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쿱] 무제
[지훈승철/우쿱] 무제
w.안다미로
익숙한 이름이 기구 정리하던 승철 귀에 들어왔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씨는 대한민국 중에서 가장 흔한 성이고 지훈 이라는 이름도 드문 이름이 아니니까 흔한 거끼리 붙어서 내가 아는 이지훈과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겠지 했다. 최승철이란 이름도 작은 의원에 4명이나 있으니까. 그래서 젖은 손을 대충 털고 아무 생각 없이 기본기구와 차트를 챙기고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기함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요란스럽게 구니까 환자고 직원들이고 다 저를 쳐다본다. 남들 눈에 신경 쓰는 편이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아는 이지훈이 체어에 왜 앉아있는지가 중요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폰에서 고개를 든 지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한 뒤통수는 피곤에 젖은 익숙한 얼굴로 저를 반겼다. 언제 또 염색을 했는지 지난번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차분한 갈색머리로 상의는 오늘 아침 제가 입고 온 맨투맨 회색판 차림이었이다. 기깔난다. 이 와중에 멋있어서 조금 심통이 났다.
그러다 나는 그제야 우리가 얼굴을 본 지 일주일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반가운 얼굴로 받침 b5종이를 깔고 기구를 셋팅했다. 지훈의 눈이 글러브를 올리고 컵을 꺼내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붙었다. 치과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옥에 끌려온 불쌍한 영혼처럼 치위생사 손짓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두고 공포에 떠는 어린애랑 같아 무서워? 에이프런을 해주며 물었다. 좀 긴장되네요. 지훈은 부정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지훈은 치과를 아주 어렸을 때 말고 가본 적 없다고 얘기를 했던 게 떠올렸다. 걱정이 되어 차트를 들어 올려 읽었다. 인적사항만 적힌 깨끗한 초진 환자 차트지에는 검진이라는 CC(주소)가 적혀 있었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잠시 고민을 했다. 그 사이 털레털레 슬리퍼를 끌며 원장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승철은 아프지도 않은 아랫배를 움켜쥐며 화장실로 가는 척 달렸다. 뒤에 따라붙은 시선을 무시하고 정한에게 어시스트를 부탁했다.
“부탁해.”
“네 애인이잖아.”
“그래도.”
어휴. 눈으로 한숨 쉰 정한에게 민망히 웃었다.
“뭐해요?”
이제 일 년차 접어가는 아람이 손 닦으러 들어왔다 치위생사실 구석에 쭈굴하게 앉은 승철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소독실과 휴게실이 구분 없이 같이 있어 기구를 정리하거나 새로 판을 가져가러 들어온 직원들에게 덩치 큰 승철은 안보일래야 안보일수 없어 몇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그냐앙..”
승철도 똑같이 몇 번째 같은 표정(민망한 미소)을 지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아람이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냥 모른 척 하고 나가줘. 마음속으로 빌었다. 설명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 사이 정한이 들어왔다.
“아람씨. 이지훈 환자분 스케일링 해주세요.”
“네.”
손만 빠르게 닦아 후다닥 나간다. 정한은 아람을 눈으로 마중하고 입술을 대각선으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 웃겨.”
“알아.”
“애인 입안 보기가 그리 무섭냐?”
감색 작업바지 양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다가와 묻는다. 승철은 구석에 숨느냐 주저앉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며 우물쭈물 답했다.
“별로면 어떡해. 입 딱 열었는데 최악이면 진짜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까맣고 노랗게 썩고 치석이 치아에 성벽처럼 둘러 쌓여있는 걸 상상한 것만으로도 얼굴이 험악해진다.
“약한 척은.”
정한은 고개를 저었다.
“너 그래서 연애는 어떻게 한 거야?”
정한이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이다. 가까이서 봤으면서 모르는 척이야. 어깨를 툭 밀었다. 가볍게 밀었는데 허리가 꺾이도록 옆으로 기운 정한이 힘을 주어 몸을 바로 세우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다 알진 않거든?
음.
지훈을 처음 본 건 학과 실습실이었다. 군대갔다오고 바로 복학한 2학년 학과에 실습과목이 있었다. 1학년 때 배운 이론으로 환자를 구해 구강검사를 하고 치석제거 실습을 할 예정이었다. 주 1회씩 2시간 동안 하는 고된 실습. 모두가 다 피하고 싶다는 실습은 군대 갔다 오고 다 까먹은 승철에게 곤욕이었다. 반년 일찍 가 일찍 돌아온 정한의 도움이 없었다면 F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도 몰라서 어느정도냐면 mirror라는 이름도 까먹어서 정한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 급하게 집에 전화를 해 두고 온 일학년 교과를 퀵으로 받아 다시 공부했다. 기구 이름을 다시 외우고 잡는 법을 연습해 군대 갔다 와서 깨끗하게 펴진 뇌의 주름이 쪼글쪼글 찌려져 머리에 쥐가 났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더 큰 산이 있었다. 환자구하기. 치위생사 학생이 아닌 타학과 학생, 외부인이어야 했다. 당연히 구하기 어려웠다. 치과에 대한 공포로 치석제거 실습뿐인데도 늘 환자가 부족했다. 일주일 내내 실습 전까지 환자구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말 다했지. 학교 주변을 걸으면 환자를 구하는 동기들을 심심치 않게 만났었다. 동질감 서린 불쌍한 얼굴로 손 인사를 나누고 다시 환자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는 제가 불쌍해서 우울증도 좀 왔다.
