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치과에 예쁜 선생님이 떴다고 한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의자에 앉아 가방 속에서 꼬인 이어폰을 풀던 지훈은 옆으로 나란히 서서 자신이 보고 온 미인을 자세하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름 모르는 학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가 썩어서 갔대나. 어렸을 때 뭣 모르고 엄마 손에 끌려가 치료를 받은 뒤 치과공포증이 생겨 십여 년을 치과를 안 갔다던 학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치과를 방문했고 그곳에 있는 예쁜 선생님을 보느냐 아픈 것도 몰랐다고 했다.
“아- 하세요 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다 끝났더라니까.”
눈은 꿈꾸듯 몽롱하고 목소리는 폭신한 솜사탕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통통한 패딩을 입어 가려진 작은 체구의 그 아이는 진짜 예뻐? 얼마나 예뻐? 라며 캐묻는 한 뼘 큰 학생을 약 올리듯 씩 웃었다. 지훈은 참지 못하고 빨리 말하라며 성을 내는 키 큰 학생에 입술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한창 시각에 약할 나이였다. 특히 예쁘고 야한 것들에. 궁금한 건 못 참고 하고 싶은 건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철부지들이었다. 꼬인 이어폰을 다 풀고 한 쪽을 귀에 끼웠다. 먼저 재생한 음악의 하이라이트가 지훈의 마음을 뺏었다.
“보면 존나 말도 안 나올걸. 엄청 예뻐.”
큰 아이의 콧김이 세졌다.
“나 보러 갈래. 어디 치과야.”
작은 아이가 샐쭉하게 웃었다.
“나 오늘 가는데 같이 갈래?”
·환자 대박 많아
·예약 위주. 대기 45분 째
·이가 아픈 건지 내가 아픈 건지.
·차라리 죽여주세요.
·드디어 이름 호명
·입장
·개안!
결론부터 말하겠다. 지훈은 치과이름을 못 들었다.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대로 목적지에 내려서 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이로 불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치과와 인연이 없을 예정이었다. 절-대로 그 예쁜 선생님을 보러 치과를 방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가 아팠다. 오른쪽 맨 끝 잇몸이 너무 아팠다. 대바늘로 쿡쿡 찌르고 주먹으로 마구 때리다 피가 싹 빠져나갔다. 사방이 막힌 입안에 여름과 겨울이 차례로 왔다. 강의를 빠질 수 없어 한국인의 의지로 수업을 모두 마치고 곧바로 치과를 갔다. 병원을 잘 가지 않은 건강 체질이라 단골치과가 없었다. 그래서 간판이 보이는 아무 치과로 들어갔다. 들어가 초진 기록지를 작성하고 아픈 이를 치료받았다. 사랑니와 어금니 사이에 염증이 생겼다고 뾰족하지 않은 기구로 잇몸을 마구 헤집었던 과정까진 기억이 있었다. 제 가방에 왜 약 봉투가 들어가 있는지는 희미했다. 선배가 사랑주라며 가득 채워줬던 소주 3잔에 뻗은 대학 신입생 때 같았다. 양말을 벗고 누워 익숙한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다 제 방이라는 걸 알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얼떨떨하고 배 밑이 서늘했다.
지훈은 제 칫솔을 노려봤다. 마트에서 묶음으로 싸게 팔던 치약을 길게 짠 칫솔이 약간 벌어졌다.
“악 깜짝아.”
욕실에 들어왔다 세면대 앞에서 저승사자처럼 우중충하게 서있던 지훈에 놀란 석민이 뒷걸음질을 했다. 귀신인 줄 알고 놀랐다. 익숙한 뒤태에 형인 걸 알고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손으로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형 여기서 뭐해?”
물어도 대답이 없다. 하루 이틀 안 닦으면 충치가 생길까? 라는 멍청한 물음을 꾹 참아야 하느냐 못했다. 칫솔을 들고 이를 닦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입이 가벼운 이놈이 부모님께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부모님이 아는 게 싫었다. 두 분은 세상에서 지훈을 가장 잘 아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냥 칫솔만 계속 노려봤다.
