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쿱] 선배 졸업하지 마요
*bgm과 같이 들어주세요.
[지훈승철/우쿱] 선배, 졸업하지 마요
w.안다미로
하늘이 어둡다. 아직 하늘이 깨지 않은 푸르고 시린 새벽 같다. 시야가 탁 트인 운전석에 앉아 질척하게 젖은 땅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따뜻한 차안과 대비되는 마른 나뭇가지와 칙칙한 시멘트 건물들이 쓸쓸했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의 두꺼운 옷차림이 아니라면 가을이라 말하여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앞으로 몸을 기울어 앞쪽 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겨울의 하얀 구름이 퐁퐁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추운 겨울에 내린 비가 손가락을 타고 들어와 심장을 적셨다. 겨울의 비는 가을만큼 쌀쌀했다.
겨울비. 모두가 잠들어 숨죽은 황량한 땅을 두들기는 조용한 빗방울. 비보단 눈이 잘 어울리는 추운 겨울에 비가 내리면 늘 선배가 생각났다. 까맣고 하얗고 빨갰던 얼굴. 매일 보던 얼굴이었음에도 그 때의 선배를 떠올리려 하면 불투명한 창밖을 보는 것처럼 불분명했다. 번진 물에 퍼지는 빛처럼 뭉개져 어그러졌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건 색. 삼킬 것 같았던 검정, 하얀 나비처럼 아른거리는 흰색, 점같이 똑 찍어진 빨강. 나의 삼년을 가져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처음의 선배를 만난 건 야자가 낯설던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야자라는 개념을 듣기만 했지 경험했던 건 처음이어서 모든 게 생소했던 시절이었다. 처음 맞이한 야자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책만 펼쳐놓고 생각에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바보같이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였다. 조용하던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코끝이 시린 삼월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나는 당황했었다. 아침마다 틀어놓은 티비에서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왔었는데 연필만 든 가방엔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정신없이 나오느냐 챙긴 걸 잊은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날따라 같이 야자를 하던 친구들도 모두 개인적인 일로 없었던 터라 더욱 난감해졌다. 결국 나는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왁자지껄한 학교 문 앞에서 색색의 우산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간혹 우산이 없는 학생들이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리며 비사이로 뛰어드는 걸 보았지만 그것뿐이었다. 땅을 두들겨 무참히 부서진 투명한 조각들이 바짓가랑이에 튀는 게 싫었다. 오래 서 있어서 운동화 안 발가락이 시렸음에도 차가운 비에 푹 젖고 싶지 않았다. 집에까지 거리가 꽤 있는 것도 한몫했다. 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되어 꺼진 탓에 부모님을 부르는 것도 녹록치 않고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서 있을 때 어깨에 마디가 굵은 손이 올려졌다. 그리고 비오는 거리를 가리며 까만 우산대가 앞에서 쫙 펼쳐졌다. 훅 끼쳐온 낯선 열기에 놀라 든 시선엔 선배가 있었다. 우산대를 들며 하얗게 웃던 선배가.
“가자.”
선배는 어깨에 올린 손을 고쳐 완전히 내 어깨에 두르며 힘을 주어 앞으로 걸었다. 얼떨결에 따라 한 발을 디디면 조용한 우산에 비들이 토독토독 떨어졌다. 두 남학생이 쓰기에 작은 우산 때문에 몸이 자꾸만 닿았다. 그래도 채 들어가지 않는 어깨 끝. 닿으면 눅눅하게 달라붙을 빗물이 싫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검은 패딩에 빗물이 도로록 굴러 떨어졌다. 서늘한 비에 자꾸 목에 소름이 돋았다. 선배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런 나를 끌어안았다. 선배에게서 옅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집 ○○아파트 맞지?”
“네?! 아, 네.”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산 끝에 매달린 빗물이 내 목소리에 놀라 번쩍 뛰었다.
“나는 그 옆 아파트에 살아. △△알지?”
빗방울이 귓바퀴에 떨어졌다. 선배는 말을 이었다.
“거기까지 같이 가자.”
나는 놀라 귀를 만졌다. 시린 비에 귀가 데인 듯 열이 났다.
