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 ah하네요.
[우쿱] 성실히 이행 본문
w. 다우니
젠장. 망했다.
눈을 뜨자마자 지훈은 저가 엄청난 큰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익숙한 천장무늬와 익숙한 이불냄새에 깜박 속을 뻔했다. 창을 가린 커튼의 갈라진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의 너풀거리는 하얀 자락과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맑은 새의 노랫소리가 출근시간을 한참 넘어 회사 취직 후 첫 지각이라는 사상 최대의 오점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닿은 부드러운 이불 감촉 아래 지훈의 가슴팍 위를 가로지르는 뜨끈뜨끈한 팔이었다. 적당한 근육이 붙은 팔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피이- 피이- 어깨를 데우는 숨은 간지럽기까지 해. 너무나 현실이라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는 감각에 목을 천천히 돌리면 지훈이 덮은 이불을 같이 덮은 남자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진한 눈썹아래 풍성하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색이 연한 입술이 곧 입을 맞출 것처럼 위를 향했다. 이 또한 아는 입술이다.
내가 왜 이 입술을 알지?
다시 새가 운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 다리를 올려 옴짝달싹하게 만든 남자의 닿는 부위 모두가 열로 뜨끈하고 부드러웠다. 세상에 어떤 천도 이보다 사실적일 수 없다. 지훈은 알몸이었다. 남자도 알몸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 골반에 닿은 뭔가는 지훈에게도 있는 뭔가겠지. 찬공기에 노출된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니, 라고 생각했는데 발가벗은 두 남자가 한 침대에서 엉켜있었다.
시발, 시발스럽게도 어젯밤 이지훈은 최승철과 잤다.
*
“이대리. 오늘 지각했다며?”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다 볼이 눌렸다. 반듯하게 웃은 원우의 긴 손가락이 정직하게 지훈의 볼 가운데를 찔렀다.
“하지 말랬지.”
고딩 때나 하던 유치한 장난을 29살 먹고도 재밌어서 하는 원우는 지훈에게 무릎으로 엉덩이를 맞고도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댔다. 재밌는데 어떡해. 당한 걸 알고 허무와 빡침으로 뾰족해지는 눈이 재밌어서 끊을 수가 없단다. 해도해도 안 질려. 나는 평생 이걸로 너 놀릴 수 있을 것 같아. 정신연령 십-팔세 같은 새끼. 옹골차게 쥔 주먹을 어깨만큼 들자 원우는 두 손을 들어 지훈을 진정시키려는 듯 찬찬히 달랬다. 그 사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온 마케팅부의 자칭 호랑이 권대리가 지훈이 탕비실에서 성심성의껏 탄 커피를 가져가 후룩 마셨다.
“야 권순영!”
“이야- 커피 잘 탔다.”
커피를 훔쳐간 주제에 따봉을 날린다. 지훈의 미간이 구겨진다. 원우는 순영의 손에서 커피를 가져가 마시곤 따봉을 들었다. 두 개의 따봉이 모여 쌍따봉이 됐다.
“유치한 새끼들.”
화를 참으며 아득 이를 무는 지훈이를 보며 낄낄대는 대리 둘과 20년지기 친구를 넘어 같은 회사 대리라는 게 지훈 인생의 최고 오점이자 수치였다. 어린 나이에 함부로 우정을 맺지 말았어야했다고 999번째 후회하는 지훈은 결국 이것도 다 제 복이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번에 차가워지는 지훈에 재미없어진 순영이 새 커피를 타 지훈에게 건넸다.
“장모님 만나야 한다고 회식도 마다하고 부리나케 간 놈이 왜 지각을 했냐?”
아 권순영 초딩 입맛. 설탕을 아끼지 않은 커피에 인상을 찌푸리며 원우에게 권했다. 권순영이 탄 건 안 먹어. 쓰레기야. 속이 상한 순영이는 자기가 탄 커피를 들고 우울하게 홀짝댔다.
“석민이냐?”
층이 다른 놈이 어디서 주워들었을까 추측하다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심상치 않은 지훈의 눈빛에 순영은 눈치를 보며 원우 뒤로 숨었다.
“너 일도 안하고 지훈이한테 관심 쏟는 거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 이제 애도 아니잖아.”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전학 온 지훈에게 동경심을 갖고 따라하던 때를 입에 담으며 원우가 놀렸다.
“걱정해서 그랬지. 쟤 독감으로 골골대도 기어서라도 학교오던 놈이었잖아. 부러진 팔로 체력장 일 위 먹었고 두 시간짜리 통학버스를 타도 한 번도 지각안한 놈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서 출근했다는 데 내가 안 놀라겠냐?”
치. 이런 데서 진지하면 화도 안 난다. 개구지게 접히기도 하는 눈매와 다르게 매사가 진지한 권순영은 힘 빠지게 하는 데는 도사다. 어떻게 놀려줄까,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새끼가 이럴 때만 그래서 아직도 친구로 있나보다. 그 옆에서 나무늘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래.”
“왜 피곤한데?”
“그냥.”
“일이 힘들어서는 아닐 테고.”
“최 과장님 때문에 그래?”
“아니.”
대답이 빨랐다. 즉답에 네 개의 눈이 직선이 됐다.
“그러고 보니 오늘 최 과장님도 늦었다지?”
“민망한 얼굴로 들어오셔서 일하는 중간 중간 허리를 두들긴다고 부사원이 그러던데.”
“설마.”
“설마.”
“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놀란 두 사람이 몸을 돌린 사이 빠르게 빠져나왔다.
“앗!”
“당했다!”
속임수에 당한 두 사람의 불평이 발걸음을 좇아 따라왔다. 지훈은 손을 들어 귀를 털고 고개를 흔들었다. 들킬 수 없지. 눈치가 없어도 감이 좋은 애들이었다. 이미 멍청하게 굴어 반쯤 들켰지만 확신을 심어줄 줄 필요는 없다. 빠른 걸음으로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온 지훈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앉았다.
‘흐읏...!’
망할. 하얀 잔상이 지나갔다. 잠깐 긴장을 풀었다고 이러기냐. 얼굴에 열기가 뻗쳤다. 애써 무시하려해도 집요하게 뇌 주름을 타고 시신경을 건드려 환영을 만든다. 하얀 사람이 헐떡이며 울었다. 알코올때문인지 열기때문인지, 풀어진 혀가 지훈을 갈구했다. 그걸 들어주지 않아서 등을 안은 손이 어깨를 끌어당기며 목에 입술을 묻어...