미친 것 같아. 석민은 칫솔 살균함에서 제 칫솔을 꺼내며 제 작은 형을 곁눈질했다. 세 형제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총명한 형이 칫솔을 태워죽일 듯 노려보며 요지부동이었다. 칫솔이 바뀌었나? 이미 제 입에 넣어 이를 박박 닦던 석민은 거품이 잔뜩 난 제 칫솔을 빼 확인했다. 식빵맨 스티커가 붙은 초록색 제 칫솔이 맞았다. 막내가 칫솔 실수 할 일도 없고... 좀 무섭고 이상해서 지훈의 어깨를 소심하게 콕콕 찔렀다. 귀찮게 굴지 말라며 손을 내쳤을 형이 반응이 없다. 기회다. 석민이 눈이 번뜩인다. 행동이 과감해졌다. 어깨를 찌르던 손을 들어 형의 말랑한 볼을 콱 꼬집었다. 그리고 동시에 번쩍! 번개를 맞았다.
치과를 또 갔다. 눈물을 매달고 왼쪽 뺨을 부여잡으면서도 가기 싫다고 버티는 석민의 엉덩이를 발로 차 치과에 끌고 갔다. 진료를 앞둔 석민보다 보호자 명목으로 따라온 지훈이 더 긴장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같이 떨던 석민의 허벅지를 때렸다. 정신 사납게 구는 지훈은 그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나란히 배치된 대기실은 어제 와서 봤음에도 낯설었다. 석민은 접수를 하고 의자에 앉자마자 기도를 했다. 그 옆에서 지훈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풍선처럼 크게 부풀고 부풀다 빵 터질 것 같았다.
“이 석민님! 들어오세요!”
두 개의 풍선이 빵빵 터졌다.
“형 내 꿈이 과학자인 거 알지?”
학교가 끝나고 하루라도 빠지려고 머리를 싸매는 학원을 가겠다는 기특한 소릴 진료실에 들어올 때까지 했다. 수학이 싫어 문과를 간 석민이었다. 지훈은 흘러들었다. 일부러는 아니었다. 석민만큼이나 지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훈이가 멀쩡했다면 겁먹은 석민을 놀려먹고 애가 진짜 울지도 모를 땐 무심하게 등을 두드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울기 직전에 이름이 호명되어 들어간 석민만큼 지훈의 속도 토네이도가 한바탕 몰아쳐 땅과 하늘을 뒤집어엎었다. 그나마 석민이 때문에 참았다. 석민이 없었더라면 이쪽으로 걸어오는 미인을 보자마자 오바이트를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뒤로 누우세요.”
또 봤다.
어제 사랑니가 아파 눈에 보이는 대로 들어간 치과에서 지훈은 소문의 예쁜 선생님을, 오늘 또 봤다. 바람이 잠시 쉬고 갈 긴 속눈썹을 말 그대로 나비 날개처럼 팔랑이던 미인이었다. 보고나서야 알았다.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기다리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치과이름이라 생각했었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어 예쁜 선생님을 보기 전까진 아리송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왼쪽에 선 미인을 봐서야 지훈은 소문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꽤 많이 썩었네요. 떼울 순 없고 신경치료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여러 번 치료도 받으셔야 합니다.”
의사의 진단에 석민은 울었고 지훈은 웃었다.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린 미인이 힐끔댔다. 지훈은 급하게 입술 꼬리를 단속했다. 순간적으로 좋아한 티를 낸 제가 너무 바보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떡하지?
귀가 뜨겁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인을 볼 수가 없어 의사의 추가 설명에 고개만 끄덕였다. 치료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석민이 앉은 치과의자가 뒤로 넘어갔고 지훈은 진료 내내 석민의 괴로운 신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미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착한 형이라며 칭찬받았다.
