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쿱] 짝사랑, 질투
나 형 좋아해도 돼요? 물음표 아니고 느낌표에요. 나 형 좋아할 거예요 그렇게 봐도 이미 마음 정했고 이제 진심으로 내 마음 보여줄거예요. 축하해요. 짝사랑 한 번 받아보고 싶다 그랬잖아요. 그 절절한 짝사랑 받기만 하세요. 흔들리지 말고.
3년동안 승철은 이팀장을 짝사랑했다. 나이는 저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고 빠르게 승진한 능력남이었다, 이지훈은. 그에 비해 최승철은 취준생 기간이 길었고 회사엔 비정규직으로 채용됐다. 같이 입사해 일년마다 떨어져 나가는 동료들의 부재에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새로 작성하는 계약서에 감사해야 하는 불쌍한 사회인이었다. 그런 최승철이 능력있고 섹시한 이지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철한 카리스마에 승철의 심장은 삼년동안 콩닥거렸다. 보고서를 훑는 날카로운 눈동자, 키보드 위에 올려진 긴 손가락, 단추 위 두개를 풀고 소매를 접어 올리는 자유로운 스타일링을 하면서도 기깔나는 옷태. 엉망인 보고서엔 냉정하게 비판하는 입술이 기분 좋을 때 슬쩍 올라가는 모양이 하나도 멋있지 않은 게 없어서 승철은 절절하게 짝사랑을 했다. 아침일찍 출근해 이팀장님 책상 위를 정리하거나 걸레질을 깨끗이 했고 비오는 날엔 우산을 잊어먹었을까 하나 더챙겨 책상에 올려뒀다. 밤샘하는 경우가 많아서 카페인이 없는 피로회복제를 선물로 드리기도 했다. 자주 가는 카페가 승철의 단골이 되었고 우연히 들은 즐겨 듣는다는 곡은 승철이 이달에 가장 많이 들은 곡이 되었다. 승철의 모든 곳엔 지훈이 있었다. 짝사랑이 있었다. 시선이 지나가고 손가락이 닿은 곳곳에 지훈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그만 좋아해요 그래서 들켰다. 승철과 지훈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정도니까 들켰다기보단 알아차렸던거지. 너무 좋아서 비정규직 빨간 줄을 달고 이팀장님 뒤를 그리 졸졸 쫓아다녔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모르면 바보지. 최승철씨 솔직히 이러는 거 우스워요. 복도 끝 화장실 입구에서 벽에 들이밀어져 미간을 찌푸리며 이팀장은 모진 말을 뱉었다. 난 최승철 씨 같은 사람 안 좋아해요. 승철은 미어지는 심장을 속으로 달랬다. 괜찮아.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삼년 내내 이 팀장을 쫓아다니며 받은 차가운 시선과 무시와 주변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이런 거에 아무렇지 않잖아. 그런데도 슬픔을 누를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팠고 나같은 것에 또 아팠다. 나 같은 게...뭔데요? 잘 나오지 않는 목을 쥐어짜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팀장의 목이 살짝 기울어졌다. 벌어진 단추 사이로 보여지는 쇄골과 목선이 하얘서 그 순간에도 승철은 지훈에게 또 반했다.
쉬운 사람이요.
그리고 가장 매몰차게 차였다.
커피를 샀다. 맛으로 먹던 커피는 이젠 살기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점심을 먹고 회사 앞 테이크아웃점에서 커피를 받고 돌아선 승철은 저 멀리서 이쪽으로 오는 이 팀장에 반대로 몸을 돌렸다. 아직 점심시간은 기니까, 라는 핑계였다. 다른 부서에 서류를 전해주고 오는 길에 부서에서 나오는 이팀장을 보고 급하게 옆으로 피했다. 다행히 숨길 곳이 있어 몸은 피할 수 있었고 이 팀장은 승철 옆을 지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승철은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승철은 열심히 지훈을 피해다녔다.