「우리 찌후니, 어제 남편이랑 뜨거운 밤을 보낸 게 그렇게 부끄러웠어?」
「뭐?? 지훈이가??」
「ㅇㅇ. 밤새 자기랑 사랑을 하느냐 오늘 지각한 거래.」
「헐 대박. 지훈이 완전 열정남이네」
「결혼식도 안 치렀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결혼 후엔 어쩌려나 몰라」
「지각 밥 먹듯이 할 듯」
「남편이 아파서 못 나오면 옆에서 간호한다고 안 나올 상」
「불타면 소처럼 앞만 보고 갈 상」
「로맨티스트네. 로맨티스트-」
「세상 많이 변했다. 쟤 대학생 때 좋아하는 선배한테 고백도 못하고 끙끙 앓은 게 어젠데」
지들끼리 신난 대화창에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무역부에 문 대리의 어깨가 춤을 췄다. 잔뜩 신이 났다. 얄미워서 눈이 뾰족해졌다. 시원하게 뒤통수 한 대 갈기면 좋으련만. 회사 안이라는 게 서글펐다. 우리는 왜 회사도 같지? 왜 떨어지질 않느냐고! 젠장. 이번 인생 망했어. 지훈은 느슨하게 푼 넥타이를 단단하게 매었다. 목이 조인다.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저것들을 보지 않으려면 빨리 퇴근을 해야 했다.
*
숨이 잠들었다.
침대 한가운데 누워 어둠을 눈으로 세며 종긋 세운 귀로 소리 죽인 발소리를 들었다. 아버님이 부르셔서 늦게 집에 들어갈 거라던 승철이가 이제야 집에 들어왔다. 너는 일 때문에 못 온다고 말씀드렸으니 그렇게 알라는 메시지에 원치 않게 야근을 한 지훈은 문을 열고 나가 들어왔냐고, 우리 아빠랑 무슨 말을 나누었냐고 물어봐야하는지 고민했다.
가야하는데. 들어야하는데.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밤의 그림자가 몸집을 부풀려 지훈을 깔아뭉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침대가 꺼져 무너질 거 같아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승철이가 문을 두들기고 자냐고 물어보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분명 내일 오후에 아빠가 전화해 신랑한테 얘기를 들었을 테니 알거라며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어물쩍거리는 아들을 전화너머 목소리로만 알아채고 잔소리할 부모는 귀찮다. 거기까지면 잔소리 듣고 그만이지만 그대로 피해는 승철에게 돌아간다. 분명 그건 계약 위반이다. 이득은 공평하게. 피해는 주지 않도록. 계약을 기억하자.
[상호 관련된 문제는 지체하지 않고 공유한다.]
잘 알고 있다. 계약을 성실히 수행해야하는 자로서 같은 계약자인 승철이가 의무를 행할 수 있게 일어서야 한다.
“자...?”
문 앞에서 조용히 부르는 음성에 숨소리를 죽였다.
멀어진 발소리에 낮게 침음했다. 지훈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풀어야하는 성격은 어디가고 겁쟁이만 남아서. 비겁하게.
자신에게 실망했다. 혐오감도 들어. 나이는 어디로 먹었냐.
지훈은 엎드려 누우며 베개를 쥐어뜯었다.
어젯밤 우리는 자지 말았어야 했다.
*
이지훈과 치승철은 맞선을 통해서 만났다. 장소는 조선호텔 커피숍. 커피숍에 모인 10쌍의 커플 중 8쌍이 선을 보러 간다는 유명한 곳에서 불편한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를 본 지훈은 불퉁한 얼굴로 걸어오던 승철을 발견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된 줄 알았다.
“이 대리?”
의아함이 놀람이 되고 깨끗한 피부가 퍼렇게 질리는 걸 지켜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안녕하세요? 인사할 타이밍은 놓친 것 같은데. 처음 뵙습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네. 과장님도 설마 맞선입니까? 이건 쫌. 너무 사생활인데.
머리를 굴리며 적절한 인사를 찾는 동안 입을 가리던 승철이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발 내 맞선 상대가 아니라고 말해줘.”
아. 내 맞선상대가 최 과장님이시구나.
망했다.
“내 이번 상대가 이 대리일 줄은 몰랐어. 워낙 흔한 이름이니까.”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연신 쓸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알았으면 어떻게든 안 나왔는데.”
최 승철. 32세. 성수물산 영업부 과장. 지훈과는 대학 선후배사이로 그리 친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같은 과에 친구인 원우의 동아리 선배라서 종종 얼굴 보던 사이였다. 승철은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도 많아서 지훈이를 포함 승철을 싫어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인사만 주고받던 지훈에게 가끔 밥을 사주거나 족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졸업 후에도 연락이 이어졌고 성수물산에 취직을 위한 면접 준비 때 이미 취직했던 선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위해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맞선장소에서 볼 줄은 몰랐다. 돌멩이보다 흔한 대리 말고 다음 승진에 유력한 차장 후보인 최 과장이 이곳에 있을 줄은. 이른 나이에게 과장 직함을 단 유능한 그가 뭐가 아쉬워서 맞선을 보고 나를 만나는지 궁금했다.
“저는 이름도 몰랐어요. 그냥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왔거든요. 그렇잖아요.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나가지만 자리만 지키다 가는 거. 이번에도 그러려했거든요.”
말하고 눈치를 봤다. 기분나빠할까 싶었는데 공감한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잔을 들어 연하게 탄 커피를 마시곤 억울함에 눈썹이 팔자가 돼서 과장되게 한숨을 쉰다.
“그 놈의 결혼이 뭐라고.”
하고 싶지 않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결혼 안하면 큰 일 날 것처럼 호들갑떠는 부모님에 지친 얼굴이 저와 같았다. 한 번에 연민으로 마음이 젖었다.
그날 둘은 술을 마셨다. 기대에 찬 부모님의 전화를 무시하며 지친 눈빛을 주고받다 한 잔하자는 몸짓에 자리를 옮겼다. 술을 잘 마시는 승철에게 술을 따라주며 넉 잔에 반잔 마시던 지훈은 빨간 얼굴로 한숨을 뚝뚝 뱉었다.
