때 자기는 매우 바빠서 지우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승철은 옆에 있던 지훈을 쳐다봤고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나섰다. 승철은 영안실 앞 복도에 서서히 주저앉았다. 부모님처럼 갑자기 제 옆을 떠난 지우가 믿기지 않아 멍하니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지훈만이 알 수 없는 미소로 그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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