·석민은 그러게 이를 잘 닦으라 하지 않았냐며 부모님께 혼나는 중
·막내는 「들어오지 마세요.」
·카드 받음
·양심이 조금 찔렸다.
석민과 지훈은 꽤 친해졌다. 남자형제만 있는 집치고 사이가 좋긴 했지만 치과를 다니면서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 그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겁쟁이 석민은 바늘처럼 뾰족한 치과기구에 매번 제 형을 찾았다. 지훈이 보기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없는 흉기여서 자일리톨 껌을 줬다.
“이게 뭐야아.....”
겁을 먹어 눈이 떨렸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치과 다닌다고 자일리톨 껌을 주는 형이 웃겼다. 그래도 헛웃음도 웃음이라고 긴장이 풀려 마음이 편했다.
“으어억~~”
그렇지만 역시 무서웠다. 바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를 쑤실 때마다 석민은 바르작댔다. 다리를 꼬고 손은 하얗게 질리도록 쥐었다.
“아프면 왼손 들어요.”
말 잘 듣는 고등학생은 왼손을 바로 들었다. “응, 참아요.”
고인 침 때문에 꼬르륵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는 석민을 미인이 한 팔로 저지해 손을 잡았다.
“금세 끝나요.”
고문은 오 분이나 더 이어졌다.
사악한 두 악마가 어린 양을 괴롭히는 동안 지훈은 제 불쌍한 동생을 살피는 척 석민의 손을 덮은 미인의 두툼한 손을 쳐다보았다. 가만있지 못하는 석민의 두 손을 누르느냐 쫙 핀 손끝이 붉고 손등엔 힘줄이 돋았다. 어두운 톤의 피부를 가진 석민과 대비되는 흰 손이 강인해보였다. 짧게 깎은 손톱에서 손목, 팔꿈치, 어깨를 타고 올라가면 누운 의자에 맞춰 구부정하게 숙인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시린 조명에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나풀대는 속눈썹의 그림자와 살랑거리는 앞머리만 겨우 보였다.
“거의 다 끝나가요. 조금만 참자.”
낮고 다정한 음성으로 석민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지훈은 팔짱을 낀 제 손을 펴 앞뒤로 천천히 돌려보았다. 덩치에 비해 큰 손이 가늘고 희었다. 손톱 끝마디는 분홍빛을 띄웠다. 이상한 감정이 치솟았다. 보다 부끄러워 손을 털고 주머니에 넣었다.
치료가 끝나 의자가 일어서면 석민은 넋이 나간 채 입을 헹구라는 미인의 말에 기계처럼 입을 헹궜다.
“밥은,”
한 박자를 쉬고 마스크를 조금 내린다.
“세 시간 뒤에 먹고 꼭 반대쪽으로 식사하세요.”
드러난 얼굴에 폐가 쪼그라들었다. 하얗고 붉고 까맸다. 예뻤다. 잘생겼고 미인이었다. 그 말 말곤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몽실하게 뜬 뒷머리를 손으로 쓱쓱 쓸면서 웃는다. 시원하게 말아 올라간 입술에 주머니에 넣은 지훈의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선생님 저 치료는 언제 끝나요?”
석민이 칭얼거렸다. 다행이었다. 지훈은 남몰래 숨을 뱉었다.
“음. 한~참 있다가?”
“빨리 끝내주시면 안돼요? 저 학원도 가야하고 시험기간도 얼마 안 남아서 오기 힘들어요.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절대 안 돼.
“그건 원장님 마음이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네. 신경치료만 대여섯 번 받아야하는데 치료 끝나고 씌워야하고 다른 충치치료도 받으려면 한 달은 더 다녀야해요.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금세 끝나.”
한 달이라니. 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울상인 석민에 미인이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뗐다.
“오기 정 무서, 아니 힘들면 다른 충치치료도 같이 해줄까요? 오는 횟수 줄이게.”
“ㄴ...”
“아니요.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무리하게 진행하다 탈날 수 있으니 차근차근 진행해주세요. 괜찮습니다.”