“결혼은 왜 해야 하는 걸까요.”
기다려주면 언젠가 알아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당장 지구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서 있기도 힘든 자기에게 더 늦으면 안 된다느니, 시간만 보내다간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느니, 이러다 노총각으로 혼자 살다 고독사로 간다느니. 나를 위해서 하는 충고라지만 아무리 들어도 걱정을 빙자한 폭언이다. 불쾌함에 얼굴을 구겼다.
“전 부모님이 제일 이해 안 가요. 스무살 되자마자 이제 너도 성인이니 알아서 잘 하라고 그러셨거든요? 우리는 지켜만 보겠다고. 힘들어 보일 때 도와주겠다고 하셨던 분들이 왜 결혼에는 목을 매고 강요하는지 모르겠어요.”
29살까진 괜찮았다. 종종 연인이 있냐고 물어보셨지만 결혼에 기역자도 듣지 않았다. 좋은 연인을 만나는 게 좋지,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앞자리가 3으로 바뀌면서 지훈은 제 부모님의 다른 면을 보기 시작했다. 고작 2에서 3인데. 인생이 뒤바뀌었다.
소주병을 비우고 새 소주를 시킨 승철이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머니가 아프셔. 그래서 빨리 결혼을 해야 돼. 어때? 내가 더 끔찍하지?”
지훈은 졌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부모님이 바쁜 탓에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키워주셨거든. 그래서 나는 할머니면 꼼짝 못해. 부모님이 좋다 그래도 할머니가 아니, 그러면 하던 것도 멈출 정도야. 그게 나쁜 건 아니고. 날 사랑해서 그러시는 거 아니까. 지혜로운 분이시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할머니가 나 죽기전에 하라고 앞장서서 결혼하라고 강요하신다? 나쁘지?”
새로 받은 소주의 뚜껑을 시원하게 깐다. 반이나 남은 지훈의 잔에 마저 채우고 빈 본인 잔에 조심성 없이 가득 채워 한 번에 비우고 버럭 화를 낸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아직 팔팔하신 분이, 어? 죽을 나이가 다 됐다고 그러고. 내일모레 하는데 언제까지 할머니 옆에 콕 붙어서 괴롭힐 거냐고 협박하고! 손자 결혼하는 거 못 보고 죽어서 귀신 되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나한테 그러는데 어?! 오래 살 생각은 왜 안하시는데? 나는 할머니랑 백년만년 살 건데!!”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다 감정에 못 이겨 훌쩍인다.
“울지 마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승철은 젖은 눈을 치켜뜨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잘못 걸리면 머리로 들이박을 셈이다. 지훈은 안주로 시킨 쏘야에 소세지를 집어 승철의 입에 쑤셔 넣었다. 먹고 풀어요. 승철은 야무지게 턱을 움직이며 휴지를 뽑아 코를 풀었다.
“오늘 이대리 만나서 다행이야. 딴 사람이면 또 고생했을 거야.”
그건 공감. 맞선에서 바로 자리를 뜨는 건 실례다.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본 30분은 자리를 지켜야한다. 사회생활이 그렇다. 실질적인 결과물이 없어도 노력을 했다, 라는 느낌을 내야했다. 그래야 잔소리라도 덜 받지. 그래서 표정을 감추고 불편한 자리에 앉아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질문하고 답하며 꾸역꾸역 자리를 지킨다.
드물게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더 고역이다. 운명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값을 부풀려 선전하는 꼴은 이래저래 꼴 보기 싫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강하게 어필해도 들어먹질 않아서 떼어내기도 쉽지 않다. 과거 몇 번 그들 때문에 피곤한 일을 겪은 터라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이라서,
최 과장이라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술을 주고받으며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고 기분좋게 인사하며 헤어질 수 있으니까. 맞선 상대보단 회사 상사가 낫지. 낫나? 제 상사 윤 과장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 모르겠다. 최 과장이라 나은 걸지도.
“다음은 어떻게 하냐.....”
시무룩한 음성에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맞선은 이게 끝이 아니다. 결혼할 때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봐야한다. 부모님은 또 상대를 찾아 나설게다. 선을 주선하는 마담에게 돈을 더 얹어주며 괜찮은 상대를 물색하겠지. 친구한테 전화해 괜찮은 상대를 소개받는 방법도 있다. 더 이상 싫다는 아들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묵살한 채로 부모는 자식을 낳은 이래 가장 열정적이다. 내일부터 다시 결혼을 강요할 부모님의 연락을 그리는 것만으로 술이 들어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훈은 눈을 감으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냥 이 대리랑 결혼할까봐.”
눈이 번쩍 떠졌다.
“미쳤어요?”
킬킬 웃더니 잔을 꺾는다.
“나 결혼이 싫은 건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은 거지.”
연인은 없다. 당분간 없을 예정이다. 언제든지 연인으로 바뀔 관계는 제로. 자연히 만나 사랑하고 결혼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인연을 만들어야 한다. 맞선은 싫다.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연애는 별로. 좋아해서 만나 결혼하고 싶다.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싶어. 아이도 있으면 좋아. 난 축구부 만들고 싶거든. 지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뭐랄까. 결혼만 하면 되잖아.”
명절마다 친척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 전화에 받을까말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결혼만 하면. 진짜 결혼일 필요는 없다. 가짜라도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주변 사람의 등쌀에 못 이겨서 하는 결혼보단 가짜 결혼이 더 낫지 않겠어?
그 소리에 머리가 왜 반짝였는지 모르겠다. 형의 한탄에 구구절절 공감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엊그제 한 달 전에 결혼한 부서 막내(이자 친척동생)인 석민의 집들이에서 대리님도 얼른 결혼하시라며 우리 부서에 결혼 안 한 사람은 대리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랬는지도 몰라. 예뻐하던 동생의 결혼에 배신감과 더 날카로워지는 시선에 움츠러든 지훈은 화가 많아졌다. 10번째에서 세기를 포기한 맞선 때문이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라니. 미친 소리지. 화를 품은 심장이 울렁거린다. 피를 도는 알코올이 불을 붙인다. 지훈은 지긋지긋한 상황을 타파하고 싶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진짜 결혼합시다.”
이주 후 최 과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세 번째 울리는 부모님의 전화를 거절하고 베개에 머리를 처박던 때에 영원히 울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전화번호가 화면에 등장했다.