어쨌든. 그날 실습은 수확이 좋은 2학년 대표가 어디서 단체 환자를 구해 환자가 없는 동기들에게 한명씩 붙였다. 실습 직전까지 환자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던 승철은 기적처럼 환자를 받고 실습실에 들어갔다. 나이가 있으신 어르신께 인사를 하고 체어에 눕혀 구강 검사지를 작성했다. 까맣게, 빨갛게 구강을 살피며 검사지를 작성하고 probe를 통해 치주포켓을 확인한 뒤 형형 색색한 차트를 교수님한테 체크 받았다. 한번에 ok를 받는 수확을 걷고 치석제거도 빠르고 완벽하게 해냈다. 몇 번째 봐도 보이지 않는 포켓 속 치석을 추정하며 손에 쥐가 나도록 한 결과도 역시 ok였다.
기분 좋게 일찍 끝나고 환자를 마중 보낸 뒤 소독담당조여서 정리를 했다. 한명씩 끝날 때마다 빈 체어 청소를 체크하고 체어 사이사이를 통과하며 바닥에 쓰레기가 없는지 훑다 봤다. 정한의 환자를. 누워 있느냐 엉망인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뽀얀 얼굴이 먼저였다. 다음은 볼우물이 패이도록 웃는 미소. 딱!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완전 내 스타일. 뻥 안치고 한눈에 반했다. 마스크를 쓴 정한의 몇 마디에 눈을 접으며 웃는 얼굴이 예뻤다. 접힌 눈이 가늘게 길어져 귀여운 사막여우를 연상케 했다. 아 진짜 귀여워. 승철은 물을 가득 담은 대야를 끌어안고 몸을 꼬았다. 심장이 두근거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얼굴에 홧홧 열기가 뻗쳤다. 마스크를 껴서 눈만 보여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동기들에게 빨간 얼굴을 들켰을거야. 연애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여초과에서 조금이라도 사랑에 빠진 걸 들켰다간 졸업 때까지 피곤했다. 국시를 보고 있는 남선배의 조언이었다.
정리를 끝마치고 늦게 끝난 승철은 급식소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정한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손에서 고무냄새 나. 코를 막은 정한에게 너도 난다고 핀잔을 주며 오늘 저녁이 뭐냐 물었다.
“미역국이랑 김치. 어묵볶음. 쌀밥. 나물”
“죄다 맛없는 거잖아.”
형편없는 저녁메뉴를 험담하면서도 머리 한쪽은 딴 생각에 잠겼다. 오늘 데리고 온 환자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으려면 타이밍을 재야했다. 눈치가 빠른 정한이라 더욱 티 안내게 조심해야했다. 3년 전 기숙사에서 같은 과 일학년으로 처음 보고 어색했던 룸메 정한이랑 친해진 계기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게동을 혼자 보다 들켜서 더더욱 그랬다.
역시나 예상대로 맛없는 저녁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음식 맛에 양보가 없는 정한도 불만 없이 먹었다. 맛없으면 미련 없이 버리는 애라 수상쩍었다.
“너 술 먹으러 가?”
“응.”
“어쩐지 맛없는 밥 먹는다했어.”
“빈속에 술 마시면 배 아파.”
“그래서 누구랑 마시는데?”
그나마 맛이 있는 미역국을 뜬 정한이 지훈이라 말했다.
“지훈이?”
“아 나 오늘 환자로 온 사람. 환자 해 줬으니 술 사줘야지.”
환자가 없다보니 치위생과는 환자에게 극진히 대접했다. 술을 사거나 밥을 사주거나. 득보다 실이 큰 실습은 빨리 사라지면 좋겠다.
“어떻게 안거야?”
“나 머리 잘라 준 게 걔야.”