날 어떻게 알까? 오늘 처음 만났는데 선배는 오랫동안 알던 동생처럼 대했다. 말투가 친근하고 다정했다. 젖잖아, 더 들어와. 자꾸만 어깨가 닿는 게 신경 쓰여 바깥으로 조금 나가면 선배는 어깨를 쥐어 잡고 안으로 당겼다. 선배 젖잖아요, 손. 어깨에 두르느냐 대신 비를 맞은 손을 잡았다. 선배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괜찮아, 안 추워.”
거짓말.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어느새 교복무리도 보이지 않는 가로등이 늘어진 골목에서 누군가 뛰쳐나와 왁 놀래 킬 것 같았다. 그러면 콩닥콩닥 뛰고 있는 내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와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굴 것 같았다. 그런 추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본래 손이 차가운데다 추운 겨울비에 노출되어 얼마 없는 나의 열기를 야금야금 빼앗는 선배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선배에게 눈을 마주치진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빠르게 말을 마치고 아직도 남은 길을 아까까지 맞기 싫었던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달렸다. 바로 눈에 비가 튀었다.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에서 선배의 목소리만이 하얗게 선명히 들려왔다.
“또 보자, 지훈아.”
나는 그 날 감기에 지독히 걸렸다.
히터를 켰다. 겨울비에 시동을 끈 자동차 안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공기도 조금 눅눅해서 옷이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본래 추위도 잘 타서 몸이 자꾸만 떨렸다. 긴 소매에 가려진 팔을 손으로 쓸며 히터를 조금 올렸다. 차 뒤에 있는 담요도 끌어와 어깨에 둘렀다. 어두컴컴한 하늘만큼 어두운 차 안으로 비 그림자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학년이 됐다. 일학년 때 들어간 동아리에서 반어거지로 회장이 되었다. 아직 선배들이나 동아리 친구들하고도 어색하고 숯기가 많아서 극구 거절했지만 너는 진중하고 확실해서 날뛸 줄만 아는 동아리 애들을 잘 이끌 거라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의 의견에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매일 동아리에 출석한 탓에 출석률 백프로를 자랑했었지만 막상 회장이 되려하니 아무것도 몰라서 전 동아리 회장에게 인수인계 겸 교육을 받기로 했다. 야자 대신 들어온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에서 나는 손을 괜히 교복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켜 문자함을 열어 몇 시에 보자는 전 회장 문자를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소리가 되어 내 귀에 들어오면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침이 자꾸 말랐다.
“늦어서 미안해~”
뛰어왔는지 흐트러진 머리로 선배가 들어왔다.
“괜찮아요.”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며 작게 대답했다.
선배는 내가 앉은 책상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음료수 캔 하나를 내밀었다.
“이온음료 괜찮지?”
분홍색 이프로였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음료수를 두 손에 쥐었다. 선배는 목이 말랐는지 바로 캔을 따 마셨다. 음료수와 함께 뒤로 기울어진 탓에 드러난 목덜미에 시선이 갔다. 돋은 인대와 핏줄이, 조금 큰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내 목울대도 울었다. 아래로 조금 시선을 내리면 위 단추를 푼 교복 셔츠 사이로 푹 들어간 우물이 보였다. 음료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좀 살 것 같다.”
한 번에 음료수를 비운 선배가 캔을 탁 내려놓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계속 빤히 쳐다본 걸 들켰을까봐 입술이 떨렸다. 선배가 조용한 게 불안했다.
“너 손톱이 분홍색이다.”
뜬금없는 소리에 다시 선배를 마주 봤다. 선배의 시선이 음료수를 잡은 내 손 끝에 가 있었다. 차가운 음료수에 하얗게 질린 손 위로 선배가 손가락을 뻗어 만졌다.
“너 여기는 찬데 여기 손톱만 뜨끈뜨끈해.”
하얀 손등에서 옆으로 선을 그으며 움직이는 손가락에 손끝에 피가 몰렸다.
“열이 나서 그래요.”
“손톱만?”
“네.”
선배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목을 울려 웃었다. 선배 특유의 즐거울 때 나는 웃음소리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손끝을 접었다. 손톱에 닿은 차가운 음료수가 얼른 내 열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이래서 네가 좋아.”
응?
“내가 동아리 회장으로 너 강력 추천한 거 모르지?”
아.
“네가 너무 귀여워서 내가 선생님께 너 시키라고 추천했어. 잘했지?”