“그 때 그 말 아직 유효하지?”
총 세 번의 선을 더 봤다고 한다. 그 사이 할머니에게 불려가 두 시간을 손이 붙잡혀 잔소리를 듣고 마지막에 선산을 얼굴도 뵌 적 없는 6촌의 조카에게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그거 듣고 아빠가 쓰러질 뻔 했다며 당장 결혼을 하지 않으면 호적을 팔아버리겠다는 부모님 때문에 영혼이 나간 지친 목소리로 승철이 우는 소리를 했다.
“유효하지? 응?”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간절했다. 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효해요.”
전화기로 안도의 한숨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럼 우리 결혼하는 거다?”
가슴이 힘차게 뛰었다. 침대 맞은편에 위치한 한 면이 다 거울인 붙박이장에 비친 얼굴이 결혼식장 버진 로드를 걷는 신랑의 얼굴처럼 환했다.
“그래요. 우리 결혼해요.”
*
정정하자. 진짜 결혼이 아니다. 결혼 앞 글자에 위장이라는 단어가 가려져서 오해의 소지가 있어 정확하게 말하겠다. 이지훈과 최승철은 위장 결혼을 한다.
다음날 승철과 지훈은 회사에서 가장 먼 승철이 집에 모였다. 회사와 바깥은 사람 눈이 있었고 지훈은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최근에 이사해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승철의 집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시간을 두고 따로따로 퇴근한 두 사람은 정장차림 그대로 거실에 모였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는 종이 2장과 검은 볼펜, 빨간 인주가 놓여 있었다.
계약서. 24포인트 크기로 진한 3글자가 문서에 굉장한 무게를 더해주었다. 고작해야 위장결혼계약인데 확실히 해야하는 게 좋다며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둘은 머리를 맞대며 신중하게 계약 내용을 채웠다.
결혼을 하면 500m거리를 두고 따로 살 것.
같이 살면 불편하고 너무 멀면 힘드니까 이정도로 하자. 나는 이사한지 얼마 안 됐으니 네가 이사해야 할 거야. 너무 가까우면 들킬 수 있으니 적당한 거리를 두자.
전화는 꼭 받을 것.
전화가 힘들면 문자라도 남겨요.
부모님 용돈은 각자 챙길 것.
명절이나 생일 때만 서로 챙겨주기로 해. 용돈을 더 올려야 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하고. 친척들 선물이나 용돈도 확실히 해요. 그래.
아이는 갖지 않을 것.
우리 사이에 아이 있으면 큰일이에요. 알아. 부모님이 입양할 아이를 보러 다니자하면 바빠서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다고 확실히 해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살면서 더 추가될 수 있지만 지금은 이곳으로 충분했다. 마지막까지 다 읽은 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상대가 생기면 꼭 말해줘요. 괜히 숨겨서 나중에 일 키우지 말고.”
승철이 펜을 들어 내용을 적었다. 애인이 생기면 숨기지 않고 말할 것.
계약서가 마무리됐다. 꼼꼼히 확인하고 인주를 가까이 당겼다. 꼼꼼히 확인한 승철의 얼굴이 일순 약해진다.
“이 결혼 잘 속일 수 있을까? 들키면 어떡해.”
위장결혼이다. 위장. 사전에 검색하니 『본래의 정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밈. 또는 그런 수단이나 방법』 이라고 한다. 거짓. 우리는 지금부터 거짓말쟁이다.
“들키지 않게 해야죠. 들킬 거란 생각 말고 들키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어요.”
불안함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또렷해진다.
“그래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거니까. 안 들켜, 난.”
입술이 굳게 물린다. 엄지에 인주를 비벼 골고루 묻히고 계약서에 엄지가 하얗게 질리도록 누른다. 승철의 지문이 선명하게 벤 계약서를 받은 지훈은 한 번 더 계약서를 훑었다. 도장만 찍으면 무르지 못한다. 앞만 보고 가야한다. 어떤 일이 생길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편안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의 답이었다. 모 아니면 도다. 지훈도 인중을 묻힌 손을 계약서에 진하게 찍었다.
“잘 부탁해요.”
“나도 잘 부탁해.”
위장결혼의 서막이었다.
*
첫 번째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인사드릴 사람이 있다는 전화에 믿지 못하셨던 부모님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환한 미소로 받아주었다.
“승철이가 대학시절에 싹싹하고 착한 후배가 있다고 자주 입에 올렸는데 그게 아드님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대학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니. 어쩜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저도요. 나중에 회사사람이랑 선봤다는 소리 듣고, 됐다안됐다 소리도 없어서, 회사 다니기 껄끄러울까 굉장히 미안했는데 이렇게 결혼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드님이 두 분을 닮아 인상이 참 좋아요. 지난번에 저희 어머니를 둘이서 인사드리러 찾아왔는데 어머님이 남편 될 사람이 참 착하고 바르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어요. 필히 사돈될 분들도 좋을 분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오늘 얼굴 보니 알겠어요. 너무 좋으세요.”
“사돈도 참.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아들을 낳고 키우셨으면서 겸손하시네요. 전 아드님 얼굴 보고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는걸요.”
“연예인해도 되겠어요.”
“하하하.”
“거기다 성격은 얼마나 다정한지. 어제 아드님이 우리한테 전화해서 오늘 상견례 한다고 긴장하지 말고 푹 주무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라고 위로해주는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었어요.”
귀 열고 못 듣겠다. 니글거리는 속을 찬물로 들이부었다.
‘웃어.’
맞은편에 승철이가 눈으로 말한다. 지훈은 늘어진 입술꼬리를 바짝 당겼다. 예의상 나누는 덕담 뒤로 본격 아들자랑이 이어졌다. 상견례가 자식 자랑하는 만남이라더니. 딱 맞는 말이네. 과장은 기본이요, 없는 얘기까지 만들어내며 아들 자랑하는 부모님에 지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티는 내지 말아야지. 괜히 분위기 흐려 망칠 필요는 없다. 지훈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들들은 간간히 웃고 대답하고 상대를 사랑스럽게 보며 서로 말을 맞춘 것들을 부끄러워하는 척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몇 군데서 드물게 말이 막혀도 상대가 유연하게 잘 풀었다. 선을 통해 만난 게 이점이었다. 사내연애로 설정했으면 진즉에 들켰다. 괜찮은 분위기에 결혼장소와 날짜를 대강 맞추고 끝낸 지훈과 승철은 느슨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숨을 돌렸다.