대답은 지훈이 빨랐다. 미인의 눈이 커졌다. 와선 석민에게 투박한 위로나 던지며 말없이 서있었던 지훈의 빠른 대답에 놀란 모습이었다. 급한 마음에 대답했다가 뒤늦게 부끄러웠다. 충치하나 없어 치과를 못 갔다가 (석민에겐 미안하지만) 석민덕분에 치과에 자주 오래 올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리고 싶지 않았다. 지훈은 석민이가 치료가 끝나면 그 다음을 위한 계획도 머리에 짜둔 상태였다. 석민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의견 따윈 없는 철저히 지훈 제 욕심을 위한 계획이었다. 다르다면 석민은 착하고 걔는 덜 착했다. 지훈은 눈썹을 모으며 입모양으로 항의하는 석민을 모른 체 했다.
“보호자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리 진행하겠지만... 괜찮으세요?”
“네.”
지훈만 괜찮았다. 예약을 하고 나와서 지훈은 석민에게 추파춥스 통을 사줬다. 삐져서 부루퉁하게 따라왔다 생각지 못한 사탕선물에 석민의 얼굴이 펴졌다.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꽉 안고 좋아하는 얼굴에 조금 양심이 찔렸다. 그러다 돌연 석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치위생사 선생님이 단 거 먹지 말라고 주의하셨는데.”
지훈은 석민의 교복 마이 주머니에서 자일리톨 껌을 꺼내 한 개를 까 입에 넣어 씹고 나머지는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먹고 잘 닦으면 돼.”
당연하게도 석민은 입에 사탕을 문 채 잠들었다. 반쯤 벌어진 입에 흘러나온 사탕을 치우며 지훈은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참 귀여운 동생이었다.
·미인은 키가 그다.
·최 쌤이라 불린다.
·남색 에이프런 왼쪽 주머니에 달린 이름을 봤다.
·딱 미인다운 이름이었다.
·막내인 듯.
·다른 선생님들 부름에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다.
·말은 많지 않다.
·그래도 친한 환자하곤 스스럼없이 웃으며 대화한다.
·미혼 애인 없음. 가장 중요. 밑줄 쫙. 별표 다섯 개☆☆☆☆☆
치과 방문횟수가 늘어나면서 지훈의 마음도 크기를 더했다. 익숙해질만할텐데 미인을 볼 때마다 눈을 못 마주쳤다. 긴 속눈썹 사이로 진갈색 눈동자를 마주치면 입이 바짝 말랐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끝인사는 늘 목이 메여 한 번에 안 나왔다. 석민하고 제법 친해져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얼굴에 속이 탔다. 같은 이 씬데 나에겐 왜 숫기가 없는지. 진료실 들어가기 전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다짐해 들어가도 저 멀리 미인이 보이면 다 소용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사에 겨우 속삭이듯 말하는 게 다였다. 눈을 접으며 싱긋 웃는 얼굴에 고개를 푹 숙이고 괜히 귀를 만졌다. 매끈한 바닥에 검은 삼선 슬리퍼에 캐릭터 양말이 보였다. 사랑스러워 포슬포슬 거품처럼 번지는 미소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부끄러우니 말을 못하고 못하니 마음만 무거워졌다. 인사 한마디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본드가 붙은 것 마냥 입술이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보기만 하고 끝나는 날이 반 쯤 넘어가면서 마음이 애탔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적어도 얼굴을 마주하며 세 마디 이상의 대화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애타는 마음을 신이 알아줬던 걸까. 착한 석민이 덕분에 소원이 이루어졌다. 매번 저 때문에 고생하는 선생님들께 간식을 사드리고 싶다며 특히 최 선생님이 요즘 곰보빵이 그렇게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며 지훈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빵가게를 털었다. 치과 근처에 있는 대형 프랜즈차이즈 베이커리 말고 맛있다고 온라인에서도 소문난 치과 반대쪽에 있는 가게를 방문해 크게 질렀다. 계산은 돈 버는 사람이.