나는 어느 장단에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좋아 라는 말에도 추천했다는 말에도 귀엽다는 싫은 소리에도 대답을 못하고 붉은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선배는 또 특유의 웃음소리로 내며 웃었다. 덕분에 그 날 나는 선배가 알려주던 그 어느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2학년 회장이 되었다.
비는 아까보다 옅어졌다. 하루 종일 내린다는 비도 조금 지쳤으리라. 의자에 앉아 창밖만 보자니 눈이 뻐근해 잠깐 감는다는 게 꾸벅 졸았던 모양이다. 4개의 숫자 중 앞에 숫자가 바뀌었다. 피곤으로 건조한 눈을 꾹꾹 누르며 히터를 껐다. 차안은 이제 따뜻하다 못해 더웠다. 차안에 갇힌 공기가 무거워 답답했다. 숨이 막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작은 틈새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까보다 편해진 호흡에 등받이에 몸을 맡기며 핸드폰을 들었다. 환하게 켜진 핸드폰은 그 흔한 카톡 하나 없이 조용했다. 다시 깜깜해진 화면 위로 용케 들어온 빗줄기 하나가 길게 사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학교 앞 색색이 펼쳐진 꽃무더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졸업시즌에 맞춰 나온 꽃들은 마음까지 건조하게 만드는 썰렁한 겨울을 조금이나마 밝은 원색으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패딩 속 구깃구깃 접은 삼 만원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나오기 전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받은 삼 만원이었지만 막상 사려하니 용기가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졸업식에 맨 손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준비한 게 있었는데도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욕심에 자꾸만 꽃에 시선이 갔다. 사서 주면 좋아할까. 싫어하진 않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 두 사람이 갑론을박을 펼친다. 나는 두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꽃을 파는 아주머니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싱숭생숭한 마음이 그 작은 시선에 놀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무엇이라고 꽃을 사. 산다 해도 뭐라고 하고 줄 건데. 뒤늦게 자기변명을 해보지만 꽃들이 뒤에서 자꾸만 미련 서린 내 발을 잡아 당겼다. 나는 억지로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갔다.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땐 마라톤을 한 것처럼 숨이 차 잠시 쉬어야만 했다.
“졸업 축하해요.”
삼학년 졸업식이 끝나고 따로 동아리에서 준비한 파티에 참석한 선배들에게 졸업선물을 드렸다. 동아리비랑 또 따로 모은 돈으로 구색만 맞춘 부끄러운 것들이었지만 받은 선배들은 모두 방싯 웃으며 고맙단 인사를 했다.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의 뿌듯한 얼굴에 내 마음도 활짝 펴졌다. 요 몇 주간 선물 준비로 고민하고 고생했던 것들을 보상 받는 느낌이었다.
“우리 동아리 잘 부탁해.”
부회장이던 정한 선배가 새로 뽑힌 (곧 이학년이 될) 일학년 회장과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일학년은 씩씩하게 답했고 나는 수줍어 웃기만 했다.
“지훈이 일 진짜 잘했으니까 힘든 일 있으면 바로 지훈에게 얘기하고. 알았지?”
옆에 있던 지수 선배의 한 마디에 일학년의 목소리가 더욱 씩씩하다. 나는 얼굴을 아래로 숨겼다. 부끄러움에 자꾸만 열이 올랐다.
전 회장이었던 선배는 그 옆에서 눈코입이 빨갛게 붓도록 울고 있었다. 추해, 그만 울어. 졸업하는 삼학년들 중에서 유일하게 우는 선배에게 정한 선배가 무어라 꾸중했다. 그럼에도 선배는 넌 안 슬프냐. 오히려 당당하게 다 젖은 휴지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화장실에서 세수 좀 하고 올게.”
이젠 좀 괜찮아졌는지 선배가 자리를 떴다. 나는 하도 닦아 쓸린 선배의 눈이 걱정돼 세면대에서 눈을 닦고 있는 선배의 등을 두들겼다. 세면대에서 고개를 든 선배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냉수만 흐르는 탓에 선배의 손과 눈이 아까보다 빨갛게 부어있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선배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수건을 선배 손에 쥐어주었다.
“닦아요.”
“어, 고마워.”
울어 맹맹해진 목소리로 받았다. 눈가와 흐른 물을 닦는 선배를 훔쳐봤다.
“지훈아.”
“네.”
도둑질을 들킨 것처럼 뜨끔 놀랐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졸업..축하해요.”