승철이 다니는 대학교에는 미용학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2학년이 되면 사람을 구해 머리를 자르고 염색 파마를 해야 하는 실습이 있었다. 우리와 다른 건 돈을 받는 실습임에도 인기가 많다는 것. 예약하면 기본 3주를 기다릴 정도였다. 난 당장 다음 주 환자를 어디서 구하지? 젠장. 딴 생각 하자. 예를 들면 정한 환자였던 지훈이. 밥을 휘젓던 승철이 숙인 고개에서 눈만 위로 치켜뜨며 정한의 안색을 살폈다. 미간을 잔뜩 구겨 내 川자를 만들면서도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씹는 정한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떻게 말하지. 머뭇머뭇 말을 하려다 삼키고 주저하다 정한이 숟가락을 내려놓는 순간 입을 열었다.
“나도 술 마시러 가도 돼?”
떡처럼 뭉쳐있던 질은 밥알이 태풍에 흐트러진 낙엽처럼 흐트러졌고 나는 아무 꿍꿍이가 없다, 라는 연기를 하고 있는 승철의 얼굴을 정한이 번갈아봤다. 반듯하니 잘생긴 얼굴이 개구지게 변한다.
“안 된다 해도 올 거잖아, 너.”
정한의 눈치는 상상이상으로 빨랐다.
“안녕하세요. 이지훈이고 21살입니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실습실에서 봤을 때보다 더 취향이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어울리기 힘든데 깨끗한 흰 얼굴과 보라색 머리는 아주 잘 어울렸다. 길게 갈라진 입술 끝에 푹 파인 보조개가 매력 포인트였다. 승철은 정한이 팔꿈치로 찌르며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넋을 놓을 뻔 했다.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활짝 웃었다. 나는 23살, 얘랑 같은 과인 최승철이야. 반가워. 원래 안 그러는데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지훈은 갑자기 내밀어진 손에 좀 놀라다 악수를 해줬다. 덩치에 비해 큰 손이 맞닿았다. 뼈마디가 단단한 손도 내 타입이었다. 설레어서 귀가 뜨거웠다. 옆에서 소주병을 까던 정한이 피식피식 비웃었다. 웃지 마. 정한이를 노려봤다.
술자리는 즐거웠다. 소맥파인 정한과 달리 소주파였던 지훈과 승철은 술을 나눠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학과이야기, 친구이야기, 앞으로 할 학교 축제 이야기 등 남자 셋인데도 별거 가지고 재밌게 떠들었다. 대체로 정한과 승철이 떠들었다. 지훈은 말이 없는 편인지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의견을 얹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작은 농담에도 온몸으로 웃으며 반응했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뭐하나 싫은 게 없었다.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지훈이 더욱 좋았다.
그래서 노래방도 갔다. 그대로 헤어지기 싫다는 핑계였다. 술로 친해졌어도 처음 만난 사이에 노래방을 2차로 가는 건 민망했는지 주저하는 지훈의 손목을 잡고 들어가 소파에 앉힌 뒤 두꺼운 노래방책을 안겨주었다. 그사이 정한은 노래방 가면 부르는 18번곡 5개 숫자를 입력했다. 경쾌하고 촌스러운 멜로디가 시작되고 형형색색 불빛이 회전한다.
텔미다. 승철은 정한과 눈빛을 교환하며 무대 앞으로 나갔다. 처음엔 선미였다가 예은이 됐다가 나중엔 소희로 빙의돼 어머나를 외쳤다. 깜찍하게 윙크를 정한과 주고받았다. 하이라이트로 가면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경악하는 지훈의 팔을 잡아끌어 무대 앞으로 끌었다. 지훈은 술로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쓸고 머뭇머뭇 거절했지만 정한과 승철은 철옹성같이 버텼다. 할 때까지 못 비켜줘. 아니 오히려 더 날뛰었던 것 같다. 결국 지훈은 조금씩 몸을 흔들었다. 승철과 정한은 깜짝 놀랐다. 지훈이 춤을 잘 춘 탓이었다. 대충대충 부끄러워하면서도 리듬을 타는 것뿐인데 느낌이 있었다. 너 춤 배웠어? 정한의 물음에 지훈은 잠깐요,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노래하는 걸 잊고 한 팔로 크게 좌우를 흔들며 이지훈!!이지훈!! 호응했다. 정한도 같이 흥분해서 노래 내내 워! 워! 남자의 긁은 목소리로 응원을 했다. 노래가 끝나고 창피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지훈의 등을 마구 두들겼다.
“야, 너 잘 춘다. 멋있어. 짱이야. 완전 최고.”
엄지 척 내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빨간 얼굴로 혀를 빼꼼 내밀며 고개 드는 지훈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런데 지훈아.
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네?