“올. 멋있다. 형”
학생 신분이라 용돈이 적은 석민대신 방학동안 알바하며 번 돈으로 결제한 지훈에게 양 검지를 내밀며 형을 추켜세웠다.
“오버하지 말고 빵이나 들어.”
음흉한 마음에 샀기 때문에 찔려 두 개의 봉지 중 한 개를 석민의 품에 던지듯 넘겼다.
“그것도 줘, 형. 내가 들을게. 이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손을 지훈에게 내민다. 뺏길까 지훈은 제 뒤를 봉지를 숨기며 그거나 제대로 들라며 석민의 엉덩이를 때렸다. 석민은 아프다며 찡찡댔고 지훈의 다리에 걸린 봉지 안 곰보빵만 바스락바스락 걸음 따라 울었다.
빵 선물에 치과 안이 훈훈해졌다. 석민과 지훈이 내민 빵 봉지에 활짝 웃으며 고맙단 인사를 했다. 그 날 석민은 안 아프게 치료를 끝냈다. 안 아파서 석민이 웃었고 지훈은 먹구름이 꼈다. 미인이 없었다. 석민을 전담했던 미인 선생님 말고 다른 분이 와서 의사와 협진을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진료실 안 어디에도 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둔 걸까. 예약을 잡으며 물어보려다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밤잠을 설쳤다. 생각이 많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 방문에서야 지훈은 미인이 월차를 썼다는 얘길 들었다. 이쪽으로 오는 미인에게 왜 지난번에 보이지 않았냐는 석민의 물음에 월차를 썼다며 내가 그리웠냐면서 히히 웃었다.
“빵 맛있게 먹었어요.”
웃음소리에 안심하며 따라 웃던 지훈이 돌처럼 굳었다.
“성수동 좋은 아침 맞죠?”
“...네. 그 집 빵이 맛있다 해서요.”
“제가 그 집 곰보빵 진짜 좋아하거든요.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맛있으셨다면 다음에 또 사드릴까요?”
“아이- 그건 너무 미안하잖아요. 안사다 주셔도 돼요. 마음만 받을게요.”
“네에.....”
시무룩했다. 반대로 몸은 하늘을 날았다. 처음으로 나눈 긴 대화였다. 마스크를 내려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는 미소에 머리와 발끝이 뜨거웠다. 선생님이 좋아한다 해서 곰보빵을 잔뜩 샀던 거라고, 진심이 위장에서부터 폴짝폴짝 뛰어 올라와 입 밖으로 터질 거 같았다. 입 안이 들썩거렸다. 힘겹게 타액과 함께 넘겼다. 그 사이 의사가 나타나 진료가 시작됐다. 마스크를 올리며 몸을 돌린 미인의 등을 보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다행이었고 아쉬웠다. 어차피 못 지를 마음이란 걸 알지만 평범한 선에서 다가가고 싶다. 숫기 많고 소심한 남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사실 더 다가가고 싶지만 문창과 수석에 빛나는 똘똘한 두뇌는 쓸데도 없이 가동을 멈춘 채 헛 발길질만 할 뿐이었다.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 인정해야지. 칫솔을 들고 이를 닦을까 말까한 날, 석민이 아파도 무서워 숨겼던 충치를 지훈에게 들킨 날에 석민의 충치가 매우 몹시 엄청나게 부러웠다는 것을. 치료를 받는 사람이 나였다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하는 질투와 부러움이 매번 지훈을 흔들었다. 미인을 마주할 때마다 욕심은 커졌다.
하지만 실제의 지훈은 석민의 보호자라 말하며 꿋꿋이 진료실에 들어오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한심한 남자는 곰보빵으로, 닿길 바라며 건넨 지훈의 마음은 꿀떡 삼켜진 채 활짝 펼쳐지지도 못하고 그 날의 진료는 그렇게 끝났다.
·망했다.
