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쿱] 센티넬버스
[우쿱/지훈승철] 센티넬버스
w. 안다미로
센터에서 상대를 만나고 상담도 받고 매일 만나며 서로를 알아가던 때에 물은 적이 있었다.
폭주하면 어떻게 변해?
센티널에 대한 상식, 지식 같은 게 없었고 센터에서 준 책으로는 한계가 있어 궁금해 한 것이었다. 회색 후드티로 여름 에어컨의 찬바람을 막던 지훈이 컵 속에 꽂힌 파란 빨대를 휘저으며 철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지 의도를 찾는 눈빛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호기심 같은 거.
쉽게 대답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가만히 기다리던 승철은 민망해 말을 덧붙였다. 싫으면 말고. 지훈은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빨았다. 아메리카노 잘 마실 것 같이 생겨서 먹는 내용물은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릿한 달달한 생과일 주스다.
“소리가 들려요.”
“소리?”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 구름이 바람 따라 흘러가는 소리,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등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모든 것이 다 들려요. 그러다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죠.”
“몸살처럼?”
“네. 그리고 얼마 안가 눈이 빨개져요.”
“토끼 눈처럼 된다는 거야?”
“비슷해요. 정확하게는 눈 핏줄이 다 터져서 붉게 물드는 거예요.”
지훈의 무뚝뚝한 얼굴에 길고 늘어진 토끼 귀가 뿅 나타났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것이 도망가지 못하게 두 귀를 한 손으로 잡아 꼭 끌어안고 보드라운 털을 열심을 다해 쓸고 싶은 욕구가 물씬 올라왔다. 벌써 한 손은 상상하며 토끼를 쓰다듬듯 움직인다.
“거기서 더 심해지면 정신을 잃고 기절하죠. 체온은 점점 상승해서 피부가 빨갛게 익어요.”
그러다 얼마 안 가 죽어요.
실실 웃으며 혼자 상상에 갇히던 승철의 분홍안개가 펑 터지고 토끼 귀가 없어진 지훈의 얼굴이 잠겨있다.
늘 죽음이 함께하죠.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는 지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슬픔에 젖어 높아지지 않았고 분노에 차 낮아지지도 않았으며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읊듯이 차분했다. 처음만난 날 다른 사람보다 온도가 높았던 큰 손의 촉감이 생각났다. 힘을 주고 쥐다 떼면 빨갛게 자국이 남는 것처럼 잡고 난 후에도 남았던 열기.
승철은 자고 있는 지훈의 손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말아 쥔 손가락 사이사이 파고들어 깍지를 끼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달궈진 손바닥과 손바닥이 틈 없이 닿았다. 이 열기가 폭주의 후유증인지 본래 체온이 높은 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3년을 매일 만나고 손을 잡고 끌어 안았지만 지훈의 체온이 높았던가 떠올려 보려 해도 아는 게 없었다.
무관심했던 것 같다. 아니,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승철은 미안하다고 연신 울음을 쏟던 지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끓으며 흉터를 남기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본인도 폭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을 텐데 자신을 받아들여야 했던 승철에게 죄책감을 가지며 울던 지훈에게 괜찮다고 안심시켜줄 수도 없었다. 네 죄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깍지 끼던 손이 힘이 들어가더니 지훈의 손이 승철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안 돼.”
승철은 잡은 손 채로 끌어당겨 지훈을 품에 안았다. 승철의 맨 가슴에 이마를 박은 지훈의 발버둥이 심해졌다. 철은 다리를 들어 지훈의 다리 위로 올려 힘을 주었다. 밧줄처럼 옭아맨 힘에 지훈의 몸부림이 더 심해졌고 힘을 주던 승철의 허리에 순간 힘이 들어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읏..!”
튀어나온 신음에 지훈의 발버둥이 뚝 끊겼다. 승철이 아픔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난 지훈의 귀가 사과처럼 잘 익었다.
“지훈아. 형 허리가 너무 아파.”
“어, 네.”
훈이 당황하며 자유로운 다른 손을 길게 펴 철의 허리를 잡았다. 하지만 손바닥에 닿은 매끈한 살갗에 당황해 닿지 못하고 근처를 배회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해하다 각오를 다졌는지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가로로 길게 누운 손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마사지를 했다. 뭉근하게 풀리는 만족감에 눈이 감겼다. 승철은 지훈의 작은 머리통에 턱을 대고 깊은 숨을 뱉었다.
“좋다. 배웠나 봐. 잘해.”
“언젠가 쓸 거라 생각해서 배웠어요.”