불편해서 그랬다. 짝사랑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팀장이 불편해서, 분명 숨고 도망가는 승철을 봤음에도 말없이 묵묵이 승철의 뒤를 쫓는 묵묵한 눈동자가 어려웠다. 진중하고 깊은 그 눈동자에 승철 본인이 담겨져 있는 걸 제 눈으로 보고싶지 않았다 이러지 말아요. 나 좋아하지 말아요. 조용하게 따라오는 발걸음에 승철은 몸을 돌려 소리쳤다. 몇걸음 뒤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섰다.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좋아하지 말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래요 잠든 가게가 늘어선 복도엔 승철의 외침만 공허하게 울렸다 좋아해요 그 거리를 채운다. 최승철 씨를 좋아해요. 툭툭 내뱉는 말투에 진심을 담는다. 쉬운 사람은 싫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야! 떨치듯 고개를 흔들고 삿대질을 했다.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나보고, 젠장, 쉽다고 했다고. 눈물도 토독토독 터진다. 삼년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 알았으면서도. 너는 나를, 나를... 멈추지 않는다. 매몰차게 차여 짓밟혀진 진심을, 먼지도 털지 못한 채 상자에 가둬야했던 마음이 뒤늦게 터져 입 밖으로 쏟아진다. 추운 바람에 터지는 눈물이 얼어붙어 몸을 얼린다. 혼자만 뜨거운 심장을 찌른다. 그만 울어. 너만 아파. 너만 슬퍼. 너만 알아. 그는 몰라. 그만 울어.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지훈은 그리 말했다. 승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설 힘이 없었다. 왼손에 잡은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승철 앞으로 지훈이 다가온다. 차가운 바람에 노출된 귀가 빨갰다. 울어 눈도 코도 붉었다. 앞으로 쉬운 사람 할게요. 최승철에게 이지훈이 가장 쉬운 사람 할게요. 말이야 쉽지! 울던 승철이 얼굴을 들어 눈앞에 있는 지훈의 무릎을 밀었다. 제법 강한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친 지훈에게 몸을 돌려 가방을 줍고는 제 길을 간다. 으어엉 울면서. 그만 따라와!!! 성도 낸다. 집 가는 건데요. 지훈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인다. 너 이사가!!왜 내 옆집으로 이사왔어! 너 스토커야? 이 팀장에겐 못하는 반말도 아낌없이 했다. 막말 섞어서. 형이 좋아서요. 형을 이길만한 좋은 단어가 없을까? 심장에 너무 좋지 않다. 이 팀장은, 사랑에 집중하는 이지훈은 섹시해서 안된다. 아무나 보여주지 않는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따뜻하게 다가온다. 날 좋아할거였으면 일찍 좋아하지. 억울해서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진작 좋아했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았을텐데. 나 네 친구 만나. 알아요. 그 사람 좋아해. 네. 그 사람 너랑 다르게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고 키도 크고 돈도 더 많고 착한 사람이야. 맞아요. 그런 멋진 사람을 만나는데 왜 너를 만나겠어? 나 신경쓰지 마요. 내 친구하고 연애 계속해요. 전화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키스도 해도 돼요. 나는 짝사랑만 할게요. 형을 사랑하기만 할게요.
형 지훈이 좋아해요? 결국 헤어졌다. 들킨 건 아니고 알았다고 했다. 늘 다들 알더라. 내 얼굴에 다 보이나. 제 자신이 한심해서 울상이 되었다. 어깨를 구부리고 길만 보면서 되는대로 걷던 걸음은 반듯한 구두앞에서 멈췄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들켰어. 너때문에 헤어졌어. 너 때문이야. 이지훈 너때문이야. 주먹을 들어 어깨를 밀듯이 때렸다. 지훈몸이 맞는대로 흔들린다. 그게 제 마음 같아서 승철은 얼굴을 제 손으로 가렸다. 왜 나를 흔들어. 승철은 지훈을 삼년이나 짝사랑했다. 자꾸만 커지고 넘치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흘리고 다녔다. 잊으려 노력라거나 숨길 생각이 들지도 못하게 제 마음을 밖으로 끄집어내느냐 바빴다. 누군가 눈엔 멍청하고 답답힌 사랑이라고 욕하고 조금만 잘해주면 뭐든지 오케이 할 쉬운 사람이라는 낙인도 찍혔지만 승철은 제 사랑을 감당하기도 힘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랑을 끔찍한 말로 차버렸으면서, 남들은 다 뭐라 해도 너만 아니면 됐는데 너가 그래서 다 잊고 새로운 사랑, 나 좋다는 사람 만나 사랑하려 했는데 또 너는 나를 흔든다. 이지훈을 최승철이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 좋아해요. 익숙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최승철씨, 승철이 형, 승철아. 좋아해.
나를 빨갛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