그리고 노래방에서 2시간을 새하얗게 불태웠다. 우리의 응원덕분인지 아니면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온 건지 그것도 아니면 꾸밈없이 풀어 노는 우리의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지훈이 긴장을 풀며 노는 데 참여했다. 인기 아이돌곡 메들리를 완벽히 소화했다. 하이라이트 춤에선 셋이서 백댄서처럼 칼같이 췄다. 마이크를 넘겨주면 노래도 잘 불렀다. 좀 고음이라 생각했던 목소리로 시원하게 고음을 지르기도 하고 R&B도, 발라드도 제 곡마냥 노래했다. 노래 좀 하는 편인 정한과 랩을 좋아하는 승철은 계속 놀라기만 했다.
“야 너는 못하는 게 뭐냐.”
멍한 승철의 질문에 지훈은 뒷머리를 만지며 웃기만 했다.
술이 완벽히 깨도록 놀던 노래방에서 나오고 기숙사로 돌아갈 때 자취였던 지훈과 중간에서 헤어졌다. 술이 모자른 정한이 슈퍼에서 술을 사는 김에 같이 사서 쥐어진 칫솔세트를 손에 들고 배꼽인사를 한 뒤 사라지는 뒷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번호 안 따?”
그런 제 옆에서 정한이 검은 봉지를 흔들며 물었다. 찰랑 부딪히는 유리 소리에 술병이 깨질까 조심해. 한마디를 아끼지 않았다.
“번호는 알아.”
어둠에 완벽히 녹아들어 사라진 지훈에게서 시선을 떼고 힘을 주어 앞으로 걸었다. 아까 노래방 나오면서 물어봤어. 그 옆으로 슬리퍼를 끌며 정한이 따라붙었다.
“그럼 연락해보지 그래.”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해.”
“친구로 시작하면 되잖아.”
“못해. 너무 좋아서 못 숨길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쟤 게이 아니잖아.”
정한이 풉 웃었다. 왜 웃어. 허리를 접고 하하하 웃는 정한을 눈동자만 굴려 옆으로 노려보며 따졌다. 정한은 비웃음을 지으며 승철을 봤다.
“야 난 게이하고만 술 마시는 거 몰라?”
생각해보니 게동 들킨 날 난 저 배우 별로던데 했던 정한이었다.
그 다음은 뭐.
[나 승철이야. 잘 들어갔어?]
아무 말 쉽게 하는 편인데 첫 문자가 뭐가 어렵다고 몇 번이나 고치며 겨우 문자를 했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몇 번 고치다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 발신된 것이다. 문자가 가고 답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불을 발로 찼다. 먼지 날려. 옆 침대에 누운 정한이 핀잔을 주었다. 승철은 끌어안는 필로우를 꽉 안으며 귀를 기울였다.
씹혔나,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울에 빠져있을 때쯤 띵동 문자알림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처음 연애한 티 내지마라. 등을 보이고 누우며 던지는 정한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떨며 핸드폰을 켰다.
[네 잘 들어갔어요.]
별거 없는 답장인데도 좋아서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광광 울었다 .정한이 짜증을 내며 베개를 승철에게로 던졌다.
그 이후로 엄청 들이댔다. 눈 뜬 아침부터 잘 잤니? 아침인사를 했고 날씨가 좋다. 수업 잘 듣고. 오늘 학식 맛있대. 시시콜콜한 걸로 문자를 했다. 답장은 빠른 편이 아니었던 지훈이었지만 답은 성실히 왔다. 형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수업 잘 듣고 있어요. 더위 조심하세요. 그 때마다 정한의 팔뚝에 매달려 신음을 삼켰다. 아주 좋아죽네, 죽어. 표정 변화 없이 정한은 그런 소릴 했다. 그럼 좋아 죽지. 승철은 부정을 하지 않았다.
과가 달라 수업시간도 안 맞았지만 승철은 점심먹자는 약속을 자주했다. 그래봤자 1주에 한 번 만나 밥을 먹을까 말까였지만 학식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서 밥을 먹고 있자면 가슴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미용학과라 그런지 자주 머리색이 바뀐 지훈은 옷도 잘 입어서 마주칠 때마다 씹덕사로 심장정지를 일으키기도 했다. 너 오늘 귀, 아니 멋있다. 칭찬을 하면 말갛게 웃으며 감사해요. 인사를 했다. 승철은 심장이 아파서 눈물을 좀 흘렸다.
그렇게 매일 문자하고 볼 때마다 좋은 티를 냈더니 지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걸 모르면 바보지. 정한은 그리 말했고 지훈은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좀 곤란한 얼굴로 전 형 봐도 아무 마음 안 들어요. 그런 말을 했다. 그 때 승철의 심장은 몸에서 잘려 흙바닥에 뒹굴었다. 핏기가 가셔 떨리는 손을 소매로 가리며 일단 만나주면 안 돼? 좀 매달렸다. 아직 우리 5번도 채 안 만났는데 너무 일찍 결론내리지 말고 더 만나줘. 아직 너 나 잘 모르잖아. 지훈은 말이 없었다. 좀 미안한 눈치였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정한이 말대로 연애가 처음이라 숨김없이 좋아하는 티를 내서 부담을 줬나봐. 좀 더 천천히 다가갈걸. 후회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승철은 그날 침대 이불 속에서 눈이 부르트도록 울었다.