“어디서?”
“스스로요.”
거기서 조금 놀랐다.
“잘했어. 덕분에 살았네.”
지훈의 뒤통수를 쓸었다. 동그란 머리가 손에 착 붙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쓰다듬어 주고 싶은 보드라운 감촉이다. 지훈이 고개를 들면서 못하게 됐지만....
불투명한 커튼에 반사되어 흩어진 햇빛들이 지훈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맑고 투명한 얼굴이 피곤에 젖어 지쳐있었다. 핏줄이 터져 흰자가 핏물에 젖은 것처럼 붉게 타올라있었다.
좀 멍하니 봤나 보다. 지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까맣고 붉은 눈동자에 맹하니 입술을 벌린 승철의 얼굴이 비췄다.
“미안하다 하지 마.”
갈라지는 지훈의 입술에 승철이 먼저 선수 쳤다. 승철은 입술을 굳게 다물다 다시 열었다.
“내가 해야 하는 거니까 한 거야.”
“안 할 수도 있는 거였죠.”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건조했다. 비명은 내가 질렀는데 왜 너가 잠겨있냐. 굳어있던 지훈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라 목까지 붉어졌다. 승철은 검지 손가락으로 지훈의 목에 있는 상처(이거 내가 아까 남긴거네. 미안. 형의 상처에 비하면... 지훈이 승철의 목에 난 생채기에 안타까움을 토했다.) 를 검지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가이드가 되면 뭐부터 배우는 줄 알아? 섹스야.”
센티넬이 폭주하면 손을 잡아주세요. 말을 걸어 여기 있다고 안심할 수 있게 알려주세요.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입을 맞추세요. 네 옆에 내가 있다고 알려주세요.
봄 냄새 나는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하던 여선생은 승철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헤매는 것을 따뜻하게 내려보았다. 귀여운 표정을 지닌 승철을 비추는 갈색의 두 눈동자가 수줍음 타는 소년에게 당신은 일은, 그러니까 가이드는 로맨티스트죠~ 라고 말했다. 아프고 상처 많은 센티넬에게 무한의 애정을 쏟는 거라고 그 말도 덧붙였다.
승철이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 주저하며 허리를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작은 속삭임에 같이 몸을 숙이던 선생은 가만히 듣더니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승철은 뜨겁게 탄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선생님 그만 웃어요. 누가 오면 어떡해. 옆방에 센티넬 교육을 받고 있을 지훈이 무슨 일이냐며 문 열고 고개를 내밀까 무서웠다. 어제 처음 만난 작달만한 소년에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승철이 한 번 더 그만 웃으라며 뾰루뚱해지자 선생은 눈꼬리에 매단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어 닦으며 철을 귀엽게 내려다보았다. 십 여년 동안 아기였다가 어느 순간 훅 커서 성에 눈을 뜬 막내를 보는 큰 누나 같은 얼굴이었다. 선생은 승철의 펼쳐진 책을 몇 장 넘겼다. 왼쪽 구석에 큰 글씨로 가이드란? 가이드의 특성 등이 빠르게 넘어가다 [가이딩 편]에서 멈췄다. 선생은 자신의 마이 안에서 볼펜을 꺼내고는 영어로 된 주소를 페이지 가운데 빈 공간에 적기 시작했다.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게 더 나을 때가 있지. 한 번 봐봐, 승철아.”
선생의 의중을 깨달은 승철의 얼굴 위로 하얀 연기가 퐁 터지더니 뜨거운 마그마가 철철 흘러넘쳤다.
“너가 상상하는 것보다 엄청나, 거기.”
웬만한 야동 사이트 뺨을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이성, 동성, 가이드편, 센티넬 편 상세하게 분리되어 있는데다 어디가 어떻게 닿아야 센티넬에게 더 효과적인지 자세며 전희의 순서까지 거리낌없이 노출됐다. 모자이크 없는, 재생 전 멈춘 화면에 적나라한 정사씬에 퍽 당황하며 승철은 몇 번이나 잠긴 문을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침도 괜히 삼키고 다리도 오므리며 한 개씩 켰는데 점점 볼 때마다 승철의 집중도는 높아졌다. 꼴려서 집중한 건 아니고 오히려 좀 아파서 자세히 봤었다.