“이제야 살 것 같네.”
결국 체한 승철이가 소화제를 까며 물었다.
“우리 이제 만난 일 없는 거지?”
결혼 강요나 설득하려는 전화는 당연 없고. 서로 다시 만나서 인사할 일도 없다. 결혼준비만 무사히 끝마치면 해방이다. 준비는 두 사람이 해야하지만 마침 들어가는 프로젝트로 바빠 시간을 못 낼 예정이라 부모님께 모두 맡기기로 했다. 대기업 다니는 아들이 자랑인 부모님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본인들이 하시겠다 승낙하셨다. 웨딩예복 보러 갈 때만 한 번 모이면 됐다. 드디어 끝이었다.
해방이었다.
*
라고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
우습게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지훈과 승철이가 너무 순진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가문과 가문이 만난다고 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생활했던 가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게 결혼이라고. 두 사람만 똑 떼어 할 수 없는 게 결혼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결혼이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는 건 불변의 진실이었다.
처음은 승철이었다.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할 것인가 집에 가져가 일을 이어 할 것인가 고민하던 때에 전화가 울렸다. 예비 아버님이었다. 처음 보는 전화에 거래처 전화인줄 알던 승철은 허리를 곧추 세웠다.
“에! 아버님!”
목소리가 튀었다. 귀에 열이 올랐다. 퇴근준비하던 직원들이 움직이다말고 승철을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에 놀라 입을 손으로 가리며 허리를 숙이고 빠르게 복도로 나갔다.
“네 아버님. 아니요. 아직 회사에요. 예, 무슨 일이신가요?”
“잠깐 이곳으로 와줄 수 있니? 인사드릴 분들이 있어서 말이야.”
“죄송하지만 저 오늘 야근...”
“잠깐이면 돼.”
잠깐은 개뿔. 아버님이 불러주신 주소로 간 곳은 어느 삼겹살집이었다. 그곳은 아버님의 동생인 숙모가 하시는 가게로 얼떨결에 숙부, 숙모님과 인사를 나눈 승철은 오랜 벗들에게 예비사위를 자랑하고 싶었던 아버님 옆에 꼼짝없이 붙잡혀서 고주망태가 되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었다. 쏟아지는 질문과 웃음 속에서 영업부 과장에 걸맞는 미소를 장착하며 노래까지 불렀다. 삼겹살집에 노래방 기기가 왜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기겁하며 달려온 지훈도 기깔나게 노래를 부른 건 덤. 여전히 노래 잘 부르네, 감상에 젖다가 등 떠밀려 듀엣도 했다. 선곡은 하필 좋아죽는 사랑노래였다. 지훈과 승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르신들은 그런 둘이 귀엽다며 핸드폰을 들어 촬영을 했다. 흑역사 하나 추가였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만남은 엉덩이를 두들기며 예쁘게 살라는 어른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고 지훈에게 안기듯 기대며 야 망했다, 이거 망했다 라는 소리만 주구장창 함으로서 끝났다. 예상치 못한 일 중에 하나였다.
지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결혼소식을 들은 순영이가 동기들에게 알리는 바람에 대학동문회를 참석하게 됐다. 이런 모임을 좋아하지 않아 숱하게 거절했는데 하필 상대가 선배였던 최승철이었다. 이지훈은 몰라도 최승철을 마음에 품어본 적 없는 사람은 없었다. 최승철은 반짝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최승철이 이지훈과 결혼한다는 게 가만 둘쏘냐. 승철은 못 건드려도 이지훈은 죽이려 하겠지.
축하를 겸하는 놀림과 질투에 절대 안 된다는 형을 기어이 불러내 뽀뽀를 시키는 저 새끼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아서 지훈은 삼 일간 턱관절이 아팠다.
그래 이것까지 그럴 수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짧게 지나간 뽀뽀를 받았던 건 언젠가 애들의 귀에 들어가면 일어날 수 있다 생각한 예상범위 중의 하나니까, 억지로 뽀뽀하고 어색하게 웃던 형에게는 미안했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결혼은, 두 사람의 가족과 인생의 융합은 결코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천천히 맞물려 탐색하고 탐구하는 시간은 필수였다. 변화되는 환경에 맞추어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가, 두 사람이 직접 움직여야했다. 바쁘다는 핑계는 말 그대로 핑계였다. 결혼에서 지훈과 승철의 손이 닿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전부였다. 두 사람의 손을 타야만 진행이 됐다. 결혼을 하면 편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예상은 갈수록 벗어났다. 전화번호에 예비 시댁의 어르신들 번호가 차곡차곡 저장됐다. 전화로 안부를 묻고 부르시면 달려갔다. 한국은 빌어먹을 집단문화였다. 만날 사람이 넘치고 넘쳤다. 청첩장은 밥과 함께 꼭 사야했고 부모님들의 주변사람까지 챙겨야했다. 정년퇴임이 얼마 남지 않아 인간관계가 최고봉에 이른 점도 한 몫으로 결혼 후에 다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 걸 생각하고 어지러움에 생각을 멈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성격이라도 모났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둘 다 물렀다. 승철은 사람을 좋아했고 살가웠다. 어색할만한 지훈의 어른들에게 사근사근 웃고 손을 잡아주며 대화를 잘 이끌었다.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순진하게 웃고 기대오는 이가 안 예쁠 소냐. 금세 우리 예쁜 아가가 돼서 으레 주말의 저녁은 어른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 되었다.
어색함을 감추며 묵묵하게 밥을 퍼는 지훈에게 어디서 저런 예쁜 아가를 만났냐며 복인 줄 알라는 아빠한테 말은 못하고, 연근을 앞에 두고 곤란해 하는 승철을 힐끔 보고 그릇 채로 가져와 먹었더니 벌써 지 신랑 챙긴다는 소리에 얼굴도 못 들었다. 귀고 목이며 시뻘개졌으리라. 보내주지 않는 어른들 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승철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나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반대도 그랬다. 지훈은 승철 어른들에게 약했고 할머니를 보러 가는 날엔 힘껏 웃느냐 입술에 경련이 일어났다. 집가는 길에 광대 마사지는 필수였다. 거기다 입조심도 해야 했다. 인자한 눈과 마주보고 있노라면 다 말할 것 같았다. 가짜라고. 우리는 가짜결혼을 한다고. 거짓이 늘어났고 늘어날수록 비탈길을 타고 내려오는 눈뭉치처럼 거대해졌다.