막내를 만났다. 석민이 먼저 발견했고 뒤이어 들어간 지훈이 막내를 알아보았다.
“이 찬! 네가 왜 여기 있냐?”
생각지 못한 인물의 만남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분홍색 에이프런을 하고 치과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막내에게 지훈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가 좀 썩은 것 같아서 왔는데. 그런데 형은 왜? 아. 석민이 형이 다니는 치과가 여기였구나?”
“요 브로-! 여기서 만나니 반갑구만!”
멀리서 큰 소리로 떠드는 동생들의 대화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훈은 머릿속 교통정리를 하느냐 바빴다. 쪼글쪼글한 도로 위 꽝꽝 막힌 교통체증에 과부하가 일어났다.
“동생이야?”
“네. 이 찬이라고 우리 집 막내에요.”
“형제가 몇 인거야?”
“삼 형제에요. 저기 지훈이 형. 나. 막내 찬이.”
“...다 인물이 좋네.”
알콩달콩한 미인과 석민의 대화도 모두 바람 앞에 재처럼 날라 갔다. 스트레스로 두통이 밀려왔다. 이마에 손을 올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망했다. 차근차근 준비한 계획이 꼬였다. 한 번의 기회가 이렇게 날라가다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석민을 냅두고 찬 옆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어떤가요?”
“다행히 충치가 아니에요. 예전에 치료한 치아인데 물들었어요. 살짝 다듬으면 지워져요.”
“다른 충치는 없어요?”
“네. 없어요.”
기쁜 얼굴로 나간 찬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며 지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다 망했다. 더 이상 지훈이가 내놓을 수 있는 패가 없다. 석민의 치과치료는 오늘로 끝이다. 지훈은 충치가 없고 다음 희생자로 내정되어있었던 찬은 한 번이라도 치과를 더 올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아주 건강한 치아를 자랑하며 지훈의 새싹을 발로 찼다. 이제 치과를 못 온다. 미인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다신 보지 말자는 미인에 석민은 방글방글 웃었다. 지훈은 입 한번 벙긋 못했다. 치과를 나서며 나온 건물 밖으로 지는 해가 하늘을 붉게 찢었다. 지훈의 마음도 갈기갈기 뜯겨져 떨어져 나갔다.
·흰둥이
요즘 승철은 핫하다. 아침에 출근해 평소처럼 환자에 치이고 있으면 선배 선생님들이 급하게 승철을 찾았다. 대부분 무거운 치과재료를 날라달라거나 기구를 갖다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조금 바뀌었다. 특정 환자가 방문하면 승철이 잡고 있던 석션팁을 뺏고 내쫓았다.
“저 마저 해야 하는데.”
“내가 할 테니까 최 쌤은 어서 이 석민 환자 준비해줘요.”
소심하게 두 손을 내밀어 방금까지 잡고 있었던 석션팁을 빼앗으려 해도 선배님 엉덩이 밀치기에 택도 없다. 싫다고 우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도 소용없었다. 이미 체어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이석민 환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어 몸을 돌리면 환자 옆에 선 흰둥이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못 본 척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꺄르르 웃었다. 순진한 반응을 보이는 제가 다 싫다. 결코 그런 게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해도 즐거운 재밋거리를 발견한 맹수처럼 재잘대는 선배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흰둥이 목 빠지겠네. 얼른 가요, 최 쌤.”
원장도 합세해 부채를 들며 힘껏 부추기까지 한다. 결국 승철은 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따로 전담이 없는 치과 시스템에 굳이 이석민 환자가 방문하면 일하고 있는 승철을 보낸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흰둥이와 승철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고 엇갈리는 그들의 손길과 눈길에 수만 가지 의혹들을 나열했다. 꼭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했다. 밉기도 했다. 잘 일하고 있던 평화로운 직장에서 갑자기 밀고 들어와 바람을 일으켜서 평탄한 삶이 구부러졌다. 다 저 사람 탓이야.체어 옆에 등대처럼 선 아담하니 작은 이석민 보호자 이지훈,일명 치과 내 흰둥이라 불리는 저 남자가 나, 최승철을 좋아한다.