그러고 지훈과 연이 끊길 거라 생각했다. 그쪽이 마음이 없으니 이쪽에서 아무리 외쳐도 답장이 안 오면 산위에서 메아리 오지 않는 외침과 같은 거니까. 그런데 만남은 이어졌다. 다음다음날 밥 먹자는, 처음으로 지훈이 문자를 먼저 보냈다. 늦게 잠들어 졸린 눈이 개구리 눈알처럼 커지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신자 이름에 허벅지를 꼬집었다. 허벅지는 아팠다. 문자도 진짜였다. 연강인 날이었지만 풀 셋팅을 하고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30분밖에 되지 않는 점심시간에 지훈을 만났다. 꿀벌처럼 검은 줄이 난 노란색 티를 입은 지훈이 볼을 긁으며 민망히 웃었다.
“제가 너무 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 같아요.”
밥 대신 산 샌드위치와 아이스 에이드에 시선을 두면서 지훈이 말을 이었다.
“룸메가 호박이 넝쿨째로 굴려왔는데 왜 복을 차냐고, 모쏠인거 더 티내냐고 혼내더라고요.”
내가 호박인거야? 말의 의도보다 호박이라는 소리에 좀 욱했다. 티는 안냈다.
“아직 잘 모르게지만 계속 만나 봐요, 우리.”
마지막 우리에서 승철의 꽁한 마음은 다 풀리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자신의 마음은 한번 차여 상처받았던 것 같은데 만나자는 소리에 다 잊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좋아서 싫은데, 튕기는 거 생각도 못하고 좋아서 실실 웃기만 했다. 바보같이 맹한 웃음에 지훈은 이번에 승철의 눈을 쳐다봐주며 웃었다.
만남은 계속되었다.
주고받는 문자가 쌓이고 밥 먹는 횟수가 늘어났다. 저녁 먹고 정한과 하던 코스였던 저녁 후 산책은 지훈과 둘이 하게 되었다. 애인 생기더니 친구를 버려? 정한이 쓸쓸한 얼굴로 자기 자신을 팔로 끌어안으며 흑흑 울었다. 우는 척했다. 너 일학년 때 연애한다고 툭하면 나 혼자 뒀잖아. 내가 언제? 정한은 뻔뻔했다. 나는 너처럼 애인 만난다고 친구 혼자 둔 적 없어. 기억력은 매우 나빴다.
그런 정한의 가벼운 질투에도 만남은 계속되어 둘의 관계도 깊어졌다. 나란히 서서 걷던 두 사람 사이에 간지러운 애정을 담은 두 손이 얽혀 맞물렸고 밤늦게까지 헤어지기 아쉬워 이곳저곳 자리를 옮기며 애정을 쌓았다. 별 거 없는 대화에도 시시한 농담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훈의 무심했던 두 눈동자가 어느 순간 깊은 감정을 띄우며 승철을 볼 때마다 발가락을 움켰다. 일방통행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쌍방통행이 되면서 행복은 자꾸만 승철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땐 그런 거 없었나봐. 결벽증.”
“널 믿었으니까.”
“뭐?”
“그 때 너가 지훈이 치석제거 해줬잖아.”
“...”
“지훈이 원래 깔끔한데다 네가 이도 깨끗이 해줬으니 잘 만났지.”
정한의 한숨이 깊어졌다.
만남 후 룸메가 있어 초대 받지 못한 지훈의 자취방에서 첫 키스를 했다. 티비를 보다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다가오는 얼굴에 눈을 감았다. 서로 첫 연애고 첫 키스라 침 범벅인 서툰 첫 키스였지만 허리를, 어깨를 어루만지고 다정한 눈동자가 색을 띄우며 입술을 맞대면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해 깊이 들어올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 승철은 지훈의 어깨를 꽉 쥐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은 무서웠다. 23살 최승철과 21살 이지훈은 처음 맛본 스킨십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매일 키스를 했다. 술 마시고 가는 길에 풀숲에 숨어 모기에게 피를 내주며 키스를 했고 룸메를 아예 내쫓은 불 꺼진 자취방에서도 했다. 만나기면 했다. 키스를 하니까 욕심이 나서 몸이 닿았다. 지훈이 깜짝 놀라 이불 속으로 숨었다.
“왜 그래.”