그 사이 지훈은 승철이 집으로 이사했다. 생각하지 않았던 예상범위 밖의 가장 큰 사건이었다. 강요나 설득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선택이었지만 누군가 억지로 등을 떠민 것 같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의 위장결혼을 공고히 해야 했다. 불편한 얼굴로 문을 열고 괜찮다는 지훈을 도와 짐을 나르며 승철은 몇 번이고 주저했다. 지훈은 모르는 척 했다. 질문이 뭐일지 알아서. 자신은 그 질문에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지훈의 부모님이 집을 방문했다. 삼십년을 같이 살다 결혼을 앞두고 독립한 아들이 걱정된 부모님의 방문이었다. 집이 좋네. 칭찬 일색은 침대에서 멈칫. 지훈은 침대가 2개라 엄마한테 혼났다.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따로 자면 안 돼. 알겠지? 대답을 들을 때까지 엄마는 집요하게 물었다. 네. 지훈은 제 귀에도 겨우 들리는 정도로 대답했다.
아빠엄마는 왜 왔어? 그 아빠에 그 아들. 승철의 눈과 똑같은 아빠는 인자하게 웃으며 불퉁한 승철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둘이 같이 살 집이라는데 어떤지 봐야지. 사돈이 말해준대로 깔끔하고 좋구나. 두 사람은 그 때 부모님들끼리 활발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약서엔 몇 가지가 더 추가됐다. 내용은 달랐지만 뜻은 같았다.
우리의 위장결혼을 확실히 할 것.
*
“엄마한테 전화한다면서요?”
“응.”
“왜요?”
“네가 하니까.”
소파에 앉아서 올려다보는 승철은 지훈 탓을 했다.
“나는 형 할머니가 걱정돼서.”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염치가 없잖아.”
기브앤 테이크. 네가 한 만큼 나도 한다. 그게 우리 계약의 첫 번째 아니야?
맞다. 우리의 결혼은 철저하게 계약으로 이어졌고 계약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문서다. 어느 누구의 희생 없이 공평하게 이득을 가져야했고 승철의 행동은 그에 맞는 합당한 행위였다.
“네가 하면 나도 해.”
수분이 말라 목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폐가 짓눌리는 답답함에 턱에 힘이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승철의 곧은 눈빛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봐.”
잘못한 사람을 타박하는 것처럼.
다 맞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지훈은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 너무 이상해요’
그 한 문장을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어서.
“형이 부담될까봐 그랬어요.”
결혼하는 사람 같아요, 우리.
말을 숨긴다. 승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짙은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지고 눈은 가냘프게 감겼다.
“조심할게.”
옳은 답이 아니다.
“네.”
역시 틀린 답이었다.
*
결혼이 한 달 연기됐다. 승철의 할머니가 입원을 하셨다. 여름의 꼬리에 매달린 가을의 재채기에 앓아 누우셨다. 새벽에 전화가 와서 큰일 나는 줄 알았다며 눈물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병실 밖에서 밤을 지새운 승철이 옆에서 지훈은 그저 승철의 등을 두들겼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 영역이 아니었다. 정말 진짜 결혼 상대였다면 위로를 하고 보살폈겠지만 지훈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계약을 한 사이일 뿐. 자리를 지키는 게 계약내용의 전부였다. 그게 지훈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리하지 마.”
상한 얼굴에 지훈의 어깨를 꾹 쥐는 원우에게 모든 걸 뱉고 싶었다. 단 한사람이라도 진실을 안다면 알려주지 않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을.
“결혼이 원래 힘들어. 그래도 네가 힘내야 과장님도 힘내지. 둘이 이제 부부잖아.”
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울컥 올라오는 걸 삼키며 목을 끄덕였다.
*
다행히 할머니가 빠르게 회복했다. 결혼을 반드시 봐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가족들이 기뻐했다. 승철은 웃었고 또 우울했다. 지훈은 그 간극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회복했다해도 미룬 결혼을 당길 순 없었다. 결혼날짜가 미뤄져 겨울에 하는 게 걱정된다는 부모님과 달리 승철은 겨울이라서 좋다고 했다.
“난 겨울이 좋더라. 차갑고 하얗고 맑아서 가만히 바라만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
맥주잔을 비우며 수줍게 웃는 승철의 얼굴이 익숙해졌다. 청첩장 을 다시 찍어야한다는 수고로움을 빼고 할 일이 없어진 두 사람은 자주 시간을 나누었다. 병문안을 하고 온 날이면 문을 두들기며 맥주캔을 흔드는 승철에게 지훈은 뭐라 했나. 그거 흔들고 거품나면 형이 책임져요 라고 했나. 조금 밖에 안 흔들었다고 삐죽대던 입술은 따자마자 몽글몽글 올라오는 거품을 급하게 삼키느냐 엉망이 됐다. 그러고도 손을 타고 바닥을 더럽혀 지훈아- 민망함에 히죽 웃었다. 영락없는 7살 꼬맹이 얼굴이라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바닥을 닦았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그 위에서 승철은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 때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영양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형 술버릇은 별로다. 그래도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경계의 영역이 희미해짐을 느꼈다. 계약서에 명시된 것들을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성실히 수행했지만 그것이 계약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밤에 술잔을 나누는 게 익숙했고 서로의 부모님의 전화가 어색하지 않았고 거짓말은 능숙해져갔다. 이것이 연기라면 대상감이라 속으로 비웃기도 했다.
이게 옳은 걸까. 의구심은 저도 모르게 싹을 피웠다. 결혼을 피하기 위해 시작된 위장결혼은 예상범위의 안팎을 드나들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했다. 끝이 없었다. 외줄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 있을 곳은 좁아졌다. 발아래를 단단히 받치던 굵은 줄은 풍파에 곧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리며 얇아져 실처럼 꿰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 말았어야했다. 애써 무시한 답은 갈수록 선명해졌다. 애초에 형과 결혼하지 말았어야했다고, 퇴원한 할머니를 찾아뵙고 돌아오는 길에서 지훈은 운전대를 잡은 최승철의 왼손 약지를 쫒으며 후회하고 후회했다.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우린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저질렀고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거예요.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친구도, 가족도, 그리고 나도. 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됐어요.