흰둥이 그러니까 이지훈이 최승철을 좋아한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최승철 본인이었다. 이가 아파서 왔다는 초진환자가 아담하니 귀엽게 생겨서 진료 내내 얼굴을 붉히며 가길래 기억에 남았었는데 다음날에 자기보다 훨씬 큰 고딩을 데리고 와선 동생이 이가 아프다 해서 왔다며 손수 체어에 앉혔다. 그 때까진 몰랐다. 그냥 참 좋은 형이네 하는 감상만 들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원장님 진단에 울상이 되는 환자와 달리 좋은 티를 내는 낼 때는 요상하다 싶었다. 동생이 치료를 받는 게 그렇게 기쁠까. 치아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정도가 당시의 최승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결론이었다. 그 외엔 마땅한 답이 없었다. 설마 본인을 좋아해서 오래 볼 수 있기 때문에 기뻐서 그런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치료횟수가 늘어가고 굳이 같이 오지 않아도 되는데 꼬박꼬박 진료실 안까지 들어오는 흰둥이가 옆에 서서는 바르작대는 석민의 손을 제지한다고 잡은 승철의 손에 오래 머무른다는 걸 알고 나선 승철은 선뜻 이석민 환자 쪽으로 갈 수 없었다. 석션을 하느냐 등을 구부리거나 원장 오더에 진료 준비를 할 때, 이리저리 걷거나 뛰는 승철의 뒤를 따라붙는 시선이 끈질겼다. 휙 고개를 돌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데를 봤다. 수상쩍어서 가만히 바라보면 검은 머리에 덮인 귀의 일부가 빨갛게 물들었다. 부자연스럽게 다른 쪽만 꿋꿋이 보고 아닌 척 한다. 그게 눈에 보여서 입 안이 간지러웠다.
치과위생사로 근무하며 환자에게 몇 번 관심을 받았었지만 유독 흰둥이만 그랬다. 아담하고 귀여운 외모가 어려서 그런걸까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고백하는 학생처럼 어린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마음을 질질 흘린다. 들어와서 눈도 못 마주치고 어물쩡 인사하는 작은 목소리가 편지에 모든 마음을 쏟고 고이 접어 책 사이에 숨겨 감추는 어린 소년 같았다. 티가 나는데 알면 안 되는 그런 풋풋한 감정들.
“어제 최 쌤 안 나왔다고 비 맞은 흰둥이처럼 불쌍하게 있는데 마음이 다 아프더라. 최 쌤이 그만둔 줄 알았나봐. 하루 쉰 거라고 말해줄까 했는데 그냥 말 안했어.”
곰보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문 승철이 굳었다. “참 그거 흰둥이가 사온거야. 최 쌤 먹으라고.”
곰보빵 2개를 조지고 3개 째 격파하던 참이었다. 입안에서 죽처럼 짓뭉개진 빵을 맹물과 함께 겨우 삼켰다. 덩어리가 털썩 떨어졌다.
“그거 전부 최 쌤 거니까 집으로 가져가서 먹어.”
맛있어서 슬펐다.
그래서 흰둥이를 보면 피부를 박박 긁고 싶은 봄바람처럼 승철은 어쩔 줄 몰랐다. 밝고 무해한 얼굴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질질 흘리면서 다가오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좆으니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환자의 보호자, 그 환자를 담당하는 치위생사로 대하면서도 한 번 씩 몸을 떨었다. 빵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만 하자. 빵을 먹고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할지 거울을 보며 연습하다가 몸부림을 쳤다.
‘왜 그래?’
선배가 눈짓을 한다. 승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곤 고개를 숙였다. 환자 입안이 피바다였다. 급하게 왼손을 들어 석션했다. 붉은 물이 빠지고 벌어진 살사이로 누운 이가 들썩거렸다. 루트 피커가 치아 아래 살을 들어 올릴 때마다 피가 한 웅큼씩 터졌다.