얼굴을 숨기고 몸을 둥글게 말아 동그라미가 된 지훈의 등을 두들겼다. 지훈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눈만 빼꼼 내놓고 붉은 얼굴로 섰어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짜증이 섰던 승철의 얼굴도 확 붉어졌다. 뭐야. 그게에- 민망해서 지훈의 등을 몇 번 주먹으로 두들기다 지훈의 이불 사이로 얼굴을 넣어 지훈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더운 여름 밤 얇은 여름 이불은 주고받은 열기로 끈적끈적했다.
“다 끝났어요.”
아람이가 들어왔다. 판 채로 종이에 싸서 가져온 기구들을 휴지와 소독할 것을 분리했다. 혹 피를 볼까 무서워 고개를 돌렸다.
“일찍 끝난 거 보면 치석 없었나보네.”
정한이 물었다. 좋은 질문은 아니었다. 승철은 입을 열려 대답하려는 아람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스톱! 이라고 외쳤다.
“하지 마!”
“네?”
“말하지 마. 알고 싶지 않아.”
의아해하는 아람의 얼굴에 정한이 킥킥 웃었다.
“그래도 궁금하잖아, 너.”
말은 맞다. 애인의 구강상태는 궁금하다. 썩은 데는 없는지 잇몸은 부은 곳 없이 괜찮은지 구강상태가 걱정이다. 특히 12시간 근무인 미용실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바쁜 지훈이니까 잇몸 건강상태가 제일로 걱정이다. 그런데 듣기는 싫다. 이 직업하면서 얼굴과 구강상태가 반비례인 사람을 하도 봐서 그렇다. 멀끔한 얼굴에 이가 다 썩고 부어서 건들기만 해도 피가 나는 잇몸을 볼 때면 그 사람과 키스할 연인이 불쌍해 눈물이 절로 났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상상은 감히 하지 않는다. 아람이 다가온다. 글러브를 벗고 파우더가 묻어 건조한 손으로 승철의 어깨를 두들긴다.
“걱정 말아요. 오빠 애인 이지훈씨 구강은 퍼펙트했으니까.”
안도감보단 부끄러움이, 그리고 놀람이 먼저였다. 너 어떻게 알아. 남자애인 있는 거 티낸 적 없기 때문에 물었다.
“그 때 그 미친놈 때문에 뒷문으로 몇 번 오빠 마중하러 오셨잖아요.”
이 년 전에 승철에게 들이대던 미친 놈 때문에 지훈이 한 달 동안 치과 뒷문에서 퇴근하는 승철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뭐, 승철이 스켈링 해줬을 때 내려다보던 두 눈이 너무 예뻐서 반했다나. 승철이 생각해도 제 눈은 예쁘니까 반한 건 이해하지만 싫다고 애인 있다고 네 입은 치석이 너무 많아 더러워 싫었다는 소리만 빼고 거절했다. 하지만 미친놈은 끈질겨서 떨어지지 않았고 매일 치과 대기실에 상주하며 승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자길 봐주지 않으니까 자길 갖고 논거라며 망상증 환자처럼 길길이 날뛰고 스토커 짓도 서슴지 않게 해서 지훈이 골머리를 꽤 앓기도 했다.
“그 때 너 여기 직원 아니었잖아?”
“저 여기 교정환자였거든요.”
“아 맞다.”
그제야 이해가 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람의 집이 치과 뒤 쪽이라 후문을 사용했다. 승철은 뜨거운 귀를 매만지며 비밀이야 당부를 했다. 아직 모르는 직원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람은 알겠다며 웃었다.
“이제 끝났어요?”
마무리를 하고 나온 대기실에서 지훈이 폰을 끄고 다가왔다. 뿅뿅 방금까지 요란했던 소리에 게임했어?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너 게임 그만둔다며, 문을 열며 말했다. 지훈은 말없이 웃었다. 1층 건물이라 계단 없이 바로 정문을 통과해 인도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서 십분 거리인 집으로 향하는 걸음 뒤로 발자국 소리가 따라온다.
“일주일만이예요.”
“그러게. 일손 부족하다고 미용실에 살다시피 해서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나 보다?”
“뭐. 보시다시피.”
지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깨에 맞추느냐 손등을 덮는 소매가 펄럭인다. 그 움직임에 시선을 뺏기면 지훈은 말없이 승철의 손을 잡는다. 손잡아달라고 본 건 아니지만 싫은 건 아니니 내빼지 않는다.
“왜 형이 안 보고 도망갔어요?”
입에 오르고 싶지 않은 화제를 입에 담는다.
“알잖아.”
승철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내밀었다.
첫 연애는 달콤하기만 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잡은 손바닥에 사랑한다고 외치는 얼굴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거구나, 왜 가수들이 사랑노래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왜 다들 연애를 하는지, 연애를 하면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는지 깊이 공감했다.