그러니까, 하필 승철이가 본 게 실제 센티넬 가이드의 관계였다.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지만 폭주로 몸에 오는 부담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센티넬이 그 와중에 자신을 끌어안은 가이드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가이드의 팔에 매달라고 입술을 부딪혔던 장면이 연이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가이드의 팔이고 목이고 센티넬의 손톱에 긁혀 생채기가 생기고 피가 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맺힌 핏방울이 눌려 퍼져 쓰라렸을텐데, 힘으로 눌리며 자신도 고통에 괴로우면서도 가이드는 미안하다고 울면서 제발 살려달라는 센티넬을 계속 보듬어 주기만 했다.
그래서 그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지훈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씹어삼킬 듯 입술을 물어뜯어도 승철은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키도 덩치도 지훈이보다 컸지만 아래에 있는 건 저였다. 날뛰는 센티넬을 이길 수 없어서기보단 지훈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너의 모든 괴로움을 나에게 보여줘. 내가 다 안을게.
데일 것 같은 뜨거움에 닿는 곳마다 살이 비명을 지르고 발갛게 부어올라오는데도 닿아오는 몸을 밀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괜찮다며 두 다리와 두 팔로 지훈을 옭아매 가슴에 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거 아냐, 나는. 콘돔도 늘 챙겼다구.”
승철은 콘돔은 늘 핸드폰 케이스 안쪽에 넣었다. 언제할지 모르니까. 머릿속에서 상상하며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했다. 아파 정신을 잃은 센티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가이드인 승철이 스스로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콘돔은 못 썼네. 쓰려고 잘 뒀는데 막상 쓰려하니 쓸 여력이 없었다. 지훈이 미안하다며 작게 말했다. 지훈의 입술에 입술을 묻었다. 승철의 입술에 상처 난 곳이 스쳐 좀 쓰라렸다. 지훈이 승철의 입술에 까진 상처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승철은 그 눈동자가 부끄러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게 오늘은 아니었겠죠.”
승철은 말을 아꼈다.
“울었잖아요.”
심장이 따끔했다. 뾰족한 바늘기억이 과거의 기억을 톡톡 자꾸 되살려 승철의 양심을 찔렀다. 울었다하면 지훈이 폭주 직전까지 가 쓰러져 모두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 때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떨어져야 했던 2년 전 승철이 수학여행 갔던 날. 세상에서 제일 신나서 수학여행 갔던 승철에게 괜찮다고 안심하라던 지훈의 말을 믿고 떠났던 승철은, 곧 이틀 만에 옷을 땀으로 적시며 사경을 헤매던 지훈을 봐야 했다. 손을 잡고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쓸어도 쉽게 가라앉지 못했던 지훈이. 오히려 갑자기 삼킨 약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처럼 폭주는 더욱 심해졌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숨이 꺼져가는 지훈이 죽을 것 같아서, 승철은 건조한 지훈의 입술에 자신을 숨을 불어넣었다.
너와의 첫키스였다. 젖은 숨이 혀와 함께 지훈의 입술 너머로 넘어가 건조한 입안을 적셨다. 혀가 닿았을 뿐인데 지훈의 뜨거운 고통이 승철에게 넘어와 손끝까지 맥박이 쾅쾅 강하게 뛰었다. 저릿한 손을 내려 지훈의 셔츠 안으로 넣어 매끈한 배를 쓸었다. 그리고 부모가 배탈 난 어린 아이에게 약손하듯 손을 둥글렸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방에 들어온 그림자가 한 뼘 더 길어졌을 때 지훈의 몸은 진정되고 편안해졌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 침대 아래 바닥에 주저앉았던 승철은 엇박자로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고개를 숙였다. 숨을 뱉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승철의 바지가 얼룩졌다. 왜 그런지 손가락으로 얼룩진 부분을 짚다가 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그제야 그것이 제 눈물인 줄 알았다. 볼을 타고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딸꾹질처럼 깊은 속부터 올라오는 신음을 삼켰다. 자고 있는 지훈이 깰까 봐, 깨서 무슨 일이냐 물을까 봐.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꼭 감으며 참았는데. 너는 언제 본 거니.
승철이 지훈의 볼을 잡아당겼다. 찹쌀떡 같은 말랑한 볼이 죽 늘어져 얼굴이 뭉개졌다. 바른 가로로 고정된 입 꼬리 끝이 죽 올라가 눈도 눈동자도 사라져 진짜 찹쌀떡 같았다. 머에여. 발음이 새서 앞니 빠진 어린아이 같다. 승철은 웃으며 잡은 지훈의 볼을 찰흙처럼 조물거렸다.
“운 건 맞는데 후회해서 운 건 아니야. 무서웠던 건 있지. 그렇게 너가 아파하는 거 처음 봤잖아.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고. 너를 혼자 두고 가지 말 걸 하는 후회와 이러다 너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밀려왔지. 그런데 그 때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매일 하던 그 작은 스킨십만으로는 소용이 없었고. 그래서 무서웠지.”