“그거 말고.”
“없는...데요.”
나는 화장실 타일을 발끝으로 찼다. 사실 있는데 말 못하겠어요. 나는 그 말을 소리로 내지 못하고 감색 교복 바지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겨울인데도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선배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선배의 생일 때 직접 줄 용기가 없어 새벽녘 학교에 일찍 도착해 선배 사물함에 몰래 넣어둔 생일선물이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난 듣고 싶은 말 있는데.”
“....뭔데요.”
“해줄 거야?”
울적한 심장 때문인지 선배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게 들렸다. 아직도 코 먹은 맹맹한 귀여운 목소리인데도 어딘가 서글펐다.
“네.”
선배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빨간 눈가가 다시 빨갛게 부어올랐다.
“선배.”
“..선배.”
따라 입을 움직였다. 선배의 통통한 애교살 위로 눈물이 한 웅큼 고여 있었다. 목이 메였다.
“졸업하지 마요.”
선배의 얼굴 위로 겨울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
벨소리가 울렸다.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조금 쌀쌀해진 차안에 창문을 올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된 전화를 들어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
“......”
전화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색색 거리는 숨소리가 차를 두들기는 빗 사이로 간간히 섞여 들렸다. 지훈은 하얗게 발광하는 자동차 시계를 봤다. 5시 45분. 이곳에 도착하고 7시간이 지났다.
“선배.”
조용한 저쪽대신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지훈은 마른 침을 긁어 삼켰다.
“할 말 없어요?”
삼일 야근으로 몸이 지쳐있었다. 얼굴을 손으로 쓸면 피부가 거칠었다. 이쪽만큼이나 힘들었을 저쪽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
“난 듣고 싶은 말 있는데... 해줄 거예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몸이 한결 편해졌다. 지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처럼 말해줘요.”
말을 마치고 입술을 닫았다. 빗소리만이 가득한 차 안에서 조금씩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진동에 마음이 미어졌다. 또 울지. 바보같이. 선배 잘못 하나도 없는데 왜 선배가 울어. 잘못한 건 나고 나쁜 건 난데 왜 나한테 못된 소리 못하고 혼자 삭히는지. 지훈의 마음도 무거워진다.
맨 처음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라며 일학년 교실을 돌던 선배에게 첫 눈에 반했다. 그태까지 사랑이라는 것에 동경을 품던 그저 그런 소년이었는데 쾌할하게 웃으며 동아리를 소개하던 선배가 너무 예뻐서 나는 한 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그전까지 조용히 고등학교를 보내려 했었다. 원래 낯을 가리는데다 동아리 같은 거 시끄러워서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런데 선배가 궁금해서,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동아리에 덜컥 들었다.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오던 친구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냐며 놀려댔지만 나는 교탁 가운데 서서 2학년 회장이라며 소개하던 선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덜컥 동아리에 가입한 용기만 있었고 가서 말 걸 용기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선배 주위만 뱅뱅 돌았다. 동아리는 여전히 재미없고 시끄러웠지만 어쩌다 한 개씩 선배의 대한 걸 듣게 되면 그 날 밤은 이불을 끌어안으며 설레는 맘에 밤을 새웠다. 선배가 피아노 치는 사람을 좋아한다 해서 잠시 접은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도 했다. 선배가 여자들에게 고백을 받으면 이불에 얼굴을 숨기며 울기도 했다. 아빠에게서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울었는데 나는 삼십 번도 더 울었다. 내가 여자가 아닌 것이 서글픈 것보다 선배는 나를 모를 거라는 게 더 서글펐다. 나는 존재감 없는 그냥 그런 후배고 선배는 인기 많은 인기남이었으니까.
그러다 비오는 날 선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이러다 심장마비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패딩을 입고 있어 교복에 박은 내 이름도 안 보였을 텐데 선배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 가슴이 너무 뛰어서 나는 심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빗속을 뛰어다녀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덕분에 비를 쫄딱 맞은 나는 감기에 걸렸지만 그 다음날 동아리에서 걱정서린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선배가 너무 좋아서 나는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기침으로 숨겼다.