그런데 너무 뜨겁게 불탔던 것일까. 더웠던 날씨가 뼛속깊이 파고드는 한기에 자리를 빼앗기면서 승철의 마음도 빠르게 식어버렸다. 새벽까지 주고받는 문자에 피곤하다고 느껴본 적 없는데 11시만 되면 졸려서 문자의 답장을 하지 않는 게 늘었다. 이학기가 끝나고 방학 동안 지훈이 알바에 들어가면서 만남도 줄어들었는데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연애한다고 멀리한 친구와의 만남이 더 즐거웠다. 너 권태기야? 방학 때 만난 정한이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아니. 난 아직 지훈이 좋은데. 승철은 그렇게 답했다. 뜨거웠던 열기가 이제는 제 온도를 찾은 거지 식은 건 아니야.
그런데 그 마음이 지훈이 입대를 하니까 식은 게 맞았다. 분명 머리 깎고 짧아진 밤톨머리를 손으로 쓸 땐 좀 울적했었는데 훈련소에 들어가 만나지 못한데 슬프지 않았다. 아 지훈이가 내 옆에 없어도 슬프지 않구나. 내 곁에 당연히 있었던 연인을 만나지 못하고 소통이 부재되어 혼자가 되었는데도 외롭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힘들지 않을까, 적응은 잘할까 걱정은 잠깐이었다. 그런 제가 이해가 안가 정한에게 전화를 하며 다들 이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이상한거니? 물었다. 낯선 번호로 울리던 숫자들이 무얼 뜻하는지 알면서도 받지 않던 날 밤이었다.
“너 그러는 거 벌 받아.”
정한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좋다고 먼저 들이댔으면서 무책임하게 애를 버려. 아무리 그게 네 감정이라지만 너 못됐다. 가시 돋친 말에도 승철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냥 그랬다. 너무 처음부터 뜨겁게 타서 더 이상 태울 연료가 없어서 식은 것뿐이라고, 사랑은 다 그렇잖아.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어느 순간을 지나면 다른 연인들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면 그래, 정한이 말대로 먼저 들이대고 먼저 식은 내 잘못이겠지. 그런 무책임한 생각을 가졌다.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고 대학 3학년을 맞이했다. 국시 준비로 바쁜 일 년을 보냈다. 딴 사람을 만났다. 자동차과 3학년 동갑이었다. 지훈에게 연락이 한 번 더 왔다. 승철은 종료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지훈과 달리 몸집이 컸다. 마초적인 성격으로 승철을 제 입맛대로 조정하는 걸 좋아했다. 단호하긴 했지만 승철에겐 다정했던 지훈과 달라서 다른 설렘을 느꼈다.
기숙사 앞에 지훈이 나타났다. 모자를 쓰고 어색한 사복으로 발을 바닥에 구르며 서 있었다. 승철 옆엔 남자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승철은 지훈을 무시하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승철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 둘 다 술을 좋아해서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까지 마시다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와 본 적 있는 풀숲에서 남자가 승철을 밀어 입술을 비빌 때 안주로 먹은 순대 맛이 났다. 승철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뒤로 주춤하다 다시 승철의 팔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 씨발!! 더러워!!”
승철은 역한 술 냄새와 순대냄새에 욕을 하며 밀쳤다. 남자의 얼굴이 벌게졌고 주먹을 내질렀다. 맞는 성격이 아니어서 같이 때렸다.
“잘하는 짓이다.”
남자 둘이 싸우면 경찰서 간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 술 취해 가감 없이 힘을 사용하며 서로 때리고 맞아서 얼굴이 장난 아니었다. 나 얼굴이 생명인데 어떡해. 보호자로 온 정한이 울상을 짓는 승철에게 손바닥으로 등을 세게 때렸다. 찰싹. 셔츠 하나만 입어서 충격완화 없이 통증이 퍼졌고 매운 손바닥이 등에 빨갛게 그려졌다. 승철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너 씹..!! 말이 안 나와서 몸을 말며 고통을 삭히는 동안 일이 끝났다. 술 깨고 보니 서로 왜 싸웠는지 말하기가 부끄러워 합의로 끝난 것이다. 침을 탁 뱉으며 꺼지는 남자의 가래를 노려보며 빙 둘러 걸어가면 경찰서 앞에 지훈이 있었다. 사복이었던 그때와 달리 군복 차림이었다.
“나 먼저 간다.”
정한은 손만 저으며 사라졌다. 붙잡을 새 없이 빠르게 사라져 승철은 어색하게 지훈 앞에 섰다. 홀쭉히 마른 얼굴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지훈이 키가 낮으니 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올려보자니 그건 또 아니고 그래서 뻘쭘하게 눈을 마주쳤다. 지훈은 아무 말도 없이 아무 표정도 없이 승철을 봤다.
“안 아파요?”