지훈은 그럼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승철은 조금 답답해져 입술을 붙였다. 지훈의 입술 사이를 갈라 얌전한 혀를 얽혔다. 승철의 허리를 잡은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나누고 콧김도 좀 주고받고, 코가 눌리고 턱이 얼얼해질 때까지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알 것 같아?”
입술을 뗀 승철이 물었다.
“형이 키스를 잘한다는 걸요?”
지훈은 눈을 순진하게 깜박거렸다.
“야 임마. 내 센티넬이면 네 가이드 감정 같은 거 딱 알아야지.”
“형은 내 감정 알아요?”
“어. 맨날 느끼는데.”
그러니까 제대로 느껴봐. 다시 다가온 입술을 지훈이 먼저 삼켰다. 돌다리를 두들기는 겁이 많은 사람처럼 조심조심 치아를 건드린다. 혀를 얽고 부드러운 안쪽 살을 두들겼다. 느리지만 진득한 키스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 흘렀다.
예전에 손잡는 걸 어색해 하며 도망가던 지훈이가 승철이 기어코 자신을 잡고 깍지 낀 손을 가만히 내려 보며 그런 말을 했었다. 형을 만나고 나서 봄이 어떤 건지- 해가 이렇게 따뜻하고 스치는 바람에 꽃 냄새가 나고 푸른 풀들이 싱그럽다는 걸 알게 됐다고. 그 전에 해는 날카로운 창처럼 피부를 찌르고 스치는 바람에 들리지 않는 소음이 섞여 혼미하게 만들고 푸른 풀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에게 위협을 가했었는데- 그 말도 붙였다. 그래서 형이랑 있으면 그 전 세상이 가짜인 것처럼 느껴져요. 지금에서야 나는 진짜인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그 때부터 지훈이 승철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여전히 승철이 다가가 스킨십을 하려하면 음식물 쓰레기 봉투 잡은 것처럼 엄지 검지로 철의 손가락을 잡았고 헤어질 때 하는 포옹에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받아들였다. 승철에게 밥을 먹었냐 소소한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일부러는 아니지만 자신의 친한 친구도 소개했다.
“뭘 느꼈어?”
“형이 절 많이 사랑하네요.”
지훈의 보조개가 푹 파인다.
“그럼. 내가 널 많이 사랑하지. 너 내거잖아.”
“....오글거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더 할 건데?”
승철이 키득거렸다.
“넌 내 센티넬이니까 딴 가이드에 눈 돌리지 말고 나만 봐.”
“아 좀..”
비린 음식을 한 입에 먹은 것처럼 표정이 썩어간다. 그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그러다 표정을 지우고 너 내가 딴 센티넬이랑 붙어먹으면 좋아? 물었다. 지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서 조용하게 분노를 터뜨린다. 가이드에 대한 센티넬이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는 인터넷에 치기만 해도 줄줄이 나와 있다. 좀 나쁜 내용으로 가득 찼지만 센티넬에게 있어 가이드는 제 목숨보다 소중하다.
“가만 안 둬요.”
“누구를?”
“그 놈이요.”
그런 것에 표현이 약한 지훈이 승철의 손목을 꼭 쥐며 화를 터뜨릴 정도니까.
승철은 지훈의 뺨과 입술에 키스를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한 쪽으로 짓눌렀던 어깨를 쭉 피고 허리를 어린아이처럼 달래어 천천히 뉘었다. 포근한 이불에 감싼 허리가 풀린다. 긴장에 잠긴 몸이 풀리고 가벼웠던 눈꺼풀도 무거워진다. 허리를 감쌌던 지훈의 손이 죽 내려가 승철의 배꼽가운데로 안착했다.
“미안해 하지 마. 그렇다고 고마워도 하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여. 센티넬 가이드라서 한 거다 그런 게 아니고 너랑 나라서 한 거라고. 내가 널 사랑하고 너가 날 사랑해서 그런 거야.”
지훈의 큰 손이 승철의 배를 두들긴다. 잠을 부르는 포근한 두들김에 몸 안에서 파동을 일으킨다. 아주 작은 소리-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린다는 지훈에게 이 부드러운 파동도 들리지 않을까? 궁금증이 문득 들었다.
“형하고 …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다만 이렇게 된 걸 후회하는 거죠.”