그 이후로 가까워졌던 우리였지만 우리는 그저 동아리 내 친한 선후배 정도였다. 이학년 회장이 되어서 선배랑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었지만 우린 그정도뿐이었다. 나는 조금 우울했고 살짝 기뻤다가 절망하기도 하며 격렬한 사춘기를 보냈다. 선배만이 한결같아서 나는 희망도 품지 못했다. 헛된 희망을 품다가 완전히 선배에게서 떨어질까 봐, 선배의 인생에 나만 쑥 잘려 없는 사람이 될까 봐 나는 가면을 씌고 선배 주위를 뱅뱅 돌았다. 나의 삼년은 그렇게 선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에겐 선배뿐이다.
“결혼, 끕, 하지 마.”
울음 새로 터져 나온 선배의 진심에 내 심장도 울컥 피를 토한다.
“나 버리지 마, 나 두고 가지마. 나랑... 나랑...”
“나 형 집 앞이에요.”
차키를 뽑았다. 다시 세차지는 빗소리에 바깥을 노려보았다.
“선배 그 때처럼 나 잡아줘요.”
졸업하지 마요. 선배가 듣고 싶었다고 했던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던 나를 붙잡았던 선배였다. 그 때 잡았던 선배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것이 차가운 물 때문이 아닌 긴장으로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내 평생 용기를 다 긁어모아 선배의 흐르는 얼굴을 닦았다. 처음 같이 쓴 우산에 튄 빗물처럼 시린 눈물이 손에 묻었다. 선배는 눈을 감았다. 젖은 속눈썹 사이로 미처 숨지 못한 감정이 내 손으로 우스스 떨어졌다. 나는 선배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댔다. 스치듯 짧은 키스였지만 땅 끝이 푹 꺼지는 그러다 하늘 위로 붕 뜨는 아찔한 감각이 몸을 관통해 나를 뒤 흔들었다.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격렬한 감정에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평생 말하지 못할 거란 감정을 입에 담아,
“좋아해요, 선배.”
고백했다.
선배.
나는 지금도 바보 같은 겁쟁이라 선배가 잡아 주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요. 선배가 우리 부모님을 만나고 나도 모르는 결혼 소식을 듣고 얼마나 상처 받고 울고 있을 건지 알면서도 선배 집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어요. 혹시나 선배가 마음을 접고 헤어지자고 할까 봐, 선배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나를 버릴까 봐 두려워서 차 밖에 나가지 못하고 비에 젖어가고 있었어요. 졸업하고 벌써 8년이란 시간을 보낸 어른이 되었는데도 나는 18살의 어린애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했어요.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선배는 내가 조용하고 진중해서 멋있고 어른 같다 했지만(그 점이 좋아 반했다했지만) 사실은 상처 받을까 몸을 숨기는 여린 고슴도치였을 뿐이에요. 나는 약하고 여린 꼬맹이었어요.
그런 나를 그럭저럭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준 건 다 선배에요. 선배가 나를 멋있게 만들었고 나를 남자로 만들어줬어요. 나를 자라게 만들었고 어른이 되게 했어요. 난 선배가 없으면 안돼요. 선배가 없으면 난 하루도 살수 없어요. 어린애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죽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나를 잡아줘요. 난 선배만 있으면 돼요. 지금까지의 삶을 저버리고 부모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다 해도 난 선배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수 있어.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시킬 자신도 있어요. 그러니 나를 잡아줘요. 선배. 나를 버리지 말아요.
핸드폰 너머가 잠시 조용해진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주먹을 쥐었다.
“지훈아. 내 옆으로 와줘. 와서 날 안고 사랑해 줘.”
차문을 열었다. 세찬 비가 얼굴과 머리에 쏟아졌다. 아까까지 맞기 싫은 눅눅한 비였지만 이제는 기쁘게 맞는다. 어깨가 젖고 달리는 발에 수면이 튀어 바지가랑 끝이 축축하게 발목에 달라붙지만 괜찮다. 선배가 불렀으니까.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계단으로 뛰어올라간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비에 젖어 무겁게 폐부에 달라붙는다. 그리하여 검게 물든 폐가 씻겨 지고 굳은 피가 맑아져 힘차게 흐른다. 헉헉 뱉는 입김에 모든 걱정과 고민까지 부서져 떨어져 나간다. 익숙한 문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벨을 누른다. 비밀번호는 알지만 선배가 열어주기를 바랬다. 직접 문을 열어 나를 맞이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문이 열리면 세상 가장 뜨겁게 당신을 안을 테니.
그리고
덜컥.
드디어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