지훈이 물었다. 승철은 아니 라고 말하려다 입술 옆 피딱지가 찢어져 눈을 찌푸렸다. 아릿한 피 맛이 입에 퍼졌다. 지훈의 손이 쑥 올라와 승철의 입술 옆을 매만졌다.
“냄새 난다고 피했다가 맞았다면서요.”
“..정한이가 그래?”
정한 그 요망한 입. 여기 오는 사이 지훈이 불러서 쪼잘쪼잘 다 일러바쳤냐. 속으로 자근자근 정한을 씹었다. 지훈은 맞아 부은 광대뼈와 얼얼한 턱을 조심히 훑었다. 아릿한 통증에 자꾸만 몸이 떨렸다. 지훈이 승철의 목뒤로 손을 감았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붙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보다 이지훈 냄새가 나는 지훈의 입술이 싫지 않았다는 게 충격이었다.
“나는 어때요?”
오랫동안 붙은 입술이 떨어지고 지훈이 물었다. 까만 눈동자에 비친 승철의 얼굴은 혼란에 젖어 눈을 깜박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지..않아.”
형은 예전부터 그랬어요. 본인은 몰랐던 것 같은데 결벽증 같은 거 좀 있었어요. 나랑 만날 때 툭하면 손 씻으러 들어가고 밥 먹고 나면 칫솔 2개 갖고 다니면서 나도 이 닦게 하고 어쩌다 뽀뽀하려하면 조금 인상을 찌푸렸어요. 우리 방에 들어올 때 방이 어지러우면 자꾸만 나가자 재촉하기도 했고요. 땀 흘리거나 씻지 않은 날엔 몸이 애타도 그 이상 못나가게 했어요. 그래서 나 형 만나면서 엄청 신경 썼어요. 안 씻는 타입은 아닌데 이도 더 신경 써서 닦고 샴푸는 향 좋은 걸로, 페브리즈로 옷이랑 신발이랑 가방에 맨날 뿌렸어요. 방청소도 매일 하고. 룸메가 놀리더라고요. 정리정돈 못하던 놈이 연애하더니 부지런해졌다고. 그것도 알아요? 형 만날 때마다 섹스할 거 대비해서 몸도 엄청 씻었던 거. 변태라뇨.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랬을 뿐인 걸요.
집 앞이다. 지훈은 승철이 대신 원룸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 가? 묻지 않는 건 지훈의 백 팩이 묵직하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지훈이 승철에게 물었다.
“그래서 키스 싫어요?”
“아니.”
답은 빨랐다.
“나 간식으로 떡볶이 먹고 왔는데.”
순대도 섞어서. 짓궂게 웃는다. 6년 전 일을 아직도 놀리고 있다. 그 때의 일은 백프로 승철이 잘못했으니 따지진 않지만 눈빛은 곱지 않다.
“그 애긴 안하기로 했잖아.”
“가끔씩 올라와서요. 한 번씩 얘기하지 않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더라고요.”
지훈은 기다렸다. 난 형보다 늦게 사랑이 시작 되서 더 늦게 사랑이 끝날지 모르니까 그 안에 다시 제 품에 돌아오기만 하라고, 그러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말없이 끌어안아주겠다고 했다. 나중에야 한 번씩 그 새끼랑 어디까지 갔냐고 밤마다 질투심과 소유욕에 괴롭힌 거 빼고 지훈은 승철을 변함없이 사랑해줬다. 정한은 운이 좋은 줄 알라 그랬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지훈이 성격에 이미 잘려나가고 없어졌을 너를 내치지 않고 기다려 줬다는 건 너 없인 본인이 살 수 없으니까 그런 거라고, 널 더 사랑해서기보다 네가 없는 삶을 살기 버거워서, 참아야할 정도로 사랑의 열기에 짓눌려 있어서 그런거라며 지훈이 불쌍하다며 승철의 이마를 때렸다. 때린 이마는 하필 일하다 라이트에 부딪혀 멍든 부위여서 더 아팠다. 눈물이 찡 맺힐 정도로 아팠지만 아프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스케일링 하면서 다 씻겨 내려갔어. 괜찮아.”
“그 말은 오늘 스켈링 안했으면 키스 안 했겠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야 그건.”
너니까 괜찮다는 말은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이 밀려 벽에 부딪히고 지훈의 입술에 먹혀 삼켜졌다. 지훈의 목을 감싸고 깊게 맞추는 입술에 쪽쪽 입술을 쪼며 혀를 섞었다. 얽힌 혀에선 딸기 맛 불소 맛이 났다.
“딸기 맛 나.”
잠시 떨어진 입술에 승철이 중얼거렸다. 지훈은 그거 맛 되게 없었어요. 덧붙였다. 그건 그래. 승철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입술은 다시 서로를 찾았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오랫동안 1층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