입술을 물며 지훈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격양된 지훈의 말을 듣는 승철의 무릎 위에 올린 손이 심장을 뜯었으면 좋겠다. 뜨겁게 타는 심장을 떼버려서 죽어버리게. 차갑게 식어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는 엔진이기를. 그렇게 멈춰주기를 바란다.
‘아이는 언제 가질 생각이니.’
더 이상 갈 데는 없다.
“우리 파혼해요.”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
복도에 불이 꺼졌다. 비상등의 시린 조명이 찢은 어둠에 얼굴에 아른거린다. 변화하는 시야에 덜컥 겁이 나 몸이 떨렸다. 미세한 신체변화에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십 분? 이십분 됐나. 문을 앞에 두고 지훈은 주저했다. 익숙한 8자리를 누르고 해제 된 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에 있을 혹은 없을 사람의 흔적을 온 몸으로 감각하고 안도하거나 두려워할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쉽게 말해 승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둘은 어제 잤다. 술에 취했고 화를 냈다. 일방적이었고 양방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은 일부였다. 어쩌다 잤는지 몰라도 어떻게 잤는지는 생생했다. 빨고 핥고 깨물고 마구 헤집었다. 좁고 빡빡한 곳을 제 것으로 열어 여러 번 제 열로 덮었다. 얼마나 생생한 지 승철의 귓바퀴에 모양이 혀끝에 남아있을 정도라 꿈이라고도 못했다. 아침에 알몸의 승철을 보고 어제의 자신을 후회하며 도망가서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으려 곤두서느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어서 침대에 누워 쉬고 싶다고 아우성쳤다.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차라리 아침에 도망가지 않고 부딪혔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후회해봤자 똑같았다. 분명히 도망갔다.
도망가고 싶다. 모른 일 하고 싶다. 솔직하게 없는 일처럼 살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지훈은 또 손을 내렸다. 답을 자신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몸이 뒤로 떠밀렸다. 기계음 뒤로 철컥, 문이 열리며 편안한 차림의 승철이가 얼굴을 보였다.
“들어와. 추워.”
문이 금세 닫혔다. 직접 열고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환해진 복도에서 지훈은 얼굴을 쓸었다. 더는 도망칠 데도 없어. 스스로 문을 열어야할 시간이었다. 8개의 숫자를 누르고 들어가 식탁에 앉은 승철의 맞은편에 의자를 당겼다. 테이블엔 두 개의 계약서가 있었다. 몇 번의 수정으로 빽빽한 계약서는 꼭 지훈과 닮았다. 지훈은 손을 뻗어 계약서를 잡았다. 소리 내어 한자씩 읽었다. 패기와 닮은 성질로 쓴 계약서의 마지막까지 읽고 눈을 들었다. 피곤으로 빨간 눈이 흔들림 없이 마주했다.
“파혼할래?”
승철이 물었다. 어젯밤 지훈이의 물음에 물음이었다.
“파혼이라 하니까 웃기다. 계약서로 작성한 위장결혼인데. 정정할게. 계약 파기할까?”
헛웃음을 터뜨리고 벽을 잠시 쳐다보던 승철이 지훈을 마주했다.
“네 뜻대로 할게.”
선택은 지훈에게. 짧게 숨을 들이켰다. 계약서가 손에서 일부 구겨졌다. 그걸 내려다보는 눈빛이 가녀려졌다. 지훈은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계속해요, 우리.”
허탈과 실망과 우울로 무너진다. 등받이에 기대며 구겨지는 어깨가 시렸다. 겨울은 좋아하지만 추운 걸 싫어해 승철은 집에 돌아오면 항상 난방을 켰다. 그런데 지금은 공기가 찼다. 퇴근시간을 한참 넘어섰는데 바닥에 냉기로 천장까지 얼었다. 부엌은 젖은 흔적 없이 바짝 말랐다. 아까 지나쳐본 쓰레기통은 어제 그대로 텅 비었다. 필시 저녁을 굶었겠지. 지훈은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에 있는 보일러를 켜고 정장 안에 보관한 폰을 꺼내 배달이 가능한 음식을 주문했다.
“너 후회하잖아.”
부엌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들리고,
“이렇게 후회하는데 계속 하면 과연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모두를 속이면서 하는 이 결혼이 행복할 것 같아? 너는? 행복해? 괜찮아?”
요동치는 감정을 품은 목소리가 떨린다. 아. 그동안 승철은 얼마나 얼마나 가벼워지려고 애를 썼을까.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당장의 결혼강요를 피하자고 한 위장결혼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우린 알았어야했어. 안 그래?”
승철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자고? 정말로? 넌 이걸 계속 하고 싶어?”
“...가짜로 시작돼서 후회했어요.”
날카로운 숨의 칼날.
“거짓말로 속여야 하는 게 괴로웠어요.”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감에 몸이 뻣뻣했다. 심장이 죄어 들어가 작은 뜀에도 터질 것처럼 두려웠다.
“진심임에도 진심이라 말할 수 없어서 슬펐어요. 다 끝내면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그런데 못하겠어요.”
하지만 터지지 않았다,
“나 형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확실히 그건 알겠다. 나는 말주변이 없다.
“가짜 말고 진짜로요.”
찰나는 억겁처럼. 지훈은 몸을 돌려 승철을 마주했다.
“좋아해요, 진심으로.”
승철은 말이 없었다.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파르르 떠는 입술을 꾹 무느냐 입을 열지 못했다. 마음이 젖었다. 지훈의 눈도 촉촉해졌다.
“너는,”
떨리는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깨문다. 노려보는 빨간 눈에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승철이 거친 손길로 바지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지훈에게 던졌다. 묵직하게 맞고 떨어진 건 작은 상자였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결혼을 미루기 전 부모님 손에 붙들려서 방문한 예물전문점의 분홍색 상자였다. 형식의 일부였지만 반짝거리는 보석 앞에서 승철은 신나며 눈을 빛냈다. 지훈도 들떠 한참을 고르고 골라 산 약속의 증표가 승철의 손에서 지훈의 가슴을 맞고 떨어졌다.