“으윽”
환자의 두 손이 방황했다. 마취 앰플을 세 개나 썼음에도 매복치아라 소용이 없었다. 신경하고 꽤 가까워서 조심해야했기 때문에 직업은 더디게 이어졌다. 그 긴 시간을 환자는 혼자 감당해야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승철은 환자 손을 잡았다. 무섭지 않다, 괜찮다, 위로를 담아 매달리는 손을 꽉 잡아주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그랬다. 선배는 주책이라 했지만 그래야 승철 본인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모른 척 했다. 선배의 신호를 못 본 척 하고 진료에 집중했다. 머리 반쪽이 없는 사랑니가 전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원장님 얼굴이 환자 입안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시야가 보이지 않아 승철은 자리를 옮겼다. 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환자의 얼굴 일부가 보였다. 한껏 눈을 감고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단단히 올린 마음이 흐물흐물 녹았다. 승철은 아픔에 약했다. 환자 손을 잡아주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발가락을 힘껏 구부리고 두 손에 핏기가 가시도록 꽉 쥔 주먹이 애처로웠다.
“bar.”
핸드피스가 돌아간다. 환자의 신음이 한층 커진다.
고민을 했다. 고민하는 게 고민인데 안 고민이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왼손의 석션을 오른손으로 옮겼다. 어제 미용실을 들리지 말걸, 아주 잠깐 후회가 들었다.
suture를 끝으로 한 시간의 긴 발치가 끝났다. 원장님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원장실로 들어갔고 선배는 엉망인 브라켓 위를 정리했다. 승철은 체어를 일으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밥은 세 시간 뒤에 마취 풀리면 드시고 반대쪽으로 식사하시고.... 기계처럼 말하다 넋이 나가서 눈 풀린 흰둥이에 입이 다물어졌다. 오래 누워있어 뒷머리가 눌리고 옆머리가 뻗쳤다. 눈물을 흘렸는지 귀 쪽으로 투명한 길도 생겼다. 힘겹게 이를 뽑느냐 입술엔 붉은 피가 딱지처럼 굳었다. 잠시 엉망인 얼굴을 바라보다 체어에 달린 티슈갑에서 티슈를 꺼내 물을 살짝 묻혀 흰둥이의 입술을 닦았다.
“가만있어요.”
입술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놀라 얼굴을 뒤로 뺀다. 승철을 도망가는 흰둥이 뒷목을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입술을 살살 닦았다. 흰둥이의 뒷목이 뜨거웠다. 가까운 얼굴에 시선 둘데를 잃고 헤맨다. 승철은 모른 체 하고 끊겼던 주의사항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해하셨죠?”
확인하려고 눈을 올렸다 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동그란 동공에 마스크를 쓴 본인의 얼굴이 비추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꽉 막힌 목구멍을 겨우 열었다.
“다음, 주에... 실밥 풀러 오세요.”
“네.”
지는 낙엽 같은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끝.
the end.
흰둥이는 실밥을 풀러 치과에 오지 않았다. 예약 창 흰 칸에 홀로 적힌 이름은 날이 바뀌면서 뒤로 물러갔다.
이지훈은 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다.
·대박
말썽이던 사랑니를 뽑고 실밥 풀러 가는 날 지훈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버스에서 떠들던 두 아이가 말하던 예쁜 선생님이 지훈이 가던 치과의 그 미인이 아니었다는 점과 엉뚱한 곳을 방문해 미인을 보러 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실밥과 함께 날려버렸다는 점이었다.
20XX년 X월 XX일. 1930. 이지훈. 만 24세.
CC 왼쪽 아래 사랑니가 아파요.
20XX년 X월 XX일. 4시 34분.
해피콜.
통증은 없고 괜찮다하셨음. 약은 잘 드시고 계신다함. 주의사항 다시 설명 드렸고 예약날짜 다시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