조용한 침묵을 가르는 지훈의 목소리에서 짙은 후회가 담겨져 있다. 센티넬이라서, 가이드라서 해야만 했던 관계가 속상한 것이다. 이런 거 말고, 지훈이 센티넬이 아니고 승철이 가이드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만나기를 원했다.
승철은 지훈의 손을 찾아 손깍지를 꼈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손을 같은 힘으로 잡아준다. 승철은 단단하게 잡은 두 손을 얼굴 위까지 올렸다.
“네 번째 손가락 보여?”
“각..인이예요?”
“반지처럼 나왔어, 우리.”
마주 잡은 손 네 번 째 손가락에 검은 링처럼 둥글게 그려진 표식. 손바닥 부분에서 뚝 짤리다 마주 잡은 다른 손바닥에서 다시 이어져 두 손가락은 하나의 링을 낀 것 같이 보였다.
“난 내가 가이드고 너가 센티넬이라서 감사해. 이건 너랑 나랑만 있는 거잖아.”
똑같은 게 없다는 각인. 센티넬마다 표시되는 각인은 다 다르다 했다. 그것이 우리는 미래를 약속한 연인들처럼 반지로 나왔지 않은가. 가이드는 로맨티스트죠~. 몇 년 전 자신에게 얘기하던 선생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선생님. 로맨티스트는 제가 아니라 센티넬 같은데요. 속으로 반문했다.
“예쁘다.”
승철이 잡은 손을 내려 지훈의 손등에 키스했다. 승철이 숨이 피에 스며들어 온몸을 돈다. 지훈은 푸스스 풀어지는 입술을 앙 물었다. 입꼬리 끝이 푸드들 떨려 흔들렸다. 킬킬, 작은 틈새로 새는 웃음 소리에 승철이 한 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처음으로 웃는 지훈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다.
지훈아. 가끔 나는 너를 볼 때면 죽어도 소용없다는 듯이 구는 너가 많이 불안했어. 오랫동안 혼자 고독에 잠겨 있어서 그런거라 하기엔 어느 하나 세상에 미련 없이 홀홀 먼지를 털고 저세상으로 갈 것 같았어. 내 옆에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고 너랑 같은 것을 보아도 너의 눈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만나는 횟수가 늘고 가까워지면서 너의 그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나는 그것이 서운했지만 건들진 못했어. 어쩌면 내가 가벼운 마음이어서 그랬을 지도 모르지. 우리의 관계를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옆에만 있어주면 다 된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와 처음 키스 한날부터, 두 번째 키스한 날, 세 번째…여섯번 째. 너와 혀를 섞고 스킨십이 깊어지면서 너의 격렬한 감정이 나에게 넘어오고 너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깨달았어.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단순히 센티넬을 위한 가이드로 사는 것이 정답이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건지 부끄러워 숨고 싶었지.
너를 안 지 얼마 안 된 날. 센터에서 받은 책을 읽다 궁금해서 물었던 센티넬의 죽음에서 처음으로 보여줬던 너의 우울함에 나는 다짐했었는데.
미소가 떠난 너의 얼굴에 미소를 찾아줄게.
너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죽음을 이제는 내가 네 옆에 있어 떨어트려줄게.
그리고 내가 널 구해줄게.
나의 센티넬.
이 지훈 너를, 내 마음 속에 새겼었는데. 왜 이렇게 변했던 걸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지만, 사실 무지하게 도망가고 싶었지만 나는 도망가기보다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왜 만났을까. 왜 우리였을까. 하늘에서 정해준다는 인연은 별 거 아닌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너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 시작했지.
“이기적인 발언 같은데.. 그러니까..”
승철이 눈동자를 굴렸다. 기다란 창 팔랑이는 커튼 뒤에 유리구슬이 또르르 돌아간다.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깜박이다 반짝 빛난다.
“넌 내거고 난 네거야.”
내가 말했는데 내가 죽을 것 같아. 승철이 몸을 돌려 지훈을 꼭 끌어안으며 버둥거렸다. 엉킨 다리에 부딪혀 지훈이 슬그머니 허리를 뺐다. 그런 지훈에게 승철은 어디 가냐고 허리를 잡아 당겨 끌어안았다. 틈 없이 밀착한 사이로 뜨거운 것이 닿았다. 승철의 눈동자가 커지고 지훈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올라와.
부끄러워하며 머뭇거리던 지훈이 상체를 일으켜 승철의 위로 기울어진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승철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한다. 형처럼 오글거리는 말은 못하겠고- 많이 고마워요. 알아. 사...사... 좋아해요. 나도.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나의 센티넬.