“똑바로 해. 나 프로포즈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승철이 울음을 토한다. 지훈은 얼굴을 닦았다. 젖은 얼굴이 못생기지 않을까 걱정은 미뤄두고 보석함을 집어 열었다. 나란히 자리한 반지 2개. 눈물이 또 터져서 바보같이 소리를 냈다. 좋아한다고, 그새 이런 것도 닮는지. 참으려 눈을 꾹 감았다. 먹먹한 귀에 들리는 낮게 끓는 닮은 울음소리 2개. 이것이 왜 기쁜지.
가는 입술이 호선으로 구부러진다. 지훈은 울음을 삼켜 반지 한 개를 꺼냈다. 거칠게 닦아 젖은 승철의 손을 잡아 무릎을 꿇었다.
“나랑 결혼해줄래요?”
부어서 빨간 눈두덩이가 달님처럼 동그랗다. 승철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결혼식은 정신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러 오는 거 아냐? 이건 무슨 부모님 잔치인데.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부모님이 주인같아! 두 사람의 지인보다 부모님의 지인이 더 많았다. 한 2 : 8 정도 되보였다. 부모님의 회사 동료, 학교 동기들, 친척 어르신과 동네 분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우르르 빠졌다. 버스 2대는 부족할 것 같다 그래서 2대도 많다했더니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려면 안 된다고 부모님은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아들들은 졌다. 백기를 들고 버스 한 대를 추가했다. 세 대도 적었다해서 혀를 찼다. 분명 부모님은 회수금을 거두고도 뽕 뽑았다. 결혼하는 신랑보다 더 방글방글 웃는 부모님 옆에서 바쁘게 인사하고 웃는 두 사람은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축하하기 위해 온 친구들과 분명히 나중에 기억 못한다며 증거를 남겨야한다면서 사진을 다 찍고 나면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생겼다. 멍한 정신으로 생수병을 까 목을 축이는 동안 정신 나간 지훈이가 터덜터덜 방안으로 들어왔다.
“형 결혼은,”
“못하겠어? 파혼할까?”
“두 번은 못하겠다고요.”
그 말 뜻 뭐야.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한 번 더 하려고 했었단 거야? 흘기는 눈에 지훈은 승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형 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그리고 토닥토닥. 몰라! 지훈의 등을 퍽퍽 치고 몸부림치는 지훈을 터뜨릴 것처럼 안는다. 죽어요. 약한 소리에 금세 마음이 풀려 승철도 지훈을 마주 안았다.
“꼭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강직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을 실어 말한다. 너 진짜 힘들었구나? 멋 낸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어 꼭 안아주었더니 같은 힘으로 안아준다. 행복하다. 바보같이 웃음이 터졌다.
“신랑님들! 시작할 시간이에요!”
잠시 서로를 위하는 시간을 못 보겠다는 듯 진행자가 급히 두 사람을 부른다. 한 번 더 꼭 안고 대기하는 곳으로 걸었다.
“떨려?”
“아ㄴ, 뭐야. 잠깐만. 너 말이 짧다?”
“이제 곧 결혼식 올릴 사이인데 뭐 어때.”
“뭐 어때? 야, 나 안한다? 결혼 안 해?”
“파혼하게?”
삐죽이는 입술에 팔을 당겨 입을 맞췄다. 짧게 환호성이 터졌다. 주책이라는 주변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진 승철이 지훈의 손을 쥐어 터뜨릴 것처럼 잡았다.
“결혼만 해봐라. 너 가만 안 둘 거야.”
“응, 나도 사랑해.”
치. 그런 말은 반칙이야. 좋아서 녹아버리잖아. 긴장으로 얼은 몸이 사르르 녹아 승철은 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럽게 쓸었다.
“아 맞다. 지훈아. 우리 망했다.”
“?”
물음표를 띄는 얼굴에 살포시 웃었다.
“아버님이 애는 언제 가질거냐는데!”
지훈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만 불러 재촉하더니 언제 형한테 가서 그런 말을 했어! 정말 미친다.
“이제 결혼했는데! 벌써 아이 언제 가질거냐는 소리 듣는다! 우리 망했어. 아이 가질 때까지 잔소리 들을 판이다. 아이 가지면 좀 낫게? 바로 둘 째 언제 가질거냐 할 거고 둘 째 가지면 애들 교육에, 성적에, 대학이며, 취업까지. 줄줄이 잔소리 이어질 거야.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그대로! 결혼이 끝이 아닌 거지!”
망했다며 짧게 비명을 지른다. 진행자 멘트가 끝나고 따라 음악이 바뀐다. 식장이 환호로 술렁인다. 곧 신랑입장이다. 승철은 지훈의 손을 흔들었다.
“어때? 그래도 결혼할거야?”
지훈은 피식 웃었다.
“그거 알아?”
“응?”
“형은 내 의견부터 먼저 묻는 거?”
“어?”
“그럴 마음이 있으면서 일단 나한테 묻잖아.”
“아.”
물어보고 기다린다. 마음을 숨겨 감추면서 속이지 못한다. 지훈은 그 마음에 데였다. 그래서 좋았다. 마음이 같아서. 답은 가까이 있었다.
“2명받고 축구부 함 만들어보지.”
눈썹을 들어 올리고 눈을 찡긋 접으며 허세를 부린다. 승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옛적에 흘러들은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너 그 때부터 나랑 결혼하고 싶었던 거지. 귓가에 속삭이자 간지럽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음악이 바뀐다. 눈을 마주했다. 행복한 얼굴.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맞잡는 손에 힘이 더해 서로를 강하게 구속한다. 어느 누구도 가르지 못할만큼 단단한 힘이었다.
폭우와 같은 박수갈채가 환영했다. 풍족한 즐거움을 느끼며 축복 속에 두 사람은 버진로드 위를 걸었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하나가 된다. 한 몸으로 지금처럼 서로를 따라간다면, 함께한다면 마음은 일 배에서 두 배가 되어 더 강해지겠지. 하루가 쌓이고 무거워져서 단단해지고 행복하겠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뭐 오라지. 무서울 게 뭐 있겠어.
지훈의 친구들이 축가를 불렀다. 호랑이 장가간 날 선곡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훈이는 20년 지기 친구들 때문에 고개를 못 들었다. 마이크를 받고 노래를 불러 승철을 울리고 웃게 했다.
충족한 기쁨.
웃음이 끊이질 않는 이곳, 이 시간. 너와 나.
우리는